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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1부 바람의 노래 쪽문 12 갈대밭에서 귀를 세우다 14 새의 밀서 16 몽돌을 굴리다 18 텔레파시 20 누에섬 22 반야사 배롱나무 24 오목눈이집 26 자작나무 탄력 28 혀 30 환승 32 2부 바닥을 읽다 굶주린 전광판 36 바닥을 읽다 38 고장 난 내비게이션을 켜고 40 도시 사냥꾼 42 중독 44 밤의 고수 46 통돌이세탁기 48 인앤아웃 50 문래동의 봄 52 돌아가는 타이머 54 코앞이 절벽 56 페이스 메이커 58 3부 돌의 지문이 아프다 돌의 지문 62 가출은 또 다른 가출을 부르고 64 자두 66 얼굴을 비비다 68 구제 신발 70 콜링 72 그해 여름 저녁 74 나뭇잎 책갈피 76 석이의 비석 78 오형석탑 80 들돌 82 부겐빌레아만 붉다 84 4부 그늘집 지어 올리지 엄나무 88 명주달팽이 90 가면놀이 92 칼집 내기 94 천국 분양 96 부다와 페스트 98 다뉴브강의 신발들 100 풀문 102 그늘 의자 104 아이스 클라이밍 106 공중곡예 108 **해설 옆걸음도 뒷걸음도 없이┃박덕규(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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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문
그곳은 바람이 다니는 길 쪽문을 나서자 꽃무늬 치마가 팽팽해진다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솟은 듯 발걸음이 날고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비닐봉지였다가 애드벌룬이었다가 때로는 날개옷 입은 바람개비처럼 팔다리를 사방으로 흔들어댄다 나는 전생에 바람을 신으로 모시는 유목민이었나 숨구멍은 쪽문으로 뚫려있어 산책로 철망을 향하면 좌우 살필 겨를이 없다 되돌아오는 길, 잃어버리고 떠돌이 바람이 되어 너도바람꽃 콧잔등에 간지럼 태울까 이도 저도 시큰둥한 걸음걸이 이 골목 저 골목 바람결에 떠돌다가 가로등 아래 누운 긴 그림자 뒤를 밟는다 땅거미가 발자국을 삼키는 쪽문 앞에서 내 안에 갇혀 있던 바람이 문을 나선다 환승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올 때마다 방향을 잃는다 불빛이 넘실대는 거리를 등지고 건물 그림자 얼룩진 골목으로 습관처럼 들어선다 신호대기 중인 차들 눈 부릅뜨고 일제히 출발 신호 쪽으로 한 뼘 두 뼘 타이어를 움직이는데 너에게로 가는 길목에서 등을 돌린다 너와 내가 스쳐갈 환승 시간이 다가올수록 가로수 잎사귀가 난독증을 앓는다 직진만 배우던 길 위에서 후진등을 켜고 있다 어쩌면 더는 돌아오지 않을 환승구간 너를 향한 발끝이 정지선에 멈춰 있다 너무 밝은 불빛에 눈앞이 캄캄해지듯 환승하는 밤엔 무언가 자꾸 자란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지하로 아무 일도 아닌 듯, 아무것도 아닌 듯 자꾸만 사라지는 얼굴이 있다 바닥을 읽다 꿈이라는 게 어디에 닿아도 다섯 발가락 가지런히 앞세우는 거라니 땅 꺼지듯 바닥을 찍어 누른 후 한 발 앞서가는 게 고작, 구르는 돌 허공으로 차올리는 일 홀로서기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두 다리로 버텨온 시간이 발바닥에 겹겹이다 궁지에 몰릴수록 오체투지 몸부림을 생각해 본다 서해안 개펄 어디쯤이었던가 가장 낮은 몸으로 바닥을 살폈던 일 농게가 들락거린 캄캄한 숨구멍의 정적을 보았다 갈매기 그림자만 스쳐도 구멍으로 숨어드는 농게처럼 낮아질수록 더 깊은 곳으로 몸을 숨긴다 옆걸음도 없이 뒷걸음도 없이 밟고 밟히며 묵묵히 지상의 땅바닥을 버텨온 무게 길바닥을 삼킨 싱크홀이 오늘도 아가리 크게 벌리고 있다 통돌이세탁기 상하좌우 마구 돌려지고 싶어 네 속에서 허리가 뒤틀리고 내장이 뒤죽박죽되더라도 군더더기 털어내고 싶어 나를 맘껏 돌려줘, 눈알이 뱅글뱅글 윗도리 아랫도리 한 몸으로 엉키는 한여름밤 나 하나쯤 사라져도 좋겠어 구름 거품에 불평 쏟아낼 필요 있나 너덜대는 보풀쯤이야 어때 찬물, 뜨신물 번갈아 몸 헹궈봐 붉은 꽃망울 솟아오르듯 너의 출렁거림은 숨 가쁜 리듬이야 너는 나를 언제나 타이머에 가두지만 나는 즉흥적인 게 좋아 탈 탈 탈, 흰 나비들이 몸 안에서 생기니까 다른 세상으로 눈부시게 날아오를 수 있으니까 여기저기, 이리저리 펄럭이는 날갯죽지처럼 물거품이 사라질 때까지 제발 좀 흔들어 줘 물방울 젖지 않는 샤프란 향이 뼛속에 저며들 때까지 내가 눈뜨면 톱니바퀴 세상이 함께 열리게 돌의 지문 모래톱에 묻힌 돌들이 굴착기 삽날에 얼굴을 드러낸다 이 골짝 저 골짝 떠돌던 사연들 강가로 굴러와 저마다 입을 열고 있다 소용돌이 가장자리에 서 있는 검은 돌 하나 낯선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어느 급류에 떠밀려 왔을까 깨지고 터진 자리마다 움푹한 상처들, 물결 따라 모난 곳 깎이고 둥글어져 있다 검은 돌 손에 쥐자 햇살에 달궈진 돌의 따뜻한 기운이 휑한 내 가슴을 데운다 품에 맞는 돌을 찾아 맨발로 돌아다닌 발바닥에 수천 가닥 돌의 지문이 아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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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낮은 곳에는 말하지 못한 사연과 오래 머물다 간 발자국이 쉽게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 그 흔적들 오래 들여다보다가 몇 줄의 시를 얻었다 이 시집은 바닥에 남겨진 마음들에게 늦게 건네는 나의 안부다 2026년 가을 이복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