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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삶을 인정해야 한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과제인지. 나는 삶을 인정할 생각이 없다. 삶이나 나를 인정하든 부정하든 하라지. 하지만 삶은 아무 말이 없다. 죽음은 그래도 뭐라고 말을 한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무슨 말을 하지만, 나는 알아듣지 못한다.
--- p.12 나는 해야 한다. 나는 또 나는 또… 지긋지긋한 나. 내가 없는 세상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써 있는 세상이 있다면: 태초에 내가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영영 사라졌다. --- p.32 나를 미행해야 한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무슨 계획이 있는지 나에게 상세하게 보고해야 한다. 한 순간도 나를 시야에서 놓치면 안 된다. 내가 나에게 위협이라니! 이해가 안 돼! 그런데 나 자신을 어떻게 미행하지? 나는 매번 나보다 한 발 앞인걸. --- p.48 죽는 순간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잠깐, 이것만 좀...’ 실제 말하지 않아도 들린다. --- p.55 해야 한다. 그런데 하기 싫다. 아침에 잠에서 깨면 온갖 의무들이 나를 이빨로 물고 결코 놓지 않는다. --- p.81 내 안의 나를 마주해야 한다. 무릇 나를 알아가는 것이 철학의 기본이다. 이 책은 그림 속 다채로운 인물들을 통해 나와 내 안의 내가 벌이는 내적 갈등과 번뇌를 투영하는 철학 그림책이다.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아는 이 둘의 대화는 친밀하고 논리적이며 무엇보다 직설적이다. 가령 _나는 싸워야 한다. 그들은 나에게 적을 보낸다. 그는 내 앞에 서서 응시한다. 그리고 “내가 당신의 적이야.”라고 말한다. “나도 알아.” 내가 대답한다. 이 세상에 나보다 그 사람을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둘 다 한숨을 쉬고 싸움을 시작한다._ 이러하다. 그런데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유발자는 누구일까? 모든 것은 아니더라도 거의 대부분 내 안의 나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별개로 읽혀지지 않고 마치 내 이야기 같다. 혹시 지금, 기상해야 한다. 출근해야 한다.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도착해야 한다. 식사해야 한다. 계산해야 한다. 미팅해야 한다. 단정해야 한다. 생각해야 한다. 대화해야 한다. 직시해야 한다. 반성해야 한다. 한 잔해야 한다. 귀가해야 한다. 연락해야 한다. 취침해야 한다. 다시 또 기상해야 한다… 이렇게 머릿속에 해야 할 일이 가득하다면, 단언컨대 당신은 지금 이 책을 필독해야 한다. 만약 삶을 정산해야 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더 값진 삶을 위해 우선 내가 변해야 할까. 더 착하고, 상냥하고, 자유롭고, 진지하고, 정직하고, 솔직하고, 지혜롭고, 침착하고, 인내심 있고, 자신감 있고, 목적 지향적이고, 사려 깊고, 재주 있고, 끈질기고, 성실하고, 한결같고, 결단력 있고, 활기차고, 명랑하고 그냥 한마디로 지금과는 달라져야할까? 더 직접적인 상황을 그려 보자. “이번 인생을 맛있게 드셨습니까?” 누군가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양이 좀 적고, 때로는 덜 익었고, 때로는 너무 식었고. 게다가 서비스는 영! 곧이어 계산서가 나온다. 생각보다 너무 비싸다. 내가 돌려보낸 것들, 내가 주문하지 않은 것들, 도무지 먹을 수 없었던 음식도 있는데 나는 그 값도 지불해야 한다. 그렇다면 심히 억울하지 않을까? 삶은 단 한번뿐이다. 지금을 살아야 한다. 언제든 기꺼이 정산할 수 있도록 지금 행복하게! 행복해야 한다. 내 안의 목소리는 이렇게 말하지만 내가 말한다. ‘행복이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럼 뭐가 중요한데?’ ‘글쎄, 그냥 행복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알겠어.’ ‘그럼 뭐가 중요한지 언젠가는 알게 될 것 같아?’ ‘아니.’ 침묵이 흐른다. 잠시 후 내 안의 목소리가 목청을 가다듬고 나지막이 말한다. ‘그래도 행복해 봐.’ --- p.78 |
편집일지
이 책은 동일 작가들의 전작 [생각한다]와 궤를 같이 한다. 대담하고 다채로운 그림이 단단한 글과 마침맞음으로 어우러질 때마다 나는 몇 번이나 무릎을 치고 경탄했는지 모른다. 당연히 잘 편집해야 한다는 당위와 강박과 구속과 강요로, 무한 교열 윤문에 디자인을 고민하다 보니 전작보다 6개월 더 걸렸다. 트레이싱지 자켓은 [생각한다]와 마찬가지로 이 책의 예술성과 진면목을 베일처럼 가려 시선을 이끌고, 본문 안에 사철로 엮인 4장의 노란색 트레이싱지는 봄처럼 산뜻하다. 트레이싱지를 넘길 때마다 그 위에 얹어진 문장들이 좌우를 바꿔가며 다양한 강박과 의무감을 반전처럼 허물어버린다. 이 책의 제작 사양은 트레이싱지 자켓, 문켄 표지, 비비칼라 면지 등 다양한 고급지에 헤드밴드가 더해졌다. 특히 습도에 민감한 트레이싱지는 특수 UV인쇄를 해 미세한 번짐조차 없다. 누구라도 자아를 마주하고, 행복을 상기하는 데 부족함 없이 아름답다. 끝으로 이 책을 편집하는 동안 나와 내 안의 내가 매일같이 나누었던 무언의 대화로 갈무리해 본다. [정말 잘 해야 한다. 과연 최선인지 더 고민해야 한다. ‘지금도 계속 고민하고 있잖아!’ / ‘그건 고민이 아니야.’ / ‘그럼 대체 뭐란 말이야?’ / ‘그냥 생각해 보는 거지.’ / ‘이게 그냥 생각하는 거라고?’ / ‘그래, 진짜 고민을 해 봐.’ (한참 침묵이 흐른다.) 나는 다시 책을 펼치고 고민한다. 나도 더 이상 아무 말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