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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인물
1 개구쟁이 소년 2 높은 학구열 3 스승의 가르침 4 죽음의 문턱 5 독립을 위한 투쟁 6 한인 애국단 결성 7 해방의 기쁨 8 통일 정부를 위해 역지사지┃라이벌 & 서포터┃인물 스케치┃용어 해설┃교과 연계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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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외친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거에 이어 4월 29일 윤봉길이 수류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 파견군 대장 등 5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일로 세계가 주목했고,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는 “4억 중국 인구가 해내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고 격찬했다. 이 사건들의 주축이 된 한일 애국단을 창설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앞장선 사람이 바로 백범 김구이다.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못 말리는 개구쟁이였던 그는 정의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정의로운 아이로 자라났고,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열심히 학문을 닦았다. 그러나 막상 과거 시험을 보러 간 곳에서는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그 모습에 실망한 나머지 결국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평등 사상을 내세우는 동학에 입도하여 탐관오리와 왜놈을 무찌르는 데 앞장섰다. 이 무렵, 일본이 명성 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구는 이에 복수하기 위해 일본인 한 명을 살해하여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고종의 특사로 목숨을 구했다. 이후 계몽 활동과 교육 활동을 활발히 하며 지냈다. 그러던 중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김구는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했으며 이후 1908년에는 신민회에 가담하는 등 열심히 구국운동을 했다. 1919년에는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에는 내무총장, 1924년에는 국무총리 대리, 1926년에는 국무령에 취임했다. 1939년에는 임시정부 주석이 되었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하긴 했지만 그는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남북이 나뉘어 각각 미국과 소련의 신탁 통치를 받게 된 것이다. 그해 11월, 임시정부 주요 인물들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와 신탁 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으며, 1948년 4월에는 남북 협상을 위해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는 등 민족 통일을 위해 여러모로 애썼다. 그러던 중 1949년 6월 26일, 그의 사저였던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총에 맞아 서거하였다. 그의 유해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독립 전에는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독립 후에는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김구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