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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의 거장이 그려낸 삶의 아이러니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주식시장에서 큰돈을 벌 수도, 투수가 어떤 공을 던질지를 내다보고 매번 홈런을 치는 메이저리그의 슈퍼스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꿈이 소박하거나 원대하거나, 무엇을 상상하든 적어도 데이비드 셀리그의 삶보다는 나을 것이다. 소설《다잉 인사이드》는 미국 SF 문학의 황금기를 빛낸 거장 로버트 실버버그의 작품이다. 국내에는《나이트폴》,《바이센테니얼 맨》등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을 개작한 작가로 더 유명한 실버버그는 “실버버그의 길을 따르면 과학 소설은 순수 예술이 된다”는《어소시에이티드 프레스Associated Press》의 평가에서처럼, SF의 소재에 형이상학적 주제를 결합한 독특한 작품관으로 유명하다. 《다잉 인사이드》 역시 텔레파시라는 SF의 단골 소재를 변주해 ‘삶’과 ‘관계’에 대한 풍부한 은유를 제공한다. 어쩌면 주인공 셀리그는 SF계의 촉망받는 천재로 등단해 온갖 명성을 누려온 실버버그의 환멸과 불안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역자의 평가대로, 이 작품은 SF 문학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깨고 미국 현대사에서 격동의 시기였던 1960년대 젊은이들이 겪었던 혼란과 좌절을, 그리고 필멸의 존재인 우리의 자화상을 그려낸다. SF 특유의 재치와 상상력을 가동하면서도 삶과 사회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드러내는 이 작품은 SF 마니아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까지 사로잡을 수작이다. 영웅도 슈퍼스타도 백만장자도 아닌 초능력자 데이비드 셀리그,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 친구도 가족도 없이 뉴욕 변두리의 이민자 아파트에 살며 리포트 대필로 생계를 이어가는 그의 모습은 실패자 그 자체다. 사실 그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는 놀라운 능력을 타고났지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수준에 맞는 리포트를 써주기 위해 학생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때와 마음에 드는 여자를 침대로 끌어들일 때뿐이다. 그런데 자신의 능력이 소멸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는 혼란과 불안에 사로잡힌다. 더 이상 예전처럼 심심풀이로 사람들의 마음속을 산책할 수가 없고, 화해를 청해오는 여동생이나 자신을 유혹하는 낯선 여자의 진심을 알 수도 없다. 심지어 영문도 모른 채 집단 구타를 당하기도 한다. 그는 사라져가는 능력을 붙잡아야 할지 아니면 평범해지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지, 선택할 수 없는 문제를 두고 고민한다. ‘다잉 인사이드’라는 제목은 표면적으로는 셀리그의 내부에서 죽어가는 괴물, 즉 사라져가는 초능력을 암시하지만, 실제 작품 속에서 이는 셀리그라는 존재의 사멸과도 연관된다. 작가는 놀라운 텔레파시 능력이나 흥미진진한 사건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삶의 여러 단면들을 모아 셀리그라는 소심하고 평범한 인간의 내면을 재구성한다. 이상하고 불쾌한 아이로 취급받았던 유년 시절, 그의 비밀을 알고 있는 여동생과의 불화, 몰래 훔쳐본 남들의 사생활, 비극으로 끝난 두 번의 사랑 등의 에피소드가 현재의 사건과 퍼즐처럼 교차된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이자 관계와 소통의 뿌리라 여겼던 초능력이 사라지면서 스스로의 존재 자체에 위협을 느끼는 셀리그의 불안은 결국 삶과 관계 맺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성인판《호밀밭의 파수꾼》 이 책은 성장에 관한 은유로 가득 차 있다. 일찌감치 삶의 비밀을 알아버린 셀리그는 친구도 얻지 못하고 사랑도 잡지 못한 채 관음자나 아웃사이더로 자처하며 무기력하게 젊음을 낭비하다가 중년에 접어든다. 한편으로 기성세대와 사회의 속물근성에 환멸을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 젊은이들의 무분별함에도 냉소를 보내던 그는 자신을 남들과 다른 존재로 만들고 그들에게서 떼어 놓았던 초능력이 사라지면서야 제3자처럼 방관해온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이처럼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주인공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성장소설의 전범인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의 성인 버전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무소불위의 능력이 모두 사라진 후,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받아들이게 된 후에야 세계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셀리그의 아이러니에는 희미해져가는 젊음에 대한 아쉬움이나 세상과 타협해가는 과정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처럼 철학적 문제를 다루면서도《다잉 인사이드》의 세계는 무겁거나 심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감각적이다. 소심한 초능력자라는 설정의 아이러니, 비밀을 숨겨야 하는 상황에서 초래되는 긴장감에서는 재치와 유머가 빛난다. 초능력자인 주인공의 진술을 통해서 비행 중인 꿀벌이나 헤엄치는 송어의 마음, 환각 상태의 상대방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 등 우리가 볼 수 없는 언어 이전의 세계가 감각적으로 재현되고, 과감한 성적 묘사와 관음이라는 소재는 좀더 자극적인 독서 체험을 제공한다. SF에 격동의 미국 현대사를 담아내다 세월의 흐름 앞에서 점차 왜소해지는 자신을 깨닫는 셀리그의 모습은 바로 필멸의 존재인 우리의 자화상이다. SF 소설로서는 이례적으로 동시대의 미국 사회를 작품의 배경으로 삼은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1935년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컬럼비아 대학 졸업생이라는 것과 광범위한 독서 이력까지 작가 실버버그를 닮았다. 또 이 책에 논문 형식으로 삽입된 카프카의 작품이나 그리스 비극에 대한 분석은 작가의 지적 탐구를 보여주며, 학생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당시의 대학가, 닉슨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선거, 케네디 암살 사건 당시의 사회상 등은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청년과 흑인과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높인 대항 문화의 시대이자, 베트남 전쟁과 마약과 히피와 로큰롤의 시대였던 1960년대, 셀리그 일생의 진정한 사랑이었던 두 연인 키티와 토니를 만난 해가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해인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키티와의 로맨스가 있었던 1963년은 셀리그의 표현을 빌리면 “서구 사회에 급습한 엔트로피의 혼돈과 철학적 절망의 긴 가을이 오기 전에 희망과 활기로 넘쳤던 마지막 여름”이었고, 토니와 만났던 1968년은 “모든 세상이 조각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깨닫게 된 바로 그 해”였다. 실버버그는 셀리그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들의 세대가 겪었던 혼란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