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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서랍 / 어제 진 꽃 오늘 핀 꽃 / 소나기 / 블론드는 슬픈 색 / 벚꽃 핀 날 이사를 합니다 / 지루한 일기도 울타리는 반짝이지 / 이번 여행은 온천이에요 / 건너편 공간은 넓다 / 뱀이 온다 / 발롱ballon / 비닐봉지, 너는 끝났어 / 빌딩은 사람보다 단단해 보인다 / Tombe La Neige / 어떤 영화 2부 공룡이 운다 / 우리는 즐겁게 살았어요 / 이젠 뚱뚱해질래 / 추모관 / 전주 / 고잔古盞 / 오후 두 시 / 철암鐵巖 / 우리는 친하다 / 가을밤 외로운 밤 비 내리는 밤 / 마지막 파도 3부 웅크린 사람 / 공원 / 울지 않는 사람 / 아르바이트 / 나는 누구의 클리셰일까 / 퇴근 / 아무것도 못 할 때 나는 아름다웠네 / 쟁반 위에는 과일들이 있다 / 연노랑과 연두 그리고 초록 / 도형이 태어나는 일 / 중앙역 / 불탄 자리에 고사리가 핀다 / 패밀리 트리 / 정오 4부 드로잉 / 실습복을 벗자 / 카메라를 맡길게요 / 가까우니까, 주머니 / 엄마 / 조금 열린 창틈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 원하던 아이 / 주파수 / 도서관 / 기프트 박스 / 소녀 해설 갈등의 양면과 동시성 | 최은묵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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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가 내리고 나면
지상은 한 뼘쯤 키가 큰다 가물가물한 약속 흐릿해지는 얼굴들은 굳이 기억하지 말자고 오늘은 기특함을 하나 배달하러 갑니다 오래 안고 있다 보니 셔츠가 축축합니다 이젠 제법 슬픈 것과 기쁜 것이 깨끗한 상자 속에 함께 접혀 있는 걸 봅니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해요 그릇에 오래 담아 놓은 눈물처럼 이게 뭘까요? 한번 들여다보세요, 라며 달려오는 어린아이처럼 맑고 가볍게 난 7월이 되죠 ---「소나기」중에서 어둠은 비밀을 지킬 힘이 없지 다만 비밀이 어둠에 숨어드는 거라고 흑연黑鉛이 가득 들어차 있는 창문의 안쪽 더듬거리며 밥을 먹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잘 들어보면 숨어 있는 사람이 보이지 이제 그만 집으로 들어오라는 말 그 말은 창문을 닫는 말일까 여는 말일까 문득 하나의 창문을 두고 지루한 공방을 펼치는 논객들처럼 의심과 슬픔이 검은 돌처럼 빛난다 ---「드로잉」중에서 신호등은 박자를 갖추고 있어 내게 불쑥불쑥 찾아오는 행운과 불운도 박자를 갖추고 있는데 그걸 왜 나만 모를까 코피가 떨어진 셔츠를 찬물에 씻는다 연한 빨강이었다가 점점 더 연해지는 수돗물 그럴 때 노을이 진다면 완벽한 클리셰 슬픔이나 불안이 코피로 몸 바꾸는 걸 보며 세상엔 기적이 있다고 확실하게 알았지 좋은 일만 기적이 아니잖아 다시 코피를 기다리는 그 힘으로 해가 졌으면 좋겠다 ---「나는 누구의 클리셰일까」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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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것과 살아주는 것
조혜경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장만옥 말고 엄마가』는 첫 시집『그 오렌지만이 유일한 빛이었네』와 다른 층위를 이룬다. 첫 시집이 세상의 바닥을 긁어모은 소리를 온몸으로 품었다가 툭, 몇 개의 이미지를 꺼내놓는, 그래서 ‘살아가는 것’과 ‘살아주는 것’의 차이를 오래 생각하게 만든 느낌이었다면, 두 번째 시집은 바닥에 오래 쌓인 소리를 애써 건드리지 않고도 그것들이 스스로 소리를 내도록 자리를 만들어 준다. 그런 연유일까, 첫 시집에서 품었던 삶의 질문들은 한층 더 무거워졌고, 삶과 죽음의 균형추가 흔들리는 폭이 예전보다 커짐을 확인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이라는 화두는 너무나 평이해서 상투적이지만, 이것은 여전히 근원적 물음이며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모두의 이야기이다. 물론 이것이 조혜경 시집 전체를 아우르는 화두는 아니지만 조혜경은 여전히 ‘살아가는 것’과 ‘살아주는 것’의 차이를 고민하고 있으며, 더불어 타자로부터 흡수한 갈등을 자신의 몸에 관통시킴으로 사유하는 방식을 고집한다. 이렇게 볼 때 시집 『장만옥 말고 엄마가』는 특별해서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한 이야기를 매만지며 공감의 영역을 담보한다. 시집 속 화자는 특별한 누구가 아니라 화자에 투영된 시인이고, 함께 고민하는 독자이고, 이 시대의 질문자라는 사실은 읽는 이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시인은 시적 대상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클리셰이다.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은 속박이 아니라 어울림에 가깝다. 그러므로 시인은 언제든 어디서든 시적 대상과 똑같은 호흡을 낼 수 있어야 하며, 흉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체온을 얹을 줄 알아야 한다. 시는 혁명도 아니고 기적도 아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뻔한 클리셰를 자신만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중에 조혜경의 시가 조혜경의 목소리로 삶을 이야기한다는 점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장만옥 말고 엄마가』에서 시인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평범한 서사를 재해석하는 정도의 가치만은 아닐 것이다. 이 지면에서 다루었던 시인의 목소리는 단편적일 뿐, 다른 이들은 창밖과 창안, 주머니 속과 밖, 움켜쥔 주먹과 펼친 손, 슬픔과 기쁨,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 동시에 양 갈래로 뻗는 언어의 방향성에 시선을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 시인의 말 나의 나 됨은 오직 하나님 은혜니, 이 시집이 그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