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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
머리 없는 닭, 밤을 헤매다 곤드레만드레 SF 이불 속의 우주 아이의 얼굴 무전기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아이들아, 잘 자요 옮긴이의 말 |
Ichi Otsu,おついち,乙一,야마시로 아사코(山白朝子), 나카타 에이이치(中田永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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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대다. 바이러스가 감염되는 것처럼 생리학적인 방법으로 귀신에 씐다는 보장은 없다. 그런 내용을 다룬 위대한 호러 소설이 있었던 것도 같지만 이건 별개다. 지후유는 바닥에 지도를 펼치고 3월 19일에 우리가 다닌 경로를 형광펜으로 표시했다. 길고 검은 머리가 지도 위로 늘어졌다. 나는 두 목록을 비교했다.
--- p.19 그렇다. 그런 닭은 실제로 있었다. 학술 기록도 남아 있다. 하지만 일본에도 있다니 놀라웠다. 교타로라는 이름의 닭은 날개를 움직이고 두 발로 땅을 팍팍 파헤치며 하얀 깃털을 흩뜨렸다. 하지만 있어야 할 것이 보이지 않았다. 볏, 부리, 눈, 다시 말해 머리가 없었다. --- p.52~53 만취한 여자의 귀는 이를테면 타임 터널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여자의 머릿속은 시간이 혼탁한 상태이므로 경주가 끝나고 들은 말을 경주가 시작되기 전 시간에 있는 협력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 만취한 여자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경주가 시작되기 전의 세상도, 끝난 후의 세상도, 여자 주위에 동등한 상태로 존재한다. 그걸 이용하면 된다. --- p.79 “기묘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처음으로 자각한 건 둘째 날 밤이었습니다. 전처와 딸을 생각하며 이불 속에 누웠죠. 까무룩 잠이 들려는데 따뜻해진 발끝에서 간지러운 감촉을 느꼈습니다. 보리 이삭이 발가락을 스치는 것처럼 간질간질하더군요. 공중그네에 앉아 보리밭 위를 지나가며 늘어뜨린 발에 이삭이 닿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그야말로 껄끔껄끔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이 피부 신경을 자극하더군요. 놀라서 이불을 젖혔죠. 볕에 말릴 때 보리 이삭이 바람에 날려와서 붙었나 싶었어요. 하지만 불을 켜고 확인해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 p.111 남편이 야근에서 빠지지 못한 날, 나 혼자 딸을 목욕시켰다. 아기 욕조에 미지근한 물을 채우고 조심스레 딸을 담갔다. 몸을 씻기면서 문득 이대로 물속에 가라앉히면 어떨까 싶었다. 매력적인 발상 같았다. 이것만 없으면. 이딴 년만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때 딸이 여자 화장실에서 우리에게 애원하던 요리코로 보였다. 그 아이는 우리가 뭘 어쩌든 전혀 저항하지 않고 자기 운명을 받아들였다. 체념한 듯 힘없이 광채를 잃은 눈이 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 p.141 나는 히카루의 목소리가 환청이라는 걸 내내 의식하고 있다. 이건 허구의 이야기다. 하지만 정말로 저승이 있고 나쓰미와 히카루가 거기서 죽은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이 종교를 만들고 사후 세계를 이야기하는 건 죽으면 소멸한다는 공포 때문인 줄만 알았다. 어쩌면 세상을 떠난 이들을 사랑하고 또 위로하는 마음이 종교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원동력일지도 모르겠다. --- p.164~165 조사 결과 역시 환청으로 판명되어 내 머리가 다시 이상해졌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면 그걸로 안심이다. 내 머릿속에서 끝날 환청이라면 아무 문제도 없으리라. 제일 평화로운 결론이다. 하지만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불행한 일이다. 실제로 여자아이가 목소리를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니까. 그 목소리가 어디서 들리는지 찾아내서 무슨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내가 정상일까 봐 우려해야 하다니 얄궂기 그지없지만. --- p.190 각양각색의 인생이지만 하나같이 축복과 비애로 가득하다. 든 필름이 별처럼 반짝여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영상이 끝날 때마다 나는 운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죽은 자의 나라로 떠나는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아이들아, 잘 자요. 사람들아, 잘 자요. 잘 자요, 편안하게. --- p.2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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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
아내와 함께 사는 아파트에서 세 번째 유령을 보게 된 ‘나’. 피곤한 탓일까, 아니면 정신에 이상이 생겼나. 아내에게 털어놓자 그녀는 “나에게도 보인다”고 담담하게 대답한다. 심령 현상의 원인 및 재발 방지를 위해 데이터 수집과 실험에 고심하면서 두 사람은 귀신의 정체와 그 진실에 다가가고. 그러던 어느 날, 유령의 형상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한다. 머리 없는 닭, 밤을 헤매다 전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덤불 속에서 외톨이 동급생 미즈노 후코를 만나게 된다. 후코는 ‘교타로’를 애타게 부르짖으며 찾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발밑에서 슉 하고 바람 빠지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닭이다. 하지만 있어야 할 것이 보이지 않는다. 볏, 부리, 눈, 다시 말해 머리가 없다. 곤드레만드레 SF 소설가인 ‘나’에게 대학 후배 N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의 여자 친구가 술을 마시면 특별한 재능을 발휘한다는 것. 바로 타임슬립 능력이다. N은 스포츠 배팅에서 대박을 꿈꾸는데, 그 재능을 어떻게 써야 좋을지 소설가로서 상상력을 발휘해 알려달라고 집요하게 매달린다. 이불 속 우주 오랫동안 슬럼프에 빠져 있던 소설가 동료 T가 어느 날 어느 문예지에 신작 단편을 발표한다. 이대로 그가 문단에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의 우려와 달리 T는 변함없는 필치로 자신만의 기량을 훌륭히 발휘했고, 흥분한 나는 그와 만나 상상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이상한 이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이의 얼굴 철없던 학창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한 여자아이를 괴롭혔던 네 사람. 그런데 그 무리 가운데 세 사람이 자신의 손으로 아이를 살해했다. 졸업한 뒤 그들과 거리를 둔 채 살아가는 ‘나’는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중 한 사람에게 편지를 받는다. 태어난 아이가 한때 자신들이 자살로 몰아버린 소녀와 닮았고 그래서 죽였다는 내용. 편지는 “아기를 낳지 마. 우리처럼 될지도 모르니까”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무전기 ‘나’는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잃었다. 그로부터 2년 후, 그날도 어김없이 술을 마시다가 벽장에서 ‘쏴아아아아’ 하는 무전기 소리를 듣는다. 무전기는 경찰차를 좋아했던 세 살배기 아들 히카루의 장난감 송수신기. 이윽고 무전기에서 ‘아빠’ 하고 부르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무전기에는 건전지가 없다.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남편이 딸을 데리고 도로에서 동반 자살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한 ‘나’. 그 충격으로 3년간 정신병원에 입원한 뒤 약물치료를 병행하며 친정집에서 요양하던 어느 날, “엄마, 살려줘”라는 가냘픈 여자아이의 목소리를 듣는다. 약물 복용의 부작용으로 인한 환청이라면 문제는 없다. 하지만, 만약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누군가 위험에 처한 것이다. 잘 자요, 아이들아 침몰하는 배 위에서 미끄러져 바다에 빠진 ‘나’는 의식을 놓으려는 찰나, 영화관에서 지금까지의 삶의 단편적인 그림인 주마등 필름을 본다. 어렸을 때 놀았던 곳, 아빠와 함께했던 보트 놀이, 엄마와 테니스를 친 날의 석양, 연인과의 첫 키스……. 연인? 연인 따위 없었는데? 그런데 여기는 어디일까. 그리고 내 필름은 어디에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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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하는 존재를 두 번 다시 품에 안을 수 없을 거야”
『엠브리오 기담』 ‘천재’ 호러 작가의 귀환 야마시로 아사코 월드의 문을 여는 첫 번째 작품은 헤밍웨이가 썼다고 전해지는 소설과 동명인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이다. 어느 날 ‘나’는 집에서 사람의 형상을 목격한다. 거실에서 책을 읽거나 밤중에 화장실에 갈 때면 양복 차림에 구두를 신은 남자가 시야 한구석에 들어오는 것이다. 물론 이 형상은 유령이다. 그것이 아내에게도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사건은 이상한 궤도를 그리기 시작한다. 도대체 이 유령은 왜 나타났고 또 누구일까. 불안에 떠는 나와는 반대로 아내는 유령의 출현 시기를 스프레드시트로 목록화하고 꾸준한 관찰과 실험을 통해 ‘턴 오버’라는 기발한 가설을 도출한다. 이 소설은 심령 현상에 대한 과학적 검증이라는 아이러니와 본격 미스터리의 추리를 주축으로 하고 있지만, 제목의 유래와 의미를 깨닫는 순간 독자는 단순한 공포 너머에 자리 한 짙은 상실의 비애를 감지하게 된다. 심령 현상에 시달리는 부부의 ‘영혼 보고서’ 머리를 잃은 닭과 아름다운 소녀의 잔혹 동화 슬럼프에 빠진 소설가에게 찾아온 기묘한 이불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저주에 빠진 세 여자 잡음 사이로 띄엄띄엄 새어 나오는 그리운 목소리…… “모든 죽은 자들이 별처럼 반짝이며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첫 작품부터 맥거핀 효과와 휴먼 드라마로 독자를 완벽하게 사로잡는 야마시로 아사코의 작가적 기량은 이어지는 작품들에서도 계속된다. 실제로 1945년 미국 콜로라도 주에서 머리 없이 18개월간 살았다는 닭 마이크가 등장하는 『머리 없는 닭, 밤을 헤매다』는 한 편의 아름다운 시이자 잔혹 동화로도 읽힌다.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 정처 없이 나아가는 소년과 머리 없는 닭의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이미지는 애절하고 안타까운 감수성과 함께 선연하게 각인된다. 그 밖에도 타임머신이 등장하거나 특정한 하루가 반복되는 유형의 장르인 시간 SF 『곤드레만드레 SF』에서는 술에 취하면 과거와 미래가 뒤섞여 보이는 등 시간이 혼탁해지는 능력을 발휘하는 여자가 등장하고, 실화괴담의 형식을 취한 『이불 속의 우주』, 딸을 살해한 어머니라는 비정한 사건을 기상천외한 스토리로 풀어낸 『아이의 얼굴』, 동일본 대지진으로 부인과 아들을 동시에 잃고 유해마저 찾지 못한 처참한 남자의 심정을 그린 『무전기』 등 미스터리, 괴기, SF, 기담 등 섬뜩한 전개로 나아갈 만한 소재이지만 작가는 절제되고 담담한 문체로 그려낸다.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연상시키는 『잘 자요, 아이들아』에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에 대한 언어적 시청각화를 통해 문장으로 표현 가능한 영상미의 극치를 그려 보인다. 아이들아, 잘 자요 사람들아, 잘 자요 잘 자요, 편안하게 슬픔을 짊어지고 빛으로 향해가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여덟 편의 메시지 표제작인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에서 ‘나’는 남편과 딸의 동반자살을 목도한 충격으로 환청에 시달리며 자살미수와 정신병원 입원과 퇴원을 3년간 되풀이한다. 어머니와 동생이 사는 집에서 재활 치료를 받던 어느 날 나는 강가에서 “살려…… 줘……. 엄마…….”라는 희미한 아이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의식을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만큼 가냘픈 목소리. 소리는 동행한 동생도, 엄마도 듣지 못했고 오직 나에게만 들려온다. 환청일지도 모른다. 딸을 잃게 된 데서 오는 상실감과 죄책감으로 인한. 그러나 나는 산책할 때마다 같은 곳에서 그 목소리를 듣게 되고, 마침내는 목소리의 진상을 확인해보기로 결심한다. 소설은 정상과 비정상,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상황에서 혼란과 고통을 겪다가, 주인공이 용기를 내어 현실로 귀환하는 모습을 그린다. 날마다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 발생하는 재해와 각종 사건사고들은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과 악의, 어리석음 등으로 인해 발생한다. 야마시로 아사코는 세상에 둘도 없이 소중한 것을 상실한 데 따른 슬픔을 어설픈 말로 수습하거나 결말부에 안이한 구원을 마련하는 대신에, 잃어버린 것은 돌아오지 않지만 그것을 애도하는 인간애만은 결코 잃지 않을 거라는 다정한 말을 건넨다. 삶과 죽음, 차안과 피안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사람들을 꾸준히 그려온 작가가 닿은 하나의 도달점이 여기에 있다. 마지막 작품 『아이들아, 잘 자요』에서는 천사가 등장하는 것은,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슬픔을 하나하나 읽어 내린 독자 모두에게도 진심 어린 축복을 기도하는 것이 아닐까. “솔직히 말하면, 오쓰이치 최고의 작품은 아니다. 언제나 그의 작품은 최고이기 때문이다. _요시다 다이스케(문예평론가,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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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시로 아사코는 공포를 중시하는 호러와 괴담을 쓰면서도 결코 이야기를 공포로 가득 채우려 들지 않는다. 공포의 여백을 메우는 것은 애틋하고 아련한 감성이다. 그 감성은 옅지만 한없이 깊고 멀리 퍼져나간다.
- 김은모 (번역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