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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vate barking
개와 걔 유령 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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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그러진 차체. 산산이 부서진 유리창. 나와 가족은 죽은 개를 끌어안고 대전에서 공주로 이동했다. 평일 한낮의 도로는 한산했고 창밖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한적한 풍경이 지나가고 있었다. 죽은 개를 묻으러, 죽은 개를 묻으러, 죽은 개를 묻으러 간다. 개는 무수한 특징을 갖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특징들도 부패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개도 죽음을 생각할까, 나는 생각했다. 개를 날마다 관찰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개는 단 한 번도 죽음을 생각해본 적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개는 사람을 보면 짖었고 음식을 보면 짖었는데 두 경우 모두 반가워서였다. 이런 것들도 개의 특징이 될 수 있을까. 개를 묻으러 가면서 본 특징 없는 풍경들도 개의 특징이 될 수 있을까.
---「private barking」중에서 어째서 모든 이야기는 후일담인가, 어째서 나는 저들을 이미 회상하고 있는가, 현재적 회상이 어떻게 가능한가 생각했지만, 더는 생각을 진전시키지 않았는데, 그것은 내일, 모레, 일주일 뒤, 두 달 뒤, 일 년 뒤, 십 년 뒤, 사십 년 뒤에 다시 그 순간을 회상하리라는 것을, 후일담의 후일담을 기록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뒤에서 빠르게 달려오던 자전거가 우리 중 누군가의 자전거를 들이받았고, 최선을 다해 느리게 달리고 있던, 달린다는 동사를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느린 속도를 유지하고 있던 이가, 그러니까 나의 동료이자 친구인 그가, 그 애가, 세상에서 가장 느린 속도로, 먼지처럼 가볍게 공중에서 떠올랐고, 역시 세상에서 가장 느린 속도로, 마치 정지 상태처럼 보일 정도로 느리게 더 느리게,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었다. 하지만 내 비명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속도가 느려서, 느린 것보다 더 느려서, 내 걸음이 그에게로, 그 애에게로 달려가는 속도가 느리게 더 느리게, 한없이 느려졌고, 나는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고, 꿈을 꾸는 동안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사람처럼, 이상해진다, 이상해져, 생각하는 사이, 시간을 뛰어넘은 사람처럼 그에게, 그 애에게, 걔에게 다가가고 있었고,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짧은 순간, 내가 걔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개와 걔」중에서 그가 사랑했던 개들은 모두 죽었다. 그가 사랑했던 개들이 모두 죽었으므로 그는 개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 종결시켜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대학에 다닐 때 들었던 철학 교양 수업에서 이런 질문을 접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의 형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당신에게는 형이 없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죠? 학생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그는 생각에 잠겼지만 항상 슬리퍼를 신은 맨발로 강의실에 들어서던 강사의 질문을 그 후로도 이십여 년 동안 간혹 떠올릴 때가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유령 개」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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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죽음에 의한, 죽음을 위한 글쓰기
한유주의 신작 연작소설집 『숨』은 흥미로운 텍스트다. 난해성과는 거리가 먼 깊은 서정이 있으며, 무엇보다 글을 읽는 재미가 있다. 세 편의 연작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죽음’과 ‘개’이다. 죽은 개의 삶에는 무슨 의미가 있었는가? 개는 왜 짓는가? 삶의 근원적 허구성과 무의미를 깊이 응시해온 한유주가 이제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친구의 죽음으로부터 개의 죽음에 이르는, 죽음에 관한 두서없는 파편적 기억과 상념들, 그리고 은밀한 자살의 몽상이 뒤얽혀 있는 이 소설은 끊임없이 죽음으로 환원되는 인간 삶의 모든 순간을 하염없이 증언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개의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개는 왜 짓는가? 이 물음은 왜 나는 말하는가, 왜 소설을 쓰는가라는 질문과 겹쳐진다. 그는 마침표와 함께 매 순간 무(無)의 나락 앞에 서는 문장들을 힘겹게 이어간다. 말 그대로, 필사적으로! 어떻게든 의미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차라리, 그냥 죽음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그의 소설 속에서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의 1/n이다. 그래서 그저 숨 쉬는 것에 불과한 글쓰기는 곧 죽음의 과정 자체가 된다. 무의미만의 공간을 건축하는 숨결로서의 언어 문장을 이어간다는 것은 문장과 문장 사이의 관계를 (그것이 아무리 불합리할지라도) 이어간다는 뜻이다. 마치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가듯이. 이때 놀라운 점은, 그 과정에서 개가 ‘짓음’으로써 표현하는 개만의 그 무엇처럼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그 무엇이 나지막하게 스며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본능적 혹은 본성적 감정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중에서도 허탈한 사랑이나 연민의 감정이 우리를 적실 때, 그의 소설은 하나의 역설이 된다. 그래도 어쨌든 살아보고 싶다는 역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