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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공화국에 헌정함
서문 인간들 사이 불평등의 기원과 근거에 관한 논문 서문 1부 2부 루소의 주석 옮긴이 후기 |
Jean-Jacques Rousse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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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인류의 모든 지식 중 가장 유용하면서도 가장 덜 진보된 것이 인간에 관한 지식인 듯싶다. 나는 델포이 신전에 새겨져 있는 글 하나에 모럴리스트들의 두꺼운 책들 전부보다도 더 중요하고 더 어려운 가르침이 나타나 있다고 감히 말하겠다.
--- p.27 내가 말해야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해서이다. 나는 검토 중인 문제를 통해 내가 인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진리를 존중하기를 두려워할 때, 이 문제를 전혀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 문제로 나를 이끈 현인들 앞에서 확신을 갖고 인류의 입장을 옹호할 것이다. --- p.41 순수한 자연 상태와 언어의 필요 사이에 있었을 엄청난 간격을 잠시 뛰어넘어 보기로 하자. 언어가 필요했다고 가정하고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이는 앞의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새로운 난제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말이 필요했더라면, 그들이 말하는 기술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생각할 줄 아는 것이 훨씬 더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 p.66 속박 관계는 인간들의 상호적인 의존관계와 그들을 결합시키는 상호적인 필요성 없이는 형성되지 않는 까닭에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 없이도 지낼 수 있는 상황에 두지 않는 한 그를 복종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각자는 알아야 한다. 자연 상태에서는 이런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각자는 속박에서 자유롭고 강자의 법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 p.87 만약 사람들의 재능이 같아서, 예를 들어 철의 사용과 식료품의 소비가 항상 정확히 균형을 이루었다면 그런 상태의 상황은 동일하게 계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으로도 유지할 수 없었던 균형은 곧 깨져 버렸다. --- p.103 정치적 차별은 필연적으로 시민에 대한 차별을 유발한다. 인민과 통치자 사이에서 불평등이 증가하고 있어 개인들 사이에서도 곧 감지되며 정념과 재능, 상황에 따라 수천 가지 양상으로 바뀐다. 행정관은 부하를 만들지 않고는 부당한 권력을 차지할 수 없으며 그자에게 권력의 일부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p. 124 개별 사실들만으로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실제를 부인하기는 아직 힘들며, 다른 민족들과 어떤 교류도 없어서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모방할 수 없었던 민족들도 마찬가지이다. 걸을 수 있기 전에 숲에 버려져서 짐승들이 키운 아이는 보모처럼 걸으려고 훈련을 하여 그 본보기를 따를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자연에서 전혀 받지 못한 수월성을 습관을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p.141 내가 보기에 그것은 확실하다. 나는 철학자들이 자연인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일체의 정념이 어디에서 태어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자연 자체가 요구하는 유일한 물질적인 필요성 이외에 우리의 모든 욕구는 습관이 되기 전에는 전혀 욕구가 아니었고 습관에 의해 혹은 욕망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 p. 169 인간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행복이 사라지고 과시욕과 상실감, 시기심 등이 태어났다면 불평등의 원인이자 우리에게 더 큰 불행을 야기한 것은 ‘소유’이다. 우월성의 욕구와 소유욕이 결합하면서 그것은 노동의 필요성으로 이어졌고, 더 많은 것을 수확하여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결과물은 예속과 비참함으로 나타났다. --- p.192 |
디종 아카데미, 루소를 깨우다
“인간들 사이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고, 자연법은 불평등을 허용하는가?” 지금 보아도 쉽게 답할 수 없고, 우리 사회, 우리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담고 있는 듯한 이 질문은, 놀랍게도 1753년, 디종 아카데미가 제기한 질문이다. 그리고 이 시대를 넘은 담대한 질문은, 철학자 루소를 깨우기에 충분한 질문이었다. 루소는 디종 아카데미가 그처럼 담대한 질문을 제기한 이상, 자신 역시도 그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여겼다. 루소와 같은 철학자에게 그것은 일종의 의무와도 같은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숲속에서의 산책에서 루소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성찰을 떠올려 냈다. 그는 그에 대한 논문, 「인간들 사이 불평등의 기원과 근거에 관한 논문」을 제출했지만, 과거 일등상을 수상했던 『학문 예술론』과는 달리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후에 이 논문에 서문과 헌정사를 붙여 출판해 내니,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었다. 루소는 이 책에서 어떻게 불평등을 벗어날 것인가를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소의 성찰이 미완성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루소에게 있어 상당히 불공정한 평가일 것이다. 애초에 디종 아카데미가 제기한 질문 자체가 불평등의 해소법은 묻지 않았던 것이다. 루소는 인간들 사이 불평등의 기원을 나름대로 성찰하였고, 자연법이 불평등을 허용하는가에 대해서도 나름의 견해를 내놓았다. 그 견해가 우리 시대에 비추어 마땅한지 그렇지 않은지, 또 아직도 남아 있는 인간들 사이 불평등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우리가 답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왜 불평등하게 살아가는지, 보다 엄밀히 말해 “인간들 사이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인지 루소가 내놓은 성찰에 대해서 잠시 탐색해 보자. 우리는 왜 불평등하게 살아가는가? 루소는 인간들 사이에는 두 가지 종류의 불평등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자연적 불평등과 정치적 불평등이다. 자연적 불평등이야 설명할 것조차 없다. 우리는 모두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라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지만, 최근의 과학은 공부도 재능(DNA)이고, 심지어 노력조차 일정 정도는 재능(DNA)이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과연 우리는 진정 “평등하게 태어났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루소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자연적 불평등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더욱이 정치적 불평등과 자연적 불평등의 관계에 대해서도 루소는 침묵을 택한다. 즉 루소는 인간들 사이 불평등의 기원을 논하며, 자연적 불평등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정치적 불평등만을 논한 것이다. 그렇다면 루소는 왜 그렇게 했을까? 그는 자연적 불평등이 아니라, 정치적 불평등이 현재 존재하는 인간들 사이 불평등의 기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루소가 볼 때,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던 인간들에게 있어, 자연적 불평등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은 오로지 모든 것을 자신에 비추어 바라봤기 때문에, 남이 힘이 세건, 아니건 그러한 여타의 사실은 그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즉 자연적 불평등은 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했다. 그런데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면서 상황은 변하게 됐다. 인간이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기 시작한 것이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게 된 인간에게는 질투와 소유욕이 등장했다. 그리고 남보다 더 낫고 싶다는 이 감정은 인간들 사이에 불평등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이때부터 인간들 사이 불평등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두 번째 질문을 보자. “자연법은 불평등을 허용하는가?” 자연법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루소는 이미 이에 대해 답한 바 있다. 자연에는 분명 불평등이 있다. 그러나 자연법이 불평등을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들 사이 (자연적) 불평등을 드러나게 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와 ‘타인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루소에 따르면 이러한 근거로 인해 “불평등은 자연 상태에서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루소에게 다시 불평등을 묻다 인간의 근원적 모습을 고찰하려고 했던 루소의 시도는 현대에는 조금 틀린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인류학적·역사학적 연구는 과거의 인류가 루소적 인간보다는 홉스적 인간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류의 발생 과정이나 진화 과정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루소를 찾은 것이다. 그러므로 디종 아카데미의 질문에 대한 루소의 답을 정리해 보자. 루소에 따르면, 자연적(신체적) 불평등은 존재하나, 자연 상태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자연 상태를 벗어나 사회를 만들면서 비로소 정치적 불평등이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 자연적 불평등은 존재하나 우리가 사회 속에서 그것으로 사람들 사이를 가르기 전에는 불평등이 아니다. 정치적 불평등은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가 창조한 불평등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이 불평등의 기원은 자연이 아니라 사회이며, 자연법이 아니라 사회가 그것을 허용해 온 것이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들 사이 불평등은 “인간의 본원적인 상태가 결코 아니며, 이처럼 우리의 모든 자연적인 성향을 변하게 하고 변질시키는 것은 오직 사회의 정신과 그것이 낳은 불평등”이다. 그런데, 이 말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이 말을 좀 더 간략하게 설명해 보자. 이미 앞에서도 나온 바 있듯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루소는 본원적인 상태인 자연으로 돌아가자고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말을 그렇게만 해석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앞에서도 말했듯, 루소는 이러한 질문에 답해 주지 않으며, 이러한 질문은 우리가 답해야 할 문제다. 그러나 기왕 루소의 지혜를 빌리고자 했으니, 그의 말을 이렇게 정리해 보자. 자연적이건 정치적이건 ‘불평등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가 만든 것이지 인간의 본원적 상태가 아니므로, ‘당위가 아니다.’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해 보자. 그러면 이런 결론이 나올 것이다. 평등은 존재가 아니라 당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