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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7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350쪽 | 396g | 148*210*30mm
ISBN13 9788932023151
ISBN10 8932023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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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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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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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모른다는 고립감. 그리고 그걸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한다는 갑갑함이 밀려왔다. 수면 위로 아른아른 조용하게 빛나는 여름 햇빛이 보였다. 손 내밀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유혹하듯 화사하게 출렁이던 차안(此岸)의 얇고 환한 막. 나는 그 빛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손에 걸리는 거라곤 쥐자마자 이내 부서지는 몇 움큼의 강물이 전부였다. 생전 처음 겪는 공포가 밀려왔다. 아득하고 설명이 안 되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그때 누가 내 손을 잡는 게 느껴졌다. 순간 있는 힘을 다해 그 팔을 잡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 중에서---p.41)

A구역은 세상만사를 삼킨 심연처럼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채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곳은 한없이 깊고 어두워 보였다. 방 안으로 검은 나방 한 마리가 후드득 들어왔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형광등 주위로 나방이 어지럽게 푸드득 날아다녔다.
('벌레들' 중에서---p.75)

나무는 대낮에도 검은 실루엣을 드리우며 서 있었다. 이국의 신처럼 여러 개의 팔을 뻗은 채, 두 눈을 감고 ─ 그것은 동쪽으로 누웠다 서쪽으로 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포식자를 피하는 물고기 떼처럼 쏴아아 움직였다. 천 개의 잎사귀는 천 개의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천 개의 방향은 한 개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살아남는 것. 나무답게 번식하고 나무답게 죽는 것. 어떻게 죽는 것이 나무다운 삶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게 종(種) 내부에 오랫동안 새겨져왔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고목은 장마 내 몸을 틀었다. 끌려가는 건지 버티려는 건지 모를 몸짓이었다. 뿌리가 있는 것은 의당 그래야 한다는 듯, 순응과 저항 사이의 미묘한 춤을 췄다.
('물속 골리앗' 중에서---pp.85~86)

“워 더 쭈어웨이 짜이날?”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
테이프가 철커덕 소리를 내며 저절로 뒷면으로 넘어간다. 짧은 사이. 명화의 목소리가 들린다.
“리 쩌리 위안 마( 里)?”
“여기서 멉니까?”
용대는 조그맣게 “리 쩌리 위안 마?”라고 중얼거린 뒤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겨울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약속처럼, 나뭇가지에 끝끝내 매달려 있는 은행 몇 알이 방금 막 지나간 택시를 굽어보며, 떨어지지도 썩지도 못한 채 몸을 떨고 있다.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중에서---p.168)

현대의 복잡하고 거대한 시스템이 정적(靜的)으로 평화롭게 돌아갈 때, 그 무탈함이 주는 이상한 압도, 안심, 혹은 아름다움 같은 것이 공항에는 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길게 뻗은 고속철도나 우아한 현수교, 송전탑에서도 느꼈다. 시커먼 타이어 자국이 밴 활주로 사이로 휘이? 시원한 가을바람이 지나갔다. 정차된 항공기들은 모두 앞바퀴에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그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 불어와 어떤 세계로 건너갈지 모르는 바람이었다. 몇몇 항공기는 탑승동 그늘에 얌전히 머리를 디민 채 졸거나 사색 중이었다. 관제탑 너머론 이제 막 지상에서 발을 떼 비상하고 있는 녀석도 있었다. 딴에는 혼신의 힘을 다해 중력을 극복하는 중일 테지만 겉으로는 침착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얼마 뒤 녀석이 지나간 자리에 안도의 긴 한숨 자국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비행운이라 부르는 구름이었다.
('하루의 축' 중에서---p.176)

몇백 원 더 비싸지만 부드러운 국산콩 두부를 먹고, 호기심에 일반 생리대보다 두 배는 비싼 유기농 소재의 패드를 써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좀 죄책감이 들었다. 생필품을 절약하지 않으면 돈 모으기가 힘든데. 씀씀이가 커 눈만 높아진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변기에 앉아 화장지를 끊을 때마다, 부드러운 두부 조직이 식도를 건드릴 때마다 전에 없던 설렘과 만족이 찾아왔다. 그리고 만약 그런‘기분’도 구매할 수 있는 거라면 그걸‘계속하고’싶다고 생각했다.
('큐티클' 중에서---p.212)

“너 나 만나서 불행했니?”
그러곤 곧장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저쪽에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초조해진 서윤이 황급히 변명하려는 찰나 경민이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
“그런 거 아니었어.”
“……”
“힘든 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기다리는 게 지겨운 거였어.”
('호텔 니약 따' 중에서---pp.276~277)

저는 지난 10년간 여섯 번의 이사를 하고, 열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십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언니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니까 제가 겪은 모든 일을 거쳐갔겠죠? 어떤 건 극복도 했을까요? 때로는 추억이 되는 것도 있을까요?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서른' 중에서---pp.293~294)

무언가 나를 지나갔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당신도 보았느냐고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이미 그곳에 없다.

무언가 나를 지나갔는데 그게 뭔지 몰라서
이름을 짓는다.
여러 개의 문장을 길게 이어서
누구도 한 번에 부를 수 없는 이름을.
기어코 다 부르고 난 뒤에도 여전히 알 수 없어
한 번 더 불러보게 만드는 그런 이름을.

나는 그게 소설의 구실 중 하나였으면 좋겠다.

"서른"의 한 장면은 내 가족, Y의 일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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