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며 노래하며 공부하며 사랑하며
오늘도 '과-로'하는 슬릭과 이랑의 산뜻한 연결
힙합 신에서 혐오 대신 사랑을 노래해온 슬릭, 장르를 넘나들며 쉴새없이 이야기를 만드는 이랑. 각자의 영역에서 활발하게 일하고 있는 두 여성 아티스트가 코로나 시대에 편지를 주고받았다. 우리 시대 빛나는 작가들의 왕복서간을 엮는 문학동네 서간에세이 시리즈 ‘총총’ 중 한 권이다.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살던 두 사람은 유례없는 감염병의 시대를 맞아 깜깜한 앞날에 대한 불안을, 이 와중에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마음속 생각들을 내밀히 공유해보기로 한다. 두 사람은 언뜻 보기에 닮은 점이 많다. 활동명이 두 글자이고, 한국에서 음악하는 30대 여성 아티스트이자, 페미니스트이자, 고양이 동거인이다. 그러나 막상 서로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이랑에게 슬릭은 ‘Mnet 리얼리티 예능 〈굿걸〉에 나온 래퍼’였고, 슬릭에게 이랑은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경매에 부친 아티스트’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지의 세계’인 슬릭과 이랑은 편지를 통해 더 가까이 만나보기로 한다.
하루에도 여러 사건들이 동시에 일어나고, 창작자들에게 ‘빨리 네 입장을 말하라’고 압박하는 이상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가장 안전한 청자가 되어준다.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주고받는 편지에서 페미니즘, 비거니즘, 기후위기, 동물권, 질병권, 임신·출산 자기결정권, 문신, 젠더 이슈 등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뜨겁게 논의되는 문제들에 대한 두 사람의 경험담과 솔직한 생각이 오간다. 생각의 속도가 언제나 일치하진 않지만 그들의 편지는 닮음을 인정하는 만큼 다름 또한 인정하며 서로의 시선에서 보려 노력하는 대화의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대화의 끝은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더 알고 싶다는 것, 사랑하는 마음으로 더 오래 기억하고 싶다는 것,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화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
소설이나 수필을 쓸 때와 달리 편지에선 자꾸 괄호를 쓰게 되더군요. ‘괄호가 너무 많은데…… 괜찮은가?’ 고민하던 중, 슬릭도 똑같은 고민을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왜 편지에 괄호를 자주 쓰게 되는지 아직 우리 둘 다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괄호가 많은 편지를 주고받기로 했습니다. _이랑 (8쪽)
행사장에서 몇 번 마주친 게 전부였던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던 도중 재미있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편지글에 괄호가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괄호 속에는 부연의 말이 들어 있기도 했고, 해명의 말이 담겨 있기도 했고, 상대가 알아줬으면 하는 본심이 드러나기도 했다. A를 이야기하다가도 B에서 C까지 전부 들려주고 싶은 마음을 겨우 가다듬어 괄호 속에 꾹꾹 눌러 담았는지도 모른다. 또, ‘괄호’란 단어를 소리 내어 발음하면 ‘과로’가 된다. 두 사람은 앞날에 대한 초조함으로 일을 무리하게 많이 받거나, 혹은 일을 마구 벌이기도 하며 달력에 가득 채워진 색색깔의 마감들을 소화해내느라 자주 과로한다는 점도 꼭 닮아 있었다. 글에서는 괄호를 많이 쓰고 현실에서는 과로를 자주 한다는, 소소하지만 중요한 공통점을 발견하면서 ‘괄호가 많은 편지’들이 본격적으로 오고간다.
비거니즘 전도사 슬릭, 생활 예술인 이랑의 하루하루가 담긴 편지
불안과 혐오의 시대에 여성 창작자로 산다는 것
슬릭과 이랑의 첫 인연은 2017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이랑이 ‘트로피 경매’ 퍼포먼스를 선보인 날이다. 이랑은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포크노래상을 수상하여 무대에 올랐으나 상금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트로피를 곧바로 경매에 부쳤고, 슬릭은 바로 그 자리에 관중으로 앉아 있었다. 수상 후보에 본인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은근히 잘 보이고 싶기도 했던 그날의 슬릭에게 이랑의 트로피 경매 퍼포먼스는 큰 충격을 주었다. 시상식에 가기 전 이랑의 속마음은 어땠는지, 이랑의 퍼포먼스를 실제로 본 슬릭은 무대 아래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날의 기억을 회상하며 두 사람의 편지는 시작된다.
서로 어떤 호칭으로 부르면 좋을지 고민하며 다소 어색하게 시작한 편지는 함께 사는 고양이의 가출 사건, 작업실의 풍경, 좋은 노래에 대한 정의, 감명깊게 본 다큐멘터리, 먼저 떠나보낸 사랑하는 친구 등 그날그날의 크고 작은 주제를 두고 이야기하다가 그동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아픔을 고백하기까지 차츰 더 깊어진다. 특히 그들은 동시대에 여성으로 살아가며 느끼는 불안과 고민에 대해 구체적인 경험과 언어로 이야기한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 새벽, 슬릭에게 편지를 쓰다 이랑은 지금껏 한 번도 공개적으로 말해본 적 없던 임신중지 경험에 대해 털어놓는다.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성이라면 한 번쯤은, 혹은 수시로 느껴봤을 임신 공포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백한 이랑의 편지는 ‘대한민국 출산지도’에 분노했던 슬릭이 만든 노래 〈내 꺼야〉 가사 인용으로 이어지면서, 두 사람이 여성 창작자로서 같은 번지수의 감정을 느끼며 더 깊이 더 가까이 만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는 여전히 임신 공포에 시달립니다. ‘#낙태죄폐지’ 해시태그를 검색해 사람들의 글을 읽다보니 성관계를 하지 않은 달에도 생리가 늦어지면 ‘시발 임신했나’ 하는 건 저 혼자가 아닌 것 같더군요. 언젠가 찾아올지 모를 두번째 수술의 통증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배가 아픕니다. _이랑 (58쪽)
페미니즘을 노래하는 것에 중압감을 느끼지 않느냐는 걱정이 담긴 질문을 자주 받는데, 그럴 때마다 제가 하는 말은 하나거든요. 저는 그저 제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풀어낼 뿐인데 그것이 페미니즘으로 불릴 뿐이라고요. _슬릭 (68쪽)
“지금까지 국힙 원탑 슬릭이었습니다.”
“살아서, 편지를 쓰고, 만나서 전해주기로 합시다.”
무대에 서는 것은 물론,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는 것도 어려워진 시대에 주고받는 편지는 더 애틋하다. 무한 거리두기 시대에 창작자로서 느끼는 불안과 우울 또한 편지에 그대로 드러난다. 다들 어떤 마음으로 무얼 하며 이 시기를 보내고 있을까. 코로나로 콘서트와 행사가 줄줄이 취소되고 시간이 많아진 슬릭은 공책을 펴서 이것저것 필사를 했다. 공연은커녕 온라인 라이브 제안도 전혀 받지 못한 이랑은 옷을 훌렁 벗고 몸에다 그림을 잔뜩 그렸다. 불안의 시간을 각자 어떻게 견뎌내고 있는지 성실히 기록한 그들의 편지는 세상에 혼자 고립된 듯한 불안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다.
동료 뮤지션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스승과 제자로, 또 한번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예고하며 ‘괄호가 많은 편지’는 열린 결말로 끝을 맺는다. 그들의 편지에 괄호가 자꾸 등장하는 건, 이제 막 우정이 시작되려 하는 사이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끝이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이 얘기도 저 얘기도 마음껏 하고 싶은 간질간질한 마음. 이 책에는 언젠가 꼭 맺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정의 산뜻한 시작이 담겨 있다.
이 복잡하고 서러운 서울 하늘 아래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도 투명하고 촘촘한 이야기를 나눌 상대를 만난다는 것은 영화 같은 일입니다. 이 멋진 연결을 지켜봐주세요. _슬릭 (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