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정의했다. 도핑 역시 마찬가지이다. 100여 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인체의 능력을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권장의 대상에서, 국제 대회에서 정치 체제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선전 도구로, 이어서 선수 개인의 건강을 해치고 스포츠의 공정성을 저해하는 축출의 대상으로 성격이 바뀌어 왔다. 선수들이 어떻게 약물을 복용했는지, 스포츠 단체들이 어떤 방식으로 약물 검사를 시행했는지,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도핑과 반도핑 진영은 어떤 방향으로 움직였는지 살펴보는 것은 단순히 도핑의 역사만 되짚는 일이 아니다.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스포츠계가 어떻게 흘러나갈지를 예측하고 미리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도핑에 대한 논의에는 각 시대의 의학, 과학, 문화, 윤리 등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변화상을 읽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 p.9~10, 「프롤로그」 중에서
코카인과 관련된 긍정적인 일화와 초창기 연구 결과는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특히 생리적으로 코카인이 운동 능력에 영향을 끼칠 만큼 대사 작용을 활성화시킨다는 근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써 보니까 좋던데”라는 식의 ‘카더라 통신’이 선수들 사이에서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코카인이 유발한 고양된 기분과 명료해진 사고 때문일 수 있다. 연습할 때 기술 습득이 용이해지고, 경기에 임할 때도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보면 실제 경기력이 향상된 것이 아닌데도 좋아진 것으로 잘못 느끼게 된다.
--- p.21, 「마약은 경기력을 향상시킬까?」 중에서
미국의 릭 데몬트는 에페드린 도핑으로 유명해진 선수 중 하나이다. 1972년 독일 뮌헨 올림픽에 16세의 나이로 출전한 그는 남자 자유형 400미터 경기에서 4분 0초 26을 기록하며 우승을 거뒀다. 하지만 소변 검사에서 에페드린이 검출되면서 사흘 뒤 금메달을 박탈당했다. 데몬트는 매우 억울했다. 어릴 적부터 천식이 있던 그는 천명(wheezing) 증상 때문에 400미터 경기 당일 아침 일찍 마락스라는 천식 약을 세 알 복용하고 팀 닥터에게 이를 밝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팀 닥터가 도핑 검사관에게 이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 p.54, 「감기약과 맞바꾼 금메달」 중에서
동독 정부가 선수들에게 몰래 투여한 AAS는 근육을 키우고 힘을 늘리는 데 효과적이었지만,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단백동화뿐만 아니라 남성화 효과도 같이 일어난 것이다. 여자 선수들의 목소리가 남자처럼 굵어지고, 온 몸이 털과 여드름으로 뒤덮였다. 동독의 의료진과 체육 관계자는 남성화 부작용을 인식했지만, 도핑으로 거둘 수 있는 성과가 컸기에 부작용을 외면하거나 무시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사람들이 동독 여자 선수들의 굵은 목소리를 지적하자 코치는 짧게 받아쳤다. “우리는 노래가 아니라 수영을 하러 왔습니다.”
--- p.100, 「스포츠 역사를 바꾼 냉전의 산물」 중에서
벤 존슨이 스테로이드를 시작한 것은 1981년이었다. 당시 그의 코치 찰리 프랜시스는 오래전부터 동독의 선수 지원이나 운영 방법에 경도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지도하는 선수들의 기량을 끌어올리기 위해 최신 훈련법, 마사지, 물리치료와 함께 약물도 은밀히 도입했다. 1981년 그는 성인이 된 존슨에게 스테로이드 사용을 권유했다. 비록 약물로 얻을 수 있는 이점이 경기력의 1퍼센트라 하더라도 엘리트 선수 수준에서는 이처럼 미세한 기량의 차이가 승부를 결정짓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스테로이드가 육상계에 만연한 것과 누가 어떻게 실력이 향상되는지를 알고 있던 존슨은 며칠 뒤 덤덤하게 약물 복용을 시작했다.
--- p.108, 「울룩불룩 근육 만들기의 뒤안길」 중에서
갑작스런 체형의 변화와 기존 상식을 뛰어넘는 기량에 본즈가 AAS 같은 일련의 약물을 복용했을 것이라는 의심이 넘쳐났다. 하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당시 미국 프로야구는 반도핑의 움직임이 점점 거세지던 국제적인 분위기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1991년 AAS가 금지 약물 목록에 추가되었지만 2004년까지 실질적으로 검사가 이뤄진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만약 도핑 검사가 시행되었더라도 본즈는 적발되지 않고 오히려 깨끗하다는 면죄부를 받아 더 의기양양해졌을 수 있다. 그가 복용했던 약물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종류의 AAS였기 때문이다.
--- p.125, 「도망가는 선수, 뒤쫓는 검사관」 중에서
골수에서 적혈구 생산을 증가시키는 EPO는 출시 직후부터 운동 생리학 연구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앞서 소개했던 지구력을 향상시키는 수혈의 효과를 처음 규명한 스웨덴의 비에른 에크블롬 교수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15명의 남성에게 EPO를 주입하면서 이들의 최대산소섭취량을 살펴봤다. 몇 주 뒤 이들의 최대산소섭취량은 약 10퍼센트 상승했다. 그는 1990년 한 인터뷰에서 참가자들에게 나타난 운동 능력의 변화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건 마치 100미터 달리기 경주에 참가할 때 10미터 앞에서 출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 p.192~193, 「신세계와 심장마비 사이를 달리다」 중에서
까만 상어 같은 수영복을 입은 선수들의 등장은 다른 종목보다 비교적 규칙이 단순한 수영 경기에도 최신 과학기술이 파고들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일각에는 첨단 수영복이 스포츠의 윤리성과 진실성, 순수성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한 염려도 존재했다. 2000년 4월 미국의 브렌트 러셀 교수는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에 보낸 문서에서 우려를 이렇게 표명했다. “과거에는 선수의 기량만이 경기를 결정지었지만, 이제는 기량과 도구가 좌지우지할 수 있다. (…) 연습을 많이 한 가장 뛰어난 선수가 아니라 경기력을 최고로 향상시키는 수영복을 입은 선수에게 금메달이 돌아갈지도 모른다.”
--- p.215~216, 수영복은 복장일까, 도구일까?」 중에서
“만약 마이크 타이슨이 치마를 입고 해머던지기 여자 경기에 참가하기를 원한다면, 괜찮나요?” 2014년 미국 위스콘신대학교에서 열린 생명윤리 토론회에서 한 참석자가 질문했다. 활발한 의견 교환을 위해 던진 장난스러운 질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성전환, 특히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을 바꾼 선수에 대해 품을 수 있는 흔한 궁금증을 담고 있는 질문이기도 했다. 한때 남자였던 티파니 아브레유, 조안나 하퍼, 크리스틴 월리가 남성 호르몬을 낮추고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고 여자 경기에 아무런 제약 없이 참가해도 되는 것일까?
--- p.308, 「트랜스젠더 선수, 경기장에 등장하다」 중에서
스포츠는 본질적으로 그룹 아바(ABBA)의 노래 제목처럼 승자독식(The winner takes it all)의 세계이다. 체흐 라슬로라는 이름의 선수를 들어본 적 있는가? 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수영 세 개 종목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선수이다. 해당 종목에서 1위를 차지한 선수와의 기록 차이는 불과 0.6퍼센트, 1.7퍼센트, 1.0퍼센트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이클 펠프스는 알아도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당시 라슬로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빨리 헤엄친 선수였는데도 말이다. 이처럼 기량이 종이 한 장 차이인 정상급 선수들은 도핑의 유혹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약물이나 도구의 도움으로 성적에 작은 차이만 만들 수 있어도 돌아오는 결과는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 p.313, 「그리고 스포츠는 계속된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