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노래는 말보다 힘이 세다. 노래의 빈틈, 다시 말해 여백이 많으면 더 그렇게 느껴진다. 내 노래에도 여백이 많다. 때때로 나는 여백이야말로 이해의 통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백을 여백으로 남겨 둘 수 있는 대화는 빈틈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믿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침묵도 대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말하는 것보다 노래하는 것을 좋아합니다」중에서
나에게 공연이란 무엇인가. 공연을 하면 돈을 번다, 내 노래를 좋아하는(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공연을 하면 노래를 부를 수 있다, 무대에서, 사람들이 바라보는 곳에서 노래하며 괜찮은 사람이라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공연을 좋아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좋아하는 것인가. 무대에서의 기분을 상상해 보면 알 수 있으려나. 무대 위의 나에게는 떨림과 긴장이 있고, 망치면 안 된다는 마음이 있다. 함께 연주하는 이들이 있다면, 특히 밴드 구성이라면 내가 실수해서 망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자꾸 엄습한다. 다시, 혼자 만드는 무대를 생각해 보자. 내 노래에는 여백이 많다. 가사가 적은 편이고 한 음의 길이가 길다. 쉼표도 길다. 음과 음 사이의 간격은 긴장을 주기도 하고 쉼을 주기도 한다. 그래. 나는 그 긴장을 즐긴다. 숨을 깊이, 끝까지 들이마시고 잠깐 멈추는 순간 같은 긴장. 그리고 다시 목소리를 내면 천천히 숨을 내쉬며 그 속도에 따라 이완되는 몸. 그런 순간 내가 그 공간을, 시간을 장악한다고 느낀다. 그 ‘장악’이라는 행위를 좋아하는 것 같다.
---「공연할 수 없지만 공연하고 싶군요」중에서
그래서 다작을 다짐했다. 지난 음악활동을 돌이켜보면 내가 먼저 움직이고 일을 벌여야 다른 일이 생겨났던 것 같다. 내가 조용하면 나를 찾는 사람도 공연을 섭외하는 사람도 사라졌다. 널리 알려진 히트곡이나 유명세를 얻겠다는 기대 때문이 아니라, 다만 지금 정도의 음악적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새 노래를 발표하는 활동이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행동이다. 신곡 발표와 공연을 꾸준히 해야 매일 수없이 나오는 싱글과 앨범들, 이미 존재하는 멋진 음악가들, 새로 나타나는 멋진 음악가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아니 더불어 살아남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작을 해야 해」중에서
음악가로 산다는 것은, 그중에서도 스스로 음반을 제작하는 독립음악가로 산다는 것은 음악적인 일 외에도 그 제작과 유통, 홍보에 관계된 모든 일을 함께해야 함을 뜻한다. ‘고생스럽고 버거워도 나 아니면 누가 해 주나’ ‘내가 나를 끌고 가야 해’ 하며 한 해 한 해 지나왔지만 최근에는 모든 걸 다 잘, 완벽하게 해 내려는 마음을 조금 내려놓았다. 이 일을 더 오래 하려면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싶은 만큼만 하는 마음의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것 같다. 그러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하루가 갑니다」중에서
느긋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다가도 무대에 오르기 직전이면 심장이 마구 뛴다. 심장 콩닥 증상에 시달리길 어언 16년. 멀쩡하다가 꼭 공연 시작 직전에 이런다며 원망하던 때가 있었고, 심장의 쿵쾅댐을 가라앉히려고 ‘네가 최고야’를 수없이 되뇌던 때가 있었다. 그 시기를 거쳐 이제는 ‘음, 심장이 뛰는구나’ 인식한 뒤 오른 손가락을 가볍게 왼 손목에 올리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맥박을 잰다.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셈하는 박자에 맞춰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쉰다. 그러면 자연스레 맥박이 늦춰지-지는 않고, 그대로다. 그냥 그렇게 노래하러 올라간다. 하하.
---「이렇게 하루가 갑니다」중에서
이른 퇴근길이 시작된 무렵이었던가. 아파트 진입로와 넓은 도로에 차가 아주 많았다. 사람도 많았다. 지하철에서부터 끼고 있던 이어폰을 빼지 않고 노래를 이어 들었다. 몇 곡을 거쳐 그즈음 발매한 내 노래 ‘숨’이 흘러나올 때 깨달았다. ‘나는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만들고 있었구나.’ 너무 당연한 사실을 늦게 알아차린 걸까. 꽉 찬 소리들 사이에, 사이를 만드는 노래. 숨 쉴 틈을 주는 노래. 귀를 쉬게 하는 노래. 자신이 듣고 싶은 음악을 만드는 음악가라서, 그 사실을 알아차려서 기뻤다.
---「음악이 듣고 싶을 때」중에서
남겨 둔 말, 되삼킨 말들은 노래가 된다. 모든 노래가 그렇게 남겨 둔 말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남겨 둔 말은 언젠가 노래가 된다. 그렇기에 때로는 나만이 알아듣는 이야기를 넣은 노랫말이 탄생한다. 물론 그 노래는 듣는 이에게로 가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담을 것이다. 글을 쓰며 깨달았다. 내가 삶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안전하다는 기분, ‘안전감’이다. 그리하여 이렇게 노래를 만들고 부르며 살고 있다는 것도. 이어서 누군가 해 준 말이 떠오른다. “네 노래는 말없이 곁에 있어 주는 친구 같다”라고.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는 대신 노래로 만들어서 그런가.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있다면 많을까. 나와 닮은 생각으로 안전감을 원하고 그만큼 조심스럽게 지내는 이들이 있다면, 내 노래가 안전한 친구가 되어 줬으면 좋겠다.
---「남겨 둔 말, 되삼킨 말, 노래가 되는 말」중에서
나는 무릎을 쳤다. ‘그래 이거지. 노래란 이런 거지. 내가 어떤 상황에서 이 노래를 썼든 노래는 듣는 사람에게로 가서 그의 노래가 되는 거지. 내가 만든 의미 그대로 잡아 두려고 할 필요도 없고, 잡으려고 한 의미보다 더 넓어지는 것, 그게 노래지.’ 제목을 정하지 못한 새 노래를 들으면서 어떤 이는 강아지를 떠올리고, 어떤 이는 귀갓길을 생각했으며, 어떤 이는 먼저 발표한 나의 노래 ‘다녀왔습니다’의 대답 같은 노래라고도 했고, 어떤 이는 산고를 겪으며 몹시 고통스러웠을 때 말없이 등을 쓸어 주던 손길을 떠올렸다.
---「제목을 정했다」중에서
돌아보니 내 노래가 모두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온전히 나로부터 비롯된 노래가 있다는 것은 환상이었다. 나는 ‘전달하는 사람’이겠다. 세상의 좋고 싫은 것들을, 그 둘로 쉽게 나눌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하며 나를 통과한 생각과 감정이 노래로 나온다. 노래는 내가 기대하지 않는 순간에 나에게 온다. 노래가 나를 부른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다시, 노래는 그 말 자체로 ‘부르는’ 것이다. calling. 그리하여 노래는 ‘불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노래는 불러내고 싶은 것들의 통로이고, 나는 그 노래의 통로이다.
---「노래가 나를 부르고 나는 노래를 부르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