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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비서들

도둑비서들

: 상위 1%의 눈먼 돈 좀 털어먹은 멋진 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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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11월 18일
쪽수, 무게, 크기 368쪽 | 392g | 127*188*30mm
ISBN13 9791187292371
ISBN10 1187292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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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행 비행기, 제일 빨리 뜨는 거로 잡아줘. 내 좌석 다 비워놓으라 하고.”
로버트는 무엇을 요청하든 늘 이런 식으로, 마치 동네 식당에서 햄 샌드위치를 주문하듯이, 아니 그의 취향을 고려한다면 양지머리찜 샌드위치를 주문하듯이 대수롭잖게 말했다.
“여객기 타고 가시겠다고요?”
내가 물었다.
“말도 마. 내 보잉기가 퍼졌는데 오늘 오후에 쓸 수 있는 비행기가 하나도 없다잖아. 그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리야? 한 대도 없다니. 왕년엔 내가 이 동네에서 먹어줬는데. 안 그래?”
이때껏 6년 동안 로버트를 보좌하면서 그가 여객기를 타는 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슬쩍 시계를 봤다. LA 회의에 시간 맞춰 도착하려면 아무리 늦어도 2시간 안에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리고 무료로 달라고 해.” --- p.10

“총금액은 1만 9,147달러입니다.”
하마터면 ‘헉’ 소리가 나올 뻔했다. 차라리 전용기를 타고 다니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비싼 가격이었다.
“맴(ma’am)? 우리 쪽에서 너무 촉박하게 부탁했고, 또 우리 대표님이 요구하시는 게 일반적인 게 아니다 보니까 항공사 측에 굉장히 수고스러운 일이라는 건 잘 아는데요, 그래도 혹시 무상으로 제공해주시는 게 가능할까요?”
묵묵부답.
“여보세요?”
역시 묵묵부답. 이윽고 ‘크큭’ 하는 웃음소리, 이어서 ‘크흡’ 하고 가래를 정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답이 돌아왔다.
“무상은 무슨 지랄하고 무상이에요?”
“예?”
“아니 그 인간, 자기가 뭐나 된 줄 아나 봐요?” --- p.12

나는 구글챗을 로그아웃하고 파촐리 빌리가 안전거리로 떨어진 것을 확인한 후, 은제 종이칼로 봉투를 열었다. 과연! 그 안에는 내 이름과 1만 9,147달러가 적힌 빳빳한 초록색 수표가 들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 신용카드로 결제했으니까. 하지만 나중에 결제가 취소됐다. 그런데 벌써 환급 신청이 처리돼서 수표가 나온 것이다.
난 그 숫자들의 아름다운 자태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만 구천백사십칠 달러. 내겐 굉장히 큰 돈이었다. 내가 한 10년 동안 고생고생하며 상환했지만 아직도 다 못 갚은 학자금 대출 잔액과 거의 맞아떨어지는 금액이었다. (주는 것도 없이 받아먹기만 한 뉴욕대, 고오맙다!)
나는 수표를 반으로 접고 또 반으로 접어서 내 가방 속 블랙홀 같은 어둠 깊숙이 찔러 넣었다.
--- p.17

에밀리는 길게 늘어뜨린 금발을 포니테일로 묶더니, 거짓말 안 보태고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했다. 여전히 눈부신 미모이긴 했지만, (하긴 뭔 짓을 하든 안 그러겠냐) 방금까지 부잣집 따님 행세하던 애는 온데간데없고 어디서 괄괄한 깡패가 하나 와서 서 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자고. 내가 회사에 안 찌를 테니까 자기는 발로의 지출내역서를 잘 써서 내 학자금을 갚아주는 거야. 그럼 공평하잖아.”
“미쳤어요?” --- p.31

에밀리 존슨, 이 똥물에 튀겨먹을 년. 그동안 나는 에밀리가 겉으로만 똑똑한 척하지, 설마 진짜로 똑똑할 줄은 몰랐다. 그녀를 그냥 쓸데없이 교육만 비싸게 받은 골 빈 금발 미녀 중 하나로 치부했다. 그런데 이젠 눈앞이 캄캄했다. 에밀리는 내 머리 꼭대기에 앉을 만큼 영리했다.
얼마나 걸릴진 모르겠지만 오늘부터 내 계획은 이랬다. 로버트의 현금지출 영수증을 복사해서(순도 100% 부정행위) 가짜 영수증으로 환급을 받은 후(죄다 새빨간 거짓말) 환급금 수표를 현금화해(돌아올 수 없는 다리 건너기) 에밀리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얘가 나한테 말이나마 고맙다고 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 p.37~38

에밀리와 내가 한편이 된 후로 로버트의 지출내역서를 제출하는 일에 새로운 의미가 생겼다. 무슨 말인가 하면, 로버트가 회삿돈으로 500달러짜리 저녁을 먹을 때마다, 공연장 정중앙 좌석 두 개를 예매할 때마다, 호텔 펜트하우스에 묵을 때마다 내게 그 비용이 실물 지폐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건데, 예전에는 어쩐 일인지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실물로 보인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식이었다. ‘내가 낡아빠진 화장실 배수구가 막혀서 사람 부르는 데 필요한 돈으로 로버트는 컨트리클럽에서 테니스를 한 판 치는구나.’ ‘내가 제멋대로 꺼지지 않는 컴퓨터를 사는 데 필요한 돈으로 로버트는 벤츠에 희한한 성분으로 된 광택제를 바르는구나(새끼 공룡 태반으로라도 만들었나 보지).’ ‘내가 지하철 월 정기권 끊는 돈으로 로버트는 자기 이니셜이 새겨진 고급 손수건을 사서 일회용품처럼 한 번 쓰고 버리는구나.’
〈오프라 매거진〉에서는 이런 순간을 ‘아하! 순간’이라고 한다(그래요, 나 〈오프라 매거진〉 읽는 여자예요, 왜요? 누구나 살면서 종교 하나쯤은 필요하잖아요).
--- p.78~79

“예를 들면 이런 식이지. 내가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나도 상사의 경비를 관리하잖아. 그래서 내가 이 네트워크에 합류해서 그쪽하고 에밀리가 했던 것처럼 상사의 지출내역서를 날조하면, 거기서 나온 돈으로 다른 회원들의 대출금을 갚아줄 수 있다, 이거지.”
“그러니까 지출내역서를 이용한 계략이라는 거네요. 알겠어요. 내가 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대로 이해한 거 맞죠?”
웬디는 노트북을 바닥에 내려놓고 탁자 대용으로 뒤집어놓은 우유 상자에 군화를 척 올렸다.
“계략이라니. 그 잠재력을 생각해보라고, 티나. 우리는 그냥 평범한 99퍼센트가 아니야. 우리는 상위 1퍼센트의 비서잖아. 거기서 힘이 나오는 거라고.”
--- p.168~169

우리에게 온 여자들은 저마다 사연이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다 똑같은 사연이었고 그 점에서는 에밀리나 나도 마찬가지였다. 학자금 대출은 태산 같은데 봉급이라고 받는 돈은 쥐꼬리만 하니까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뭐, ‘절망’이라는 표현은 과장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나마 비서라도 되니까 광부나 원자력발전소 수위보다는 형편이 나았다. 그래도 깊은 좌절감을 느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렇게 매일 밤 찾아오는 비서들을 만난 지도 2주가 지났을 때 결국 나는 에밀리를 그 뒷방에서도 한적한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그녀가 흥분하지 않게 두 손에 신선한 모히토를 꼭 쥐여주며 말했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왜 우리 인생이 하나같이 개판이냔 말이야? 아니, 우리가 대학까지 나온 백인 여성인데, 이런 씨, 지금 이게 말이 돼?”
--- p.242~243

“자기가 행복해 보이니까 나도 좋아.”
그러고서 케빈은 손으로 원을 그리듯이 내 잔허리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비로소 내 프로젝트를 까발린 짓이 자신의 생각대로 잘한 짓이었다는 확신이 든 것이었다.
사실 내가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따로 있다고, 나는 속으로 말했다. 사이트를 오픈하면 (어쩌면) 정말로 뭔가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뉴욕대 여성연대에서 만난 브루투스라는 여학생의 팔뚝 문신에 있던 글귀처럼, 어쩌면 내가 세상에 바라는 변화가 바로 나를 통해 시작될 수 있었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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