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에서는 몸무게도 줄이고 인물한테 나 대신 운동도 시키고 얼마나 좋습니까. 다만 인물이 대신 운동하니까 인물이 예뻐지고 사랑도 인물이 받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어우, 이거 어디 질투 나서 소설 쓰겠습니까마는 사실 저도 어떻게 소설을 좀 써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40.3킬로미터의 빨간책방」중에서
나는 타락한 것들에 대한 소설을 읽으면서 나를 무시하는 또래 아이들을 내려다보기도 했다. 원래 타락한 것들에 대한 경험이 건강한 것들보다 아무래도 어른의 느낌을 주니까. 너넨 이런 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아이 같은 짓을 하다니. 내일은 학교에 가면 내가 아이들을 무시해야지, 굳게 결심했다.
그래도 무시가 안 되었다. 아무도 내가 그들을 무시한다는 것을 몰라줬다. 나의 무시는 상대방이 무시당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와 같은 치욕감을 느껴야 완성이 되는 거였는데 그러려면 상대방을 완전히 무시하고서는 도무지 완성이 안 되는 것이어서 나는, 그냥 싸웠다. 싸우고 또 싸웠다.
---「교회당의 기다란 창가에 앉아」중에서
학교에서 내준 방학 숙제로 독후감을 많이 써서 ‘다독상’을 받고 싶었지만 ‘다독’할 책이 없었다. 도서관이 있는 동네도 아니었고 엄마에게 사달라고 조르기에는 책보다 아쉬운 것들이 많았으므로 나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책을 한 권 읽고 독후감을 쓰고, 그 책의 결말을 내 머릿속에서 바꿔서 또 독후감을 쓰고, 책 두 권의 인물들을 섞어서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독후감을 썼다. 나는 내 소설을 쓰기도 전에 내 소설에 대한 독후감을 먼저 쓴 셈이다.
---「첫 소설」중에서
뭐야. 너무 피곤해. 아니, 그렇잖아. 저런 농담은 그냥 사회적으로 넘길 수 있는 거 아냐? 그런데 왜 저렇게 따지고 드냐는 말이야. 세상에. 너무 찌질하잖아? 완전 내 타입이었던 거지. 그래서 내가 ‘잡았다, 요놈!’의 느낌으로 말했지.
“그럼 저랑 연애를 하시든지요.”
---「서사가 있어야지」중에서
나는 아직도 무겁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농담을 하고 싶어. 애니메이션 감독 곤 사토시는 병에 걸려 환각을 보면서도 ‘내 환각은 개성도 없구먼’ 하고 관조했다는데 나도 내 죽음을 두고 농담을 하다 웃어 까무러치다 죽고 싶어.
농담이 우리를 살게 하지. 우리는 익살을 사랑해.
---「우리는 익살을 사랑해」중에서
미학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생겨나는 거지, 무엇이 아름답지?
왜 나한테 아름다운 것이 당신에게는 도통 아름답지가 않고 당신에게 아름다운 것이 왜 나에겐 아무렇지 않은 거지.
---「엄마가 한때는 문학소녀였단다」중에서
나는 나의 몇 가지 불행을 생각하곤 금세 좌절했다. 나는 왜 불행마저도 상투적이지, 쓰는 글도 상투적인데. 내 불행은 클리셰해서 도무지 소설로 옮겨올 수가 없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나는 내 경험을 끌어안고 있어서 소설을 못 쓰는 건 아닌가 하고.
---「어디까지 살아보고 오셨어요?」중에서
우리에게 그런 과거 하나쯤은 있는 법이지, 그러고도 망쳐버린 과거 하나쯤은 있는 법이지. 어떤 과거들은 언어로 표현되고,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나의 슬픔은 왜곡될 수밖에 없어서 나는 도무지 과거를 제대로 기억할 수가 없다. 나는 나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나의 과거를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나의 과거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나는 너무 큰 오늘의 달 정도는 마음속에 담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나쯤 있는 과거」중에서
관계에는 충분히 기대하고 있다. 우리가 언젠가는 통할 거라는 믿음, 상대가 누구든 진심을 다해 전한다면 반드시 도달할 거라는 믿음. 나를 설명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자주 다퉜다. 묻어두는 법이 없었다. 바닥까지 끄집어내서 내게 설명해줘. 나는 마음을 다해 이해해볼게. 내 이해가 죄다 오해라고 해도. 인간과 관계와 구원에 대한 믿음.
(중략)
몇 년 전, 문창과 동기인 영이 말했다.
“낙천적인 허무주의자가 결국 모든 사람들이 도달하는 이상향이라고 믿는 내게 넌 내가 가지 않은 또다른 길의 희망이다.”
---「너는 내가 가지 않은 또다른 길의 희망이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