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너의 낙태를 말해 봐’가 그 역동성 안에서 보이는 것은 모든 낙태에 대한 이야기와 논의가 균질한 금기가 아니라는 지점이다. 모든 ‘낙태’ 또는 ‘낙태한 여성’이 동일한 도덕적 위상에 위치하지 않으며, 그 무엇이 여성의 임신중절 경험에서 ‘핵심’이라거나, 그를 아우르는 ‘동일한 경험’을 상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너의 낙태를 말해 봐’ 해시태그 운동을 촉발한 최초의 트윗은 슬픔과 후회, 죄책감을 동반하는 낙태 경험과 “낙태 덕분에 더없이 완벽한 행복”을 경험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상이함을 지적한다. 규범적인 성적 실천의 연장선상에서 ‘원치 않는 임신’과 비규범적 섹슈얼리티 안에 놓인 ‘원치 않는 임신’은 전혀 다른 도덕적 평가를 받는다. 따라서 단순히 그 폭로가 유의미한 것이 아니라 이 경험 안에서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질문, 참조와 전제의 기반에 대한 성찰이 함께해야 한다. 임신중지의 경험을 말하는 행위에 대해 단순히 동질한 피해자성을 공유하거나 그 고통의 차원만을 부각하여 해석한다면 낙태죄의 정치화는 기획될 수 없다.
― 31쪽 낙태죄를 정치화하기
생명권 대 선택권의 이분법으로 임신중지 이슈를 바라보기는 쉽다. 그리고 생명은 너무나도 강력한 가치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 답은 정해져 있다. 하지만 임신이 일어나고 있는 여성의 몸, 삶, 시간은, 그리고 인생의 어떤 시점, 어떤 환경에 있는지는 그 이분법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어릴 적 성폭력으로 인한 원치 않은 임신을 인공유산으로 종결했던 여성이, 결혼 후 난임으로 찾아왔다. 여러 번의 인공수정 끝에 커플은 기다리던 임신에 성공했다. 임신 16주, 혈액 기형아 검사상 다운증후군이 의심되었다. 가이드라인대로 양수 검사를 권유했으나, 여성은 고민 끝에 다시 찾아와 검사를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본인은 임신을 유지할 것이기에 양수 검사가 필요 없다고. 그렇다면 이 여성은 생명 옹호론자인가 선택권 옹호론자인가. 인생의 어떠한 지점에서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는 스펙트럼과도 같다. 본인과 가족의 삶과 건강을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가장 적절한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여성 자신이며, 그 결정은 생명과 선택의 이분법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 78, 79쪽 인권과 보건의료의 관점에서 본 임신중지
헌법 불합치 결정을 할 때에는 통상 입법자에게 일정 시한까지 해당 법률 조항의 위헌인 상태를 제거(개정)할 것을 촉구하는 결정을 함께한다. 낙태죄 조항에 대하여 헌법 불합치 결정을 하면, 입법자는 관련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 한정 위헌 결정은 위헌적인 해석 가능성을 배제하거나 적용 범위를 축소시켜 위헌성을 제거하는 결정이다. 예를 들어, ‘임신 후 12주 이내에 이루어지는 낙태에 대해서까지 낙태죄 조항을 적용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형식의 결정이다. 이런 결정이 내려질 경우, 임신 후 12주 이내의 낙태에는 형법과 모자보건법이 모두 적용되지 않으므로 초기 낙태가 전면적으로 허용되고, 12주를 지나서 이루어지는 낙태에는 현행대로 형법과 모자보건법이 적용된다. 따라서 위헌 결정의 형태도 매우 중요하다.
― 109, 110쪽 낙태와 헌법 논쟁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지명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인준 청문회에서 낙태는 “안전하고, 합법적이고, 드물어야 한다”(Safe, legal and rare)라고 하며 낙태를 포함한 재생산 건강에 국제 원조를 지속할 의지를 펼쳤다. 하지만 인구 변천의 차원에서 특히 원하는 가족 규모가 극감하는 개발도상국의 여성은 피임과 낙태 욕구가 높기 때문에, 낙태가 드물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 발언 자체도 비도덕을 함의하는 낙인이지만, 미국의 정파적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만 해도 미국의 국제 재생산 건강 관련 원조는 회복되는 상황이었지만,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다시 국제 금지 규정이 도입되면서 또 다른 국면을 맞는다. 낙태에 대한 접근성은 미국에서 첨예한 당파적 논쟁의 의제가 되며, 어느 정당 출신 후보가 미국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전 세계 개발도상국 혹은 제3세계 여성들의 건강권이 좌지우지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 159쪽 낙태의 범죄화와 가족계획 정책의 그림자
그렇다면 2005년 황우석 박사의 체세포 복제 연구를 위해 자발적으로 ‘난자 기증 운동’을 벌였던 여성들의 난자 공여는 상업화된 난자 매매가 아니기 때문에 허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난자 채취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의료적 처치들이 여성의 몸에 해롭기 때문에 모든 경우의 ‘난자 공여’가 문제라면, 자신의 아이를 낳기 위해 스스로 시술 과정을 겪는 난임 여성들에게는 왜 허용되거나 장려되는 것일까? 마찬가지로 상업적 대리모가 문제가 된다면, 친인척에 의한 비상업적인 대리모는 괜찮은 것일까? 자신이 앞으로 키울 아이가 아닌 타인의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형태의 대리모가 문제라면, 입양을 전제로 출산하는 ‘미혼모’들은 모두 잘못인가? 그리고 입양 역시 초국가적 산업을 형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입양’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이 복잡한 질문들이 우리에게 던져졌으며, 한국 사회에서 이 논쟁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지에 대해 합의된 내용은 하나도 없다. 다만 분명해 보이는 것은 과거의 이성애 성관계를 통한 ‘자연임신’의 시대를 낭만화하는 것은 현재의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점이다. 모든 여성이 (자연적으로) 재생산 능력을 동등하게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여성이 (사회적으로) 임신?출산?육아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시 모성을 자연화하고 신성화하는 방식으로 ‘자연임신’과 ‘인공임신’을 구분하는 것은 재생산의 영역에 또 다른 위계화를 만드는 방식 이상이 되기 어렵다.
― 188, 189쪽 섹스 없는 임신, 임신 없는 출산
현재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 되었지만, 정체성 및 법적 범주로서의 장애인/비장애인을 이분법적으로 상상하는 것은 무수한 인구의 삶과 신체가 취약성과 폭력, 수탈로 불능이 되는 역사적 현재에 대한 급진적 사고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불능화된 인구를 생산하는 국가와 억압적 권력에 대한 저항은 장애인/비장애인이란 정체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한번 생각해 보자. ‘비장애인’으로 분류되는 개인들은 이미 언제나 ‘생산적’이고 ‘역량 있는’ 상태에 있는가? 반대로 ‘장애인’은 젠더?인종?민족?경제적 능력 등과 상관없이 이미 언제나 ‘불능’이자 ‘비생산적’인 집단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결국 누가 ‘장애인’인가를 분류하는 문제나 장애인의 ‘차이’와 ‘다양성’을 포용해야 한다는 ‘포섭’ 전략 모두 핵심을 벗어나는 것임을 일깨운다. ‘불능’의 정치는 권리를 박탈당한 모든 사람들에게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신체적 취약성과 ‘불능’을 드러내고, 애초에 모든 인구와 생명을 규범과 정상성으로 차등화하면서 작동하는 근대국가의 통치 시스템 자체에 전면적으로 도전한다.
― 241쪽 건강한 국가와 우생학적 신체들
‘금지’의 문제를 선택이나 능력의 문제로 오해하게 만들고 왜곡하는 구조가 있다. ‘장애인은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좋은 부모란 무엇인가’라는 보편적이고 성찰적인 질문에 포함되지 않는다. 후자의 질문과 달리 전자의 질문은 장애인의 부모 됨의 자격을 심사하는 심판자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모자보건법은 장애를 가진 이들이 인공임신중절 수술의 대상이라는 점을 명시함으로써, 장애인이 부모 됨을 포기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 형성에 기여했다. 또한 많은 장애아들이 선택적 낙태의 대상이 되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선택은 국가가 허락한 범주 내에서 가능한, 선택 없는 선택이다.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낙태는 언제든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엄중한 법적 현실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 280쪽 낙태죄 폐지 투쟁의 의미를 갱신하기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