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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1부 목마른 물새가 목마른 물새에게 먼 집 목마른 물새 쓸쓸한 폭풍 멍 해 지는 날, 푸른 벼랑에 앉아 내가 네게로 내가 너를 부를 때 봄 언덕엔 언제나 젖고 있는 들판에게 그대의 문 네가 산이었을 때 연초록 숨결 앞에 목마름에 대하여 흙인 나를 밟아 다오 새야 추억 여문 씨앗을 위한 소네트 제2부 사막여우가 있는 풍경 개펄 연초록 새싹에게 찔레꽃 핀 6월의 날개 산에게 사막여우가 있는 풍경 봉함엽서 돌미나리가 있는 풍경 피리어드 부리 한 숲이 한 숲에게 네가 올 때까지 제3부 잠든 염소를 깨워 몰고 산양 별똥별 아내라는 여자 아침 다탁茶卓 봄날 여름 숲에서 노루귀꽃을 보며 선묘 그 말이 아직 망아지였을 때 심해에서 울리는 종소리 벙어리 강 댕기머리물떼새 잠든 염소를 깨워 몰고 치자꽃 선묘, 선묘 기러기 백발의 날 눈길에서 멸치 정직한 시인 제4부 깊은 우물 하류 깊은 우물 봄산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 청산 가는 길 말 움직이는 산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앞에서 무당벌레가 되고 싶은 시인 간이역에서 젊음에게 광막한 바다가 폭설 침묵하는 산 애련愛憐 탁. 탁. 탁. 소금 사막 봄밤의 꿈 말들의 시간 가을 바다 봉선화 사북에서 코뿔소를 찾아서 -추운 사내 저무는 날이 다가와 은어 황야의 이리·2 연꽃 밭에서 서정抒情을 향하다 · 두 개의 유년 체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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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둣빛 신록의 날들과
폭설의 날들과 폐선廢船의 날들과… 해 지던 날들의 푸른 벼랑을 위하여 --- 「시인의 말」 중에서 아버지의 등 뒤에 벼랑이 보인다. 아니, 아버지는 안 보이고 벼랑만 보인다. 요즘엔 선연히 보인다. 옛날, 나는 아버지가 산인 줄 알았다. 차령산맥이거나 낭림산맥인 줄 알았다. 장대한 능선들 모두가 아버지인 줄만 알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었다. 푸른 이끼를 스쳐 간 그 산의 물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닿는 것이라고, 수평선에 해가 뜨고 하늘도 열리는 것이라고 그때 나는 뒷짐 지고 아버지 뒤를 따라갔었다. 아버지가 아들인 내가 밟아야 할 비탈들을 앞장서 가시면서 당신 몸으로 끌어안아 들이고 있는 걸 몰랐다. 아들의 비탈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까마득한 벼랑으로 쫓기고 계신 걸 나는 몰랐었다. 나 이제 늙은 짐승 되어 힘겨운 벼랑에 서서 뒤돌아보니 뒷짐 지고 내 뒤를 따르는 낯익은 얼굴 하나 보인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쫓기고 쫓겨 까마득한 벼랑으로 접어드는 내 뒤에 또 한 마리 산양이 보인다. 겨우겨우 벼랑 하나 발 딛고 선 내 뒤를 따르는 초식동물 한 마리가 보인다. --- 「산양」 중에서 새야 작은 새야 손가락 한 매디만 한 새야 풀씨 몆 개 따 먹은 힘으로 피이 피이 우는 새야 새야 오늘은 내 어깨에 기대서서 울지만 내일엔 누구 가슴 찾아가서 울래. --- 「새야」 중에서 붉게 타는 단풍 앞에서 내 말은 한갓 허사虛辭일 뿐 붉은 단풍은 붉은 단풍의 진심을 나이테에 새긴다. 나무들이 단단한 나이테를 새겨 넣듯 나도 말 하나 새기고 싶다. 단단한 말, 둥치째 잘려도 선연한 말, 짙고 치밀한 흔적들이 둥글게 둥글게 입을 다문 그런 말 하나 새기고 싶다. 가을에 나무들은 붉게 물든다. 아름드리나무들이 가랑잎을 떨어뜨려 가는 이 소리 없는 시간의 운행… 그리고 먼 산에 새겨지는 나이테, 이 무량의 침묵 앞에서 나는 말을 잊는다. --- 「산에게」 중에서 시를 쓰면서 아프고 멍들고 핏물에 젖기도 했었지만, 나는 직설 토로의 시인이 아니었다. 체험 속으로 되돌아가 멍과 핏물이 내재된 이미저리들을 찾으려 했었다. 과거의 축적 속으로 가 기억의 갈피에 쌓인 시어들을 불러내곤 했었다. 첩첩 쌓인 체험들이 삭아 내린 거기 ‘그리움의 말’이 고여 있었다. 맑고 청신한 옹달샘 같은 말들이었다. ‘이건청의 서정시선’은 그렇게 쓴 시들을 선별해 모아 놓은 시선집이다. 시인으로 살아오면서 쓴 평생의 시편들 속에서 ‘서정시선집’ 한 권을 골라내 따로 지닐 수 있게 되었다. 기쁜 마음이다. 이 ‘서정시선집’이 그리움을 질료로 한 망극한 전언으로 살아남고, 세상이 새롭게 찾아 주는 날이 오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기쁠 것인가…. --- 「서정抒情을 향하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