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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
작품 해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연보 |
Erich Maria Remar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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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눈앞에 있는 여인의 목덜미를 보았다. 양쪽 어깨. 무엇인가 숨을 쉬고 있는 것. 낯선 생명의 한 조각. 그러나 생명임에는 틀림이 없다. 따스함이 있는 것이다. 굳어버린 시체는 아니다. 얼마간 따스함을 주는 것 말고 남에게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그 이상 무엇이 있단 말인가?
--- pp.33-34 “신앙이란 사람을 곧잘 광신적으로 만들지. 그러기에 모든 종교는 그렇게도 많은 피를 흘린 거야.” 그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관용이란 회의의 딸이야, 외젠. 망각된 불신의 인간인 내가 외젠에 대해서보다, 신앙을 가진 외젠이 나에 대해서 더욱 공격적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 --- p.60 프랑스 사람은 자기 집에 좀처럼 남을 초대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차라리 레스토랑 같은 데서 때워버린다. 그는 아직 한 번도 베베르의 집에 가본 적이 없다. 호의는 알겠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모욕에 대해서는 저항할 수도 있지만, 연민에 대해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 p.65 “생활이란 남의 힘으로 사는 것이지. 우리는 모두 서로를 잡아먹고 있어. 가끔가다 번쩍하는 인정의 작은 불꽃, 이것을 쉽사리 없애버려서는 안 되네. 살아가기가 괴로울 때 그것이 살아갈 힘을 주니까.” --- p.80 라비크는 술병을 가만히 탁자에 놓고 자기 팔을 붙잡고 있는 여인의 손을 풀었다. “어린애로군” 하고 그는 말했다. “우린 언젠가는 모든 것에 익숙해져야 하오.” 그는 흘끗 긴 의자를 쳐다보았다. “나는 이 의자에서 자도 좋소. 이 시간에 나가봐야 별수 없지. 난 한두 시간 푹 자야 해요. 아침 9시에 수술을 해야 하거든. 여기서 자든 내 방에서 자든 마찬가지요. 야근을 하는 게 처음은 아니니까. 그러면 됐소?” --- p.96 라비크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것에 익숙해져야 하오.” 이윽고 그는 말했다. “이전에 우리를 잡아매고 있던 것이 지금은 파괴되어버렸소. 우린 오늘날 줄이 끊어진 유리알 목걸이처럼 산산이 흩어져 있는 거요. 든든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소.” 그는 다시 잔을 채웠다. --- p.100 그녀는 무엇을 하든 거기 완전히 몰두해버린다. 그것은 이 여인의 대단한 매력이지만 위험한 점이기도 하다고 그는 막연히 생각했다. 이런 여인은 술을 마실 때는 술이 전부요, 사랑을 할 때는 사랑이 전부고, 절망할 때는 절망이 전부다. 그리고 잊어버릴 때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만다. --- p.169 “전 당신을 사랑해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은 아직 나라는 인간을 몰라, 조앙.”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상관이 있지. 사랑이란 같이 늙어보겠다는 사람들이 하는 거야.” “그런 건 전 몰라요. 사랑이란 그 사람이 없으면 살 수가 없는 걸 말하지요. 그건 알아요.” --- p.196 “이것을 좀 보게. 놈들은 무기 공장을 세우면서, 평화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하지. 강제수용소를 만들고는,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정의는 모든 당파적인 미친 지랄을 덮어주는 가면이 되어버렸어. 정치 깡패들이 구세주가 되어 있어. 자유는 모든 정권욕을 위한 장담이 되고 말았어. 위조지폐야! 정신의 위조지폐야! 사기 선전이지. 부엌데기들의 마키아벨리즘이지. 암흑세계의 손아귀에서 노는 이상주의란 말이야. 하다못해 이것들이 정직하기나 했으면…….” --- p.209 “사랑이란 들여다보면 언제나 자기 그림자가 비치는 연못이 아니야. 사랑에는 밀물과 썰물이 있어. 그리고 난파선과, 침몰한 도시와, 낙지와, 폭풍우와, 황금과, 진주 상자가. 그러나 진주는 아주 깊은 곳에만 있어.” “그런 건 몰라요. 사랑은 서로 함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언제까지나.” --- pp.239-240 신문 또는 라디오 때문일까? 사기꾼과 비겁자들의 끊임없는 규환. 말의 눈사태에 따른 주의력 산만. 두뇌 혼란. 온갖 테마의 찌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식의 딱딱한 빵을 꼭꼭 씹는 버릇은 잊은 지 오래다. 이가 없는 두뇌. 어리석다. 자, 드디어 끝났다. 아직도 피부가 느슨하다. 그러나 두어 주일 지나면 다시 덜덜 떠는 피난민을 국외로 추방할 수 있으리라. 담낭이 없어졌으니까 혹시 좀 관대해지려나? 죽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런 녀석은 여든이나 되어 남에게 존경을 받으며, 또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거만한 자손들에게 둘러싸여 죽어가게 마련이다. 자, 끝났다. 데리고 가렴! --- p.255 “헤어질 때는 으레 그런 거요. 절망과 헤어질 때도.” 그녀는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망설이며, 부드러운 생명에 가득 차, 결단을 내리고, 약간 슬픈 듯이. “헤어질 때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냥 떠나는 거요” 하고 라비크는 말했다. “자, 갑시다. 내가 조금 바래다주지.” --- p.259 그는 달을 쳐다보았다. 남의 빛으로 온 세계 색채란 색채를 모조리 빨아들이고 있는 창백한 흡혈귀다! 강제수용소의 공포로 가득 찬 꿈, 학살당한 친구들의 굳어버린 얼굴로 가득 찬 꿈, 살아남은 사람들의 눈물도 마른 화석처럼 마비된 고통, 모든 비탄을 넘어선 견딜 수 없는 이별과 고독, 그런 것으로 가득 찬 꿈. 낮에는 자기 눈보다도 높은 담을, 벽을 쌓아 올릴 수가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갖은 고생을 하며 간신히 쌓아 올린 것이다. 소망은 비웃음으로 목 졸라 죽이고, 기억은 냉혹의 껍질 속에 묻어 짓밟아버리고, 모든 것을, 자신의 이름까지도 자기에게서 벗겨버리고, 자신의 감정을 시멘트로 덮어버렸다. --- p.266 “또 아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 역시 아내가 죽었지. 그 친구는 자리에 누워서 이틀 동안이나 잠만 잤어. 그 친구가 그런 짓을 했다고 해서 죽은 아내의 어머니는 펄펄 뛰며 화를 냈지. 인간이란 여러 가지 모순된 짓을 하면서도 완전히 절망하고 있는 수가 있는데, 그 어머니는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거야. 불행만을 위한 에티켓이 얼마나 많이 고안되어 있는지, 정말이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만약 내가 정신없이 취해 있었다면 다 격식대로 되었을 테지. 체스를 두고 자버렸다는 것은 내가 거칠고 매정하다는 증거가 되겠지. 실로 간단한 문제야. 어때?” --- p.340 “여자처럼 말이지, 조앙. 우리는 죽음을 지배하고 당신들은 사랑을 지배하지. 거기에 세상의 모든 이유와 모든 권리가 있는 거야.” (383 나는 왜 값싼 소리를 하고 있을까. 신문에서나 볼 수 있는 역설이다. 진실이라는 것은 일단 입 밖에 내버리면 이렇게도 초라해지고 마는구나. --- p.395 무엇인가 언뜻 그의 눈에 띄었다. 조그맣고 펄럭이는 흰 것이. 나비다. 열어놓은 출입구로 날아 들어온 것이 틀림없다. 아마도 한 쌍의 연인들 때문에 향기로운 잠을 깨고, 튈르리의 따뜻한 장미꽃 잠자리에서 날아올라 무수한 어지러운 낯선 태양과도 같은 불빛에 눈이 부셔 이 문 안으로, 커다란 문짝 뒤의 안전한 어둠 속으로 도망쳐 들어왔으리라. 그리고 지금 어리둥절하면서 기특하게도 이 넓은 홀을 하늘하늘 날아다니고 있다. 그러다가 지쳐 여기에서, 대리석 박공에서, 창문 돌출부에서, 아니면 높다랗게 찬란히 빛나고 있는 여신의 어깨 위에서 잠들고 죽어갈 것이다. 아침이 되면 꽃을, 생명을, 화초의 단 꿀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찾아내지 못하고, 이윽고 다시 맥이 풀려 천 년 묵은 대리석 뒤에서 잠들 것이다. 결국에는 화사하면서도 단단한 다리의 힘도 빠져서, 가을도 오기 전에 지는 작은 나뭇잎처럼 마룻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 p.415 그러나 나의 내부에서는 피가 떨고 있고, 뇌수라고 불리는 두 주먹 정도밖에 안 되는 해파리 같은 덩어리의 회백색으로 맥박치는 미로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이 일어나며 현실을 비현실로, 비현실을 현실로 보고 있다. 나는 팔이 닿고, 몸이 서로 스치고, 눈이 응시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나는 자동차 소리, 말소리, 억센 현실의 떠들썩한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나는 그 한가운데 있다. 더구나 달보다도 먼 별세계에, 논리와 사실의 피안에 있다. 나의 내부에서 무엇인가 이름을 부르짖는 것이 있다. 그것이 이름이 아님을 알면서도 큰 소리로 부르짖고 있다. 부르짖으면서 그것을 침묵 속으로 보내고 있다. 언제나 존재하고, 이미 무수한 부르짖음이 그 속으로 사라져간 침묵, 일찍이 대답 하나 돌아오지 않은 침묵으로. 그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계속 부르짖는다. 사랑의 밤과 죽음의 밤의 부르짖음, 황홀과 무너져 내리는 의식의 부르짖음, 밀림과 사막의 부르짖음. 나는 몇천의 대답을 알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 하나의 대답에는 내 힘이 미치지 못한다. 나는 그 대답을 얻을 수가 없다. --- p.417 열린 지붕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라비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단하지. 최신 발명은 자기기뢰(磁氣機雷)와 자기어뢰야. 어제 어디서 읽었지만 말이야. 목표에서 벗어나면 커브를 틀어서 방향을 바꿔 부딪칠 때까지 쫓아간다는 거야. 인간이란 정말 경탄할 만큼 건설적인 동물이야.” --- p.4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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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낸 망명 문학의 걸작! “나는 왜 값싼 소리를 하고 있을까. 신문에서나 볼 수 있는 역설이다. 진실이라는 것은 일단 입 밖에 내버리면 이렇게도 초라해지고 마는구나.” 전쟁이 만든 공포와 광기, 불안을 담은 레마르크의 대표작 『개선문』은 『서부전선 이상 없다』 이후 발표한 레마르크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로, 그 이전에 발표한 장편소설 네 편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나치스 독일에 쫓겨 유럽 각국에서 파리로 도망쳐 온 피난민들이 모여 있는 몽마르트르의 값싼 숙소를 배경으로, 피난민 중 한 사람인 외과 의사 라비크의 절망적 일상생활과 행동을 담백하게 묘사한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전야의 불안과 공포에 찬 지식인의 정신 상태를 눈에 보일 듯이 그려내어 최고의 반전 소설이자 망명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개선문』만큼 레마르크의 사상을, 여인의 방황하는 관능을, 남녀의 야릇한 심리 갈등을 교묘하게 묘사한 작품도 없다. 작가의 풍부한 시정과 애절한 서정이 여한 없이 묘사되었고, 특히 조앙 마두와 주인공 라비크의 가슴 아프고 애절한, 어딘가 뒤틀린 사랑은 읽는 이의 마음을 저리게 한다. 세대와 국경을 초월한 레마르크의 주제 의식 레마르크는 첫 장편소설인 『서부전선 이상 없다』(1929)를 발표한 뒤 『검은 오벨리스크』(1957)까지 장편은 여덟 편밖에 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들은 세대와 국경을 초월해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작품에서 다루는 주제와 문학적 표현 양식이다. 레마르크는 사적인 개인의 문제를 작품의 주제로 삼지 않는다. 그가 발표한 장편소설 여덟 편은 20세기 세계사를 뒤흔든 사건들인 1차 세계대전, 세계대전 후의 혼란, 히틀러, 게슈타포, 강제수용소, 2차 세계대전 등을 다룬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고뇌하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 비참한 운명으로 고통받는 민중, 광포한 세상에 짓눌려 질식해가는 세계의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커다란 역사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그 비극을 작품 속에 세밀하게 묘사했다. 『개선문』 또한 마찬가지다. 비극의 역사 현장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고뇌 2차 세계대전 직전의 파리, 주인공 라비크는 나치의 강제수용소를 탈출해서 파리에 불법 입국한 40대 외과 의사다. 그는 옛날 베를린의 유명 종합병원에서 외과 과장으로 명성을 날렸으나 지금은 파리의 무능한 의사들에게 고용되어 마취된 환자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수술을 해주고 사라지며, 고급 유곽의 창녀들을 검진하는 일을 한다. 라비크를 사모하는 부유한 미국 여성 케이트 헤그시트룀가 찾아오고 그녀를 수술하던 라비크는 헤크시트룀의 몸에 도사린 암을 발견한다. 한편 파리의 다리 위에서 우연히 만난 조앙 마두 또한 라비크를 열렬히 사랑하지만 라비크와 그녀는 서로를 상처 주면서 비극적인 사랑을 이어간다. 과거 자신을 고문한 게슈타포 하케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던 라비크는 우연히 만난 그를 살해하는 데 정열을 바치지만 막상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허무의 감정만이 남는다. 한편, 조앙은 동거남의 총을 맞고 라비크의 품에서 죽어가며 전쟁이 선포된다. 유럽에서 피난민의 마지막 안식처였던 프랑스가 전쟁의 암운에 휘말리자, 라비크는 기거하던 앵테르나시오날 호텔의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프랑스 경찰의 트럭을 타고 끌려간다. 트럭을 타고 가면서 바라본 에트왈 광장은 칠흑 같은 어둠에 싸여 불빛 하나 없다. 거대한 개선문의 모습마저 보이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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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라는 위대한 작가가 있다.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최고의 장인이며, 언어를 자유자재로 요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인간에 대한 글이든 무생물에 대한 글이든 그의 손길은 섬세하고 단단하며 확실하다.” - [뉴욕타임스 북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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