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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譯註叢書를 발간하면서
凡 例 五百 第八 / 11 先知 第九 / 53 重黎 第十 / 85 淵騫 第十一 / 148 君子 第十二 / 200 孝至 第十三 / 229 [附錄] 1. ≪揚子法言2≫ 參考書目 / 271 2. ≪揚子法言2≫ 參考圖版 目錄 / 275 |
朴勝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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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굽히는 것은 장차 도를 펴고자 해서이니, 만약 도를 굽혀서 몸을 편다면 비록 천하를 얻는다 해도 할 수 없다
--- 「오백五百」 중에서 큰 그릇은 그림쇠와 곡척, 수준기와 먹줄과 같을 것이다. 먼저 자신을 다스린 뒤에 남을 다스리는 것을 큰 그릇이라고 이른다. --- 「선지先知」 중에서 재능을 겸비한 자를 등용하고 임기응변을 중시하며, 이리저리 생각하고 헤아려서 행동할 때에 때를 신중히 하는 것은 人事이다. 천명은 사람을 통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고, 人事는 천명을 얻지 못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 「중려重黎」 중에서 옛날에 뜻이 높은 자들은 백이 숙제처럼 굶어 죽음으로써 그 이름을 드러냈고, 뜻이 낮은 자들은 조정에서 녹봉을 받으면서 은자처럼 처신하였다. --- 「연건淵騫」 중에서 君子는 남에게도 성심을 다하니, 더구나 자신에게는 어떠하겠는가. 小人은 자신도 속이니, 더구나 남에게는 어떠하겠는가. --- 「군자君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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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저 양웅, 유학儒學의 일대一大 종사宗師가 되다
양웅(B.C.53~A.D.18)은 자字가 자운子雲으로 촉군蜀郡 성도成都(지금의 사천 성도) 사람이다. 전한前漢 말기의 탁월한 문장가이자 학자였으며, 특히 ≪법언≫은 ≪한서漢書≫ 〈양웅전揚雄傳〉에 편명을 모두 열거했을 정도로 당대에 널리 유행하고 중시되었다. 〈양웅전〉에 따르면, 양웅의 집안은 한나라 원정元鼎 연간(B.C.116~B.C.111)에 원수를 피해 민산岷山의 남쪽 비현에 거주한 뒤로는 대대로 농업과 양잠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양웅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경학經學을 공부하였는데, 보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많은 책을 보았다. 사람됨은 소탈하였으나 농담을 하지 않고 묵묵하게 깊이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청정무위淸淨無爲하여 욕심이 적었으며, 부귀에 급급해하거나 빈천을 근심하지도 않았고, 청렴한 지조를 닦아 당세에 명예를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같은 고을 출신의 사마상여司馬相如에게 영향을 받아 문장文章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려고 하였다. 〈반이소反離騷〉, 〈촉도부蜀都賦〉, 〈광소廣騷〉 등으로 성제成帝의 부름도 받고 〈장양부長楊賦〉, 〈감천부甘泉賦〉 등으로 문명文名도 떨쳤지만, 문장을 통해 시정時政을 바로잡고자 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경학에 힘써 유학의 일대一大 종사宗師로 인정받게 되었다. 본래 양웅은 저명한 학자 엄군평嚴君平에게 학문을 익혔는데, 노장학老莊學에 정통한 엄군평의 ≪도덕지귀道德指歸≫에 큰 영향을 받았다. 양웅은 유가와 도가의 사상을 융합하려 하면서도 노자가 인의仁義와 예禮, 학문學問을 버리려 한 것에 대해 비판하였고, 당시 유행한 천인감응天人感應, 귀신도식鬼神圖識(여러 귀신 그림을 놓고 벌이는 주술의식) 등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대표 주석까지 완역 ≪역주 양자법언2≫는 한국고전번역원과 전통문화연구회에서 20여 년 동안 번역에 종사한 박승주朴勝珠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책이다. 원전의 난해성으로 인해 선학先學들의 연구가 미비한 가운데에서도 깊이 있는 번역을 위해 노력을 다한 값진 책이다. 현재 ≪법언≫ 연구의 기초가 되는 이궤李軌(진晉), 유종원柳宗元(당唐)의 주註와 송함宋咸, 吳?(송宋), 사마광司馬光의 첨주添註를 합각한 ≪신찬문목오신음주양자법언新纂門目五臣音註揚子法言≫을 저본으로 주석까지 모두 번역하였다. 난해한 원전을 쉬운 우리말로 풀이하여 일반 독자들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또한 내용 이해에 필요한 역주를 자세히 달아 연구자들에게도 도움이 되게 하였다. 이 책에는 ≪법언≫ 전체 13편 가운데 8편에서 13편까지, 〈오백五百〉, 〈선지先知〉, 〈중려重黎〉, 〈연건淵騫〉, 〈군자君子〉, 〈효지孝至〉를 수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