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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고향의 풍경
동화적 환상 첫 여행 달과 고무신 바다의 수수께끼 명주 안감 안개 속에서 낚시 왕릉의 달무 경상도적(的) 고향을 생각함 램프 교직 조끼 제2부 나의 문학 여정 문학적 자서전 천애(天涯)의 유배지 문단 데뷔 전후 지훈과 나 학 같던 두진 『청록집』출판 기념회 땅에서 파낸 작품 1950. 6. 25. 때 아닌 입영 습기에 전 책들 갈증과 사투리 시지프스의 형벌 지훈의 마지막 모습 환상의 지도 구황룡의 아지랑이와 꽃고사리 이리 온, 참새야 정결한 바위 제3부 일상의 경이 미하엘의 미소 한국의 아내 모 씨 부인의 축구 시합 구경 새끼 염소 등의자에 앉아서 밤 밤과 난(蘭) 귤 씨 뿌리기 3분간의 명상 일기 세 도막 삼온(三溫) 금붕어와 꽃나무 오솔길의 사상 바다 태몽의 신비 시와 신앙에 대하여 발문: 박목월 선생의 산문 세계_정민 |
朴木月, 본명 : 박영종(朴泳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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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나는 분황사에 드나들게 되고 달빛 속에 떠오르는 탑신은 물에서 갓 건져낸 것처럼 맑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탑신을 씻어 내리는 달빛에는 형언할 수 없는 설움이 깃들고, 탑의 표정도 전과는 다르게 애수를 머금고 있었다. 참으로 한 켤레의 평생 처음 신어 보는 신기한 신발을 잃어버림으로써 달과 달빛과 깊은 애수에 잠긴 탑의 서러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럴수록 탑은 더욱 아름답고 달빛도 한결 아름다웠다. --- p.25
그 후 20년의 세월. 나는 ‘스스로 맺는 풀 열매’ 같은 작품을 빚으며 살아왔다. 성의를 다하였음에도 가난하기 그지없는 것밖에 이룰 수 없다면, 이미 그것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시로 말미암아 청춘이 병들었더니, 시로써 다시 뜻이 서게 되었구나.” 이것은 지훈의 말. 내게는 감개무량한 말이다. --- p.81 나는 늘 혼자였다. 사무가 끝나면 거리로 나왔다. 거리랬자 5분만 거닐면 거닐 곳이 없었다. 반월성으로, 오릉으로, 남산으로, 분황사로 돌아다녔다. 실로 내가 벗할 것이란 황폐한 고도(古都)의 산천과 하늘뿐이었다. 이 유배의 지역에서 나는 스물, 스물하나, 스물둘―그야말로 꽃 같은 젊음을 보냈다. 왕릉에 누워서 달을 보는 것, 기와 조각을 툭툭 차면서 길을 걷는 것, 밤이면 램프 밑에서 책을 읽는 것, 그리고 아무 주막에서나 술을 마시는 것. 그 외에 낮이면 주판알을 튕기는 것이 전부였다. 이 풀 길 없는 고독이 안으로 응결되어 나의 초기 작품 세계의 터가 잡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시를 쓰는 것과 시인이 되는 것 외에 다른 소망이 없었다. --- p.91 그 시대의 절망적인 환경이 나를 향토적인 세계로 몰아넣고 그것에 깊은 애착을 갖게 하였으며 그 세계 안에서 나를 길러 준 것이다. 그 무렵에 사귄 시우(詩友)로는 지훈 한 사람뿐이었다. 지훈도 사귀었다기보다 만났다 함이 적합한 표현일지 모른다. 하루는 서울에 있는 지훈에게서 두툼한 봉서가 왔다. 지훈의 그 자획 하나를 소홀히 하지 않는 단정하면서도 멋있는 글씨로 엮은 긴 사연의 편지를 받았던 것이다. 『문장』에 추천 받은 시우와 서신 왕래를 갖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본인이 그 당시 내가 살던 경주에 나타났다. 그의 밤물결 같은 장발을 바람에 휘날리며 산을 건너다보던 모습과 후리후리한 키에 희멀겋게 시원한 얼굴과 장자풍이 있는 너그러운 몸가짐. 우리는 어두운 여관방에서 날이 새는 줄 모르고 시를, 시대를 얘기하고 서울 시단 소식을 들었다. --- p.94 직장에서 물러나게 되면 당장 생활이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 당시의 그의 형편이었다. 그는 버스 값에도 궁하여 안양에서 서울까지 걸어 다닌다는 이야기를 나는 들었다. 시를 한 편 써서 신문사나 잡지사에서 고료를 받게 되면 그것이 그날의 양식이 되는 형편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두진은 근엄하고 꼿꼿한 자세를 누그러뜨리는 일이 없었다. 더구나 어려운 형편을 내색하는 일도 없었다. 신문사에서 팔리지 않는 작품을 가지고 다른 신문사로 가는 동안 우리 셋은 새로이 맺은 우정과 시에 취하여 다른 것은 다 잊고 이야기에 열중하였다. --- p.109 나는 젊었을 무렵 직장 관계로 그 골짜기에 출장을 나가곤 했다. 산골로 산골로 기어드는 외갈래 소로길을 따라 들어가면 닥나무를 벗겨 백지를 뜨는 것으로 유일한 생업을 삼는 가난한 마을이 골짝마다 뜸뜸이 몇 집씩 흩어져 있었다. 이른 봄날 그 소로길에는 온통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벌건 진달래꽃 사태를 이룬 골짝과 길에 일렁거려 산이 흔들릴 듯했다. 그 아지랑이의 황홀감. 한 오리 한 오리에 꿈이 어려 있는 것 같았다. 아지랑이는 한 오리마다 일렁거리며 피어오르는 동안에 햇빛을 받아 빛나기도 하고 때때로 빛을 거두기도 해서 어쩌면 금실 같기도 하고 혹은 은실 같기도 했다. --- p.136 참으로 왜 생(生)이 고된 희열이 될까 보냐. 산다는 것은 한량없이 즐거운 것을. 다만 즐거움을 즐거움에서만 찾으려 하기 때문에 고된 것이다. 설핏한 불빛으로 밝혀 보라. 램프가 물고 있는 삶의 희열을, 싸락눈이 오는 길의 서운한 평안을, 그리고 헤세의 구름의 눈매가 이룩하는 조용하게 흐르는 냇물 같은 생애를. 등의자에 앉아서 생각하라. --- p.171 가늘고도 올이 고운 은실오리처럼 봄비는 내리고 있었다. 옷깃을 세우고 나는 정처 없이 걸었다. 어디로 간다는 방향이 정해 있는 것도 아니요, 어디로 가야 하는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봄 바다의 물결이 그립고 이른 봄의 숨결이 그리워 길을 떠나온 것이며, 또한 어느 곳에서나 하룻밤을 묵게 되면 이튿날은 마음 내키는 대로 길을 떠나면 되는 것이다. 나의 오른편에는 바다가 웅얼거리고 있었다. 봄 바다의 짙푸르게 영롱한 물빛. 겨울의 어둡고도 침울한 푸름이 아니다. 바다의 물빛도 봄이 되면 안으로 투명해지며 한결 윤이 흐른다. 햇빛도 고르게 반사된다. 파도 머리가 허옇게 부서지며 포말(泡沫)을 날리는 물이랑이 덮어씌우는 검은 바위도 봄이 되면 기름이 흐르는 것 같다. --- p.211-212 옛말에 군자는 대로행(大路行)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이것은 군자는 그늘진 골목길을 걷듯 마음이 외지지 않고 한편으로 기울어져 편협하지 않으며 바르게 행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도시에서 생활해도 의젓하게 대로를 걷지 못했다. 또한 군자도 되지 못했다. 늘 호젓하고도 외로운, 아침 이슬이 젖어 있는 마음의 오솔길로만 걸었다. --- p.212-213 대추나무가 밀가루를 뒤덮어 쓴 듯 하얀 꽃이 자자하게 필 무렵이다. 집집마다 황토 마당이 갈라지고 불꽃처럼 청결한 햇빛이 사방에 넘쳤다. 그 수상한 광휘, 너무나 강렬한 광도 그것은 차라리 맹목적인 광명의 세계였다. 이 눈부신 육지의 밝음을 에워싸듯 6월 바다의 생기로운 쪽빛의 깊은 투명감 속속들이 은은하게 밝은 수심의 헤아릴 수 없는 심원한 느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심상(尋常)한 일 같지 않았다. 물과 바다의 엄청난 잔치가 벌어지는 것일까, 또한 그것의 새로운 혼례 날일까. --- p.218-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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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유년의 기억을 담은 ‘고향의 풍경’
유년의 풍경은 한 시인의 문학 세계를 들여다보는 비밀스러운 통로다. 특히 목월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포착한 여러 편의 글을 읽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고성에서 태어난 그는 경주, 그중에서도 모량리를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곳에서의 10여 년 성장 기간이 그의 전체 삶에 깊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예닐곱 살의 소년은 물 불어난 개울의 징검다리 위에서 물살을 가르며 바윗가 개울 위로 치올라가는 희한한 놀이에 정신이 팔렸다. ‘이것 봐라! 이게 웬일이냐’ 싶은 알 도리 없던 동화적 환상을 꿈꿨다. 그 생생한 기억은 훗날 세상이 다 변해도 변치 않는 본질이 엄연히 있는 줄을 잊지 않게 하는 힘을 만들어 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혼자 큰집까지 가던 20리 길의 아득히 먼 여행에 지친 소년은 “엄마아, 엄마아!”를 외치며 끝없는 신작로를 걸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목마른 그 길 위에서 구름으로 우산 같은 그늘을 씌워 주었던 섭리의 손길은 그 뒤 평생을 따라오며 그때그때 쉴 그늘을 마련해 주었다. 이것이 영글어 종교적 귀의를 다룬 신앙 시편으로 묶이게 된다. ‘나는 달빛 속에서 자랐다’며「달과 고무신」의 서두는 시작된다. 그중에서도 달빛 속에 하얗게 떠오르는 분황사 탑의 묘사가 압권이다. 저녁 무렵 집을 나서 숲머리 마을로 갈 때 둥근 보름달이 탑 꼭지에 덩그러니 얹히면 아름다운 여신이 두 손을 치켜들고 과일을 받쳐 든 형상으로 변한다. 그러자 문득 사방은 깊은 물속에 잠긴 듯 수상한 푸른색에 젖는다고 썼다. 몽환적이다. 거기에는 달리기 시합을 위해 그 귀한 고무신을 길섶에 벗어 두었다가 하루 만에 잃어버리고 만 비애의 기억이 함께 묻어 있다. 이 달빛의 기억 또한 평생 그를 따라다닌 듯 청년기에 주문처럼 떠올린 “달빛에 목선(木船) 가듯”이나 “구름에 달 가듯이”가 다 이 푸른 달빛의 인상에서 나온 것인 줄로 짐작한다. 경주는 목월 문학의 탯줄이다. 바다가 멀지 않지만 바다 구경은 꿈도 꾸지 못한 소년, 신비의 바다를 향한 꿈은 사무친 그리움이 되어 바다는 그에게 영원히 신비스러운 남빛 호수로 남아 있다. 한편 처음 본 안창남의 비행기는 초등학교 소년에게 산 너머 넓은 세계에 대한 동경을 심었다. 그것은 뒤에 지상을 굽어보는 천상의 눈이 되어 쓰라린 삶 속에서 갈 길을 비추는 구원의 눈길이 되었다. 어머니는 “얘는 춘 줄도 모르나베” 하며 아버지의 헌 명주옷을 뜯어 바지저고리 안감으로 받쳐 주셨다. 그것은 깊은 사랑으로 그의 마음속에 스며들었고, “당장 벗어라” 하는 할아버지의 불벼락은 자녀가 한 그루 관목으로 실팍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어버이의 준엄한 인생관으로 자신의 삶 속에 체화되었다. 경주의 회상 속에는 중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 생각지 않게 잡은 큼직한 잉어의 펄떡이는 생명력에 놀라 앞뒤 없이 엉엉 울며 집으로 달려오던 소년의 기억도 있다. 소년이 학창 시절을 보내고 청년이 되어 돌아와서도 경주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친구도 여인도 다방도 없는 천애의 유배지 같은 황량한 고도(古都)에서 20대의 걷잡을 수 없는 청춘의 시절을 보냈다. “누가 나를 사랑하노?” 하던 벗 김동리마저 떠난 뒤 은은히 흔들리는 강 나룻배 같은 심정으로 잠들지 않는 감정의 일렁임을 견디던 경주는 처절한 외로움의 기억뿐이었다. 수정남산(水晶南山)의 그늘진 골짜기와 이슬 자욱한 야심한 반월성, 풀이 욱은 왕릉의 오솔길을 배회하며 그는 달빛이 출렁이는 망망대해를 끝없이 떠가는 한 척의 목선 위에 올라탄 고독한 존재의 슬픔을 시심 속에 깊이 새겼다. 시내서 첨성대로 걸어 계림을 지나 반월성 터로 접어든다. 그 옆 수정남산을 바라보며 문내를 거쳐 안압지로 빠져나와 쓰러져 누운 황룡사의 황량한 들판과 공주의 비련이 전해 오는 임해전의 흩어진 주춧돌 앞에서 잠시 고달픈 다리를 쉴 때 그는 들판 가득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았다. 분황사까지 내처 걸어 그곳 길가 주막에서 탁주 한 사발로 목을 축이고 그사이 저문 문밖을 거나하게 바라본다. 어둠에 어리는 석탑의 빛깔과 그 너머의 감청빛 밤하늘, 눈자위가 풀린 듯한 연녹색 봄 비단 같은 것이 바로 경주의 정서라고 그는 규정했다. 당시(唐詩)를 읽으며 봄날 길가에서 익어 가는 사랑을 꿈꾸던 시절의 이야기다. 제2부―문청 시절과 데뷔 이래 자신의 문학적 편력을 정리한 ‘나의 문학 여정’ 목월은 자신의 ‘문학적 자서전’에 해당할 글을 많이 남겼다. 난생처음 부모 품을 떠난 소년의 애절한 고향 생각 속에서 그는 시에 대한 갈망을 처음으로 느꼈다. 철철이 변하는 고향의 모습을 언어로 포획할 수 있다는 꿈은 가슴을 벌름거리게 할 만큼 강렬했다. 그는 계성중학교 때 이미 시인이란 별명을 가졌고, 그것은 그의 평생을 따라다닌 관사(冠詞)였다. 열아홉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금융조합 서기가 되어 경주로 돌아와 낮에는 전표 더미를 놓고 주판알을 튕기고 밤에는 고도(古都)의 품 안을 배회하며 단지 쓸쓸하다는 표현을 넘어서는 우주적 고독을 품었다. 하도 쓸쓸해 쓴 시가 『문장』지에 추천되자 절망적 고독은 비로소 충만한 기운을 띠게 되었다. 이 모습을 조지훈은 “시로 말미암아 청춘이 병들었더니, 시로써 다시 뜻이 서게 되었구나” 하고 기뻐해 주었다. 그 지훈과는 스물셋 청춘의 절정에서 만났다. 목 안에 감기는 엷은 갈증으로 영혼이 여위어 가는 고독감에 배만 고프던 그는 언어마저 빼앗긴 절망의 환경을 향토적 세계에 대한 애착으로 버텨 나갔다. 어느 날 일면식 없던 지훈의 편지가 경주로 도착하고 목월이 다시 “경주박물관에는 지금 노오란 산수유 꽃이 한창입니다. 늘 외롭게 가서 보곤 하던 싸늘한 옥적(玉笛)을 마음속에 그리던 임과 함께 볼 수 있는 감격을 지금부터 기다리겠습니다”라는 답장을 보냈을 때, 고여 있던 시간이 보석처럼 반짝이며 출렁댔다. 얼마 후 지훈이 장발을 휘날리며 경주 건천역에 내려서고 목월은 그때 깃대에 자기 이름을 써서 흔들며 그를 맞이했다. 두 사람이 처음 해후하는 광경은 눈물겹다. 그날 밤 어두운 여관방 불빛 아래서 “꾹구구구 비둘기야, 구구우꾹 비둘기야”를 수줍게 보여 주던 목월의 시를 받아 들고 경북 영양으로 간 지훈이 다시 「낙화」를 보내오고 「완화삼」을 보내왔다. 이에 화답으로 「나그네」가 다시 건너가면서 긴 하소연의 5년이 지나고야 비로소 해방이 왔다. 1946년 2월, 기차를 17시간이나 타고 서울에 도착한 목월은 영보 빌딩 을유문화사로 박두진을 찾아가 처음 만난다. 이른 아침 출근길에 목월이 출판사 편집실로 막 들어섰을 때 중간쯤의 사원 한 사람이 씩 웃으며 일어났다. 두 사람은 대뜸 서로 알아보고 웃으며 손을 잡아 흔들었다. 목월의 말대로 학 같던 두진과의 첫 만남 장면도 퍽 아름답다. 그 우정을 기념하여 두 사람은 지훈의 집을 찾고, 마침내 세 사람의 시는 ‘청록집’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어 해방 후 첫 개인 시집의 영예를 안고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기축을 열었다. 이 시집 출간기념회에 세 사람을 『문장』지에 추천했던 정지용을 초대했을 때 해방 후 좌익 쪽에 기운 그는 그 초대를 거절했다. 곡절 끝에 맥줏집에서 만나 책을 증정하자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던 지용이 어색함을 얼버무리려 목월의 「나그네」를 낭독하다 무릎을 치며 칭찬하고는 “내가 호랑이 새끼를 길렀어” 하던 장면은 당시 문단 이면사의 또렷한 증언으로도 인상 깊다. 청록파 세 사람 중에서 지용이 가장 아꼈던 시인은 단연 목월이었다. 목월의 초기 시에는 지용의 그림자가 자주 얼비친다. 청록파 세 사람은 개성이 저마다 달랐고 특별히 살갑게 만나지는 않았지만 6·25 사변을 함께 나고 간난의 시절을 같이 건너면서 서로 존중하며 한결같은 우정을 이어갔다. 목월의 표현에 따르면 ‘자기대로의 성격과 개성을 지켜 얼룩지는 일 없이 20여 년 맺어 온 우정’이었다. 이 책에도 그 우정을 가늠할 몇 편의 글이 실렸다. 목월은 「자작시 해설」을 비롯해 자신이 애송한 시에 대한 해설도 많이 썼다. 그 글들 속에 시인이 그려 둔 마음의 지도도 몇 장 들어 있다. 목월은 어둡고 불안한 일제 말기에 어수룩한 천지가 그리워 세상 어디에도 없는 환상의 지도를 따로 마련해 두었다. 그곳은 태모산(太母山)을 주산 삼고 태웅산(太熊山), 구강산(九江山), 자하산(紫霞山)이 차례로 능선을 타고 늘어선 곳이다. 자하산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린 물이 낙산호(洛山湖)와 영랑호(永郞湖)로 고이고, 그 물에 방초봉(芳草峰)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방초봉 맞은편 보랏빛 자하산(紫霞山)의 아지랑이 속에는 청운사(靑雲寺)의 낡은 기와집이 있다. 태모와 대웅에서 단군 신화의 냄새가 나고 낙산호·영랑호에는 금강산과 설악산, 그리고 동해의 체취가 담겨 있다. 그것이 경주 어름까지 내려와 청노루가 뛰노는 방초봉과 선도산이 된다. 자하산 청운사의 푸른 산빛과 구강산의 맑은 물빛 속에서는 송홧가루가 날리고 윤사월의 꾀꼬리가 울며 암노루가 흐르는 구름에 눈을 씻고 아지랑이는 또 열두 고개를 고물고물 피어서 넘어간다. 구름은 청노루의 맑은 눈에도 어리고 그 열두 구비에는 느릅나무 속잎이 파릇파릇 피어나기도 한다. 안개가 피어 강물이 되고 박꽃 같은 처녀들의 갑사댕기 남끝동이 구구대는 밤 비둘기 울음 속에 삼삼할 때도 있었다. 목월은 이 푸른빛과 보랏빛을 자신의 작품 세계에 일관되게 보이는 기본적인 색조라고 설명했다. 이 상상의 지도 한 장을 들고 그의 『청록집』과 『산도화』를 다시 읽으면 그 마음속 길의 속살들이 갈피갈피 환하게 잘 들여다보인다. 제2부의 글을 한 차례 훑으며 목월 시세계의 큰 마디들을 따라가 볼 수 있다. 제3부 ― 인간적 면모와 삶의 눈길을 따라간 ‘일상의 경이’ 가족의 일상과 삶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시선의 글들이 나직한 가락으로 이어진다. 시인의 눈길은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다가 거기서 문득 삶의 비의(秘義)를 하나씩 포착해 낸다. 이것에서 저것을 보고, 여기서 저기로 건너뛰는 비월(飛越)이 이뤄지는 현장이다. 그것은 선한 청노루의 눈에 도는 구름 같고 하얀 해으름에 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같이 맑고도 투명하다. 제1부에 실린 「교직 조끼」에서는 어릴 적 세상에서 제일가는 멋진 조끼를 저고리 위에 척 걸쳐 입고 싶었던 꿈을 얘기했다. 안타까운 열망이 다 시든 뒤에 얻어 입은 조끼는 본견과 인조견을 섞어 짠 교직물이었다. 하필이면 둘을 섞은 교직 조끼였을까? 그것이 그의 생각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자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운명적인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된다. 교수라는 산문적 생활과 시인이란 창조적 생활의 교직(交織)이 자신의 지나온 삶이었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 것이다. 생각은 한 차례 더 건너뛰어 몽상가 돈키호테의 눈과 미련한 현실주의자 산초 반차의 시선의 공존도 자신의 교직 조끼와 포개진다. 제주도의 젊은 시인이 가져온 춘란을 10여 년 꽃 한 번 못 피우고 기르다가 어느 순간 난초가 자신과 동화된 것을 깨닫는 지점도 보인다. 무심코 서가에 얹혀 있는 난초를 더듬는 눈길을 의식하면서부터다. 날카롭게 뻗은 잎새의 무한으로 드리워진 포물선에서 형언할 수 없는 적막 속에 명상에 잠긴 자신의 모진 고독과 침울한 명상을 읽고, 그를 자신의 분신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출강하는 모 대학의 휴게실이 주는 위로에 감사하며 ‘설핏한 연령’에 이르러서야 주어진 소소하나 깊은 세계의 과분한 행복을 기뻐했다. 나무 그릇에 귤 몇 개를 얹어 두고 그 귤 속에서 오만한 눈을 뜨고 세상에서 가장 충만한 자세로 도전해 오는 싱싱하고 팽창한 생명의 정수를 느끼기도 했다. 밤하늘의 성좌를 올려다보며 그는 초록 별빛 하나하나에서 마음속에 스쳐 간 무수한 슬픔의 자취들이 모습을 이루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을 먼 산마루에 오랜 밤의 넋 안에서만 자라는 한 그루의 수목이라 여겼다. 깊은 밤중의 글쓰기는 ‘내가 원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원고지 위에 내 영혼의 기도가 종소리처럼 우는 것’이라고 적기도 했다. 동해안 바닷가에서 국도를 벗어나 오솔길을 걸으며 그는 겉으로는 도시의 포장도로를 걷고 있었지만 언제나 마음의 오솔길을 따라 걸어온 자신의 평생을 되돌아보았다. 굳이 오솔길을 택해 걸으며 그 길을 소극적인 패배주의로 모는 대신 발등을 밝히는 불빛을 따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겸허하게 걸어가는 맑은 영혼의 길이라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