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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한강변 조커
마녀 12 마트료시카 14 블랙 뮤지엄 17 먼 행성으로 돌아가는 20 길냥이 22 조커 24 엘리베이터 26 게이샤 28 폭설 30 사마귀 32 공 34 예언자 36 심야 파티 38 웨스 앤더슨 왕국 41 Perfect days 44 골목길 47 눈표범 50 고양이가 나아 52 마크 로스코 56 제2부 불국사 데이트 사진 불국사 데이트 사진 60 소나기 64 종이접기 66 유치원 앞 은행나무 68 봄날은 간다 71 옷걸이 72 슬로우 모션 74 프리지아를 보러 간다 76 봉화 할머니 79 해방촌 80 건네지 못한 말 83 베란다 풍경 86 스무 살 88 제3부 때로 외딴집이 필요하다 가을 오후 한강 산책 92 때로 외딴집이 필요하다 94 옥상 96 스노볼 98 마라톤 100 차현희 순두부 102 노래를 불렀다 105 흑석동 산책기 108 양말을 신으며 110 오르골 112 심야 토끼 114 줄여 쓰는 회고록 118 안개 122 비상벨 124 울고 싶은 날 127 수면 진입 루틴 130 오지 않는 시내버스 132 나무였던 기억 134 유목민 136 치명적 질환 138 삼중당 문고 140 잠원동 매미 143 해 설 박혜경 일상의 우울을 응시하는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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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정문 앞 2차선 도로
거대한 모터 돌고 있는 빗물 펌프장을 끼고 몇백 걸음 가서 늘 불을 밝히고 있는 세븐일레븐 편의점을 지나 던킨도너츠 앞 건널목에서 사차선 도로 신호를 기다려 빌라 단지 지나 어두컴컴한 굴다리를 건너면 언제나 거기에 있는 한강공원 새벽 세 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어느 날 견디다 못해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인기척 하나 없는 조용한 밤거리를 지나 한강에 갔다. 깊은 밤에 보면 텅 빈 영화관 같은 거대한 한강변 듬성듬성 잡초 끼어든 널따란 잔디밭에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사람이 사라지고 난 무대의 주인공처럼 토끼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달빛조차 거의 없는 캄캄한 밤이었지만 젖소 모양 얼룩무늬 등은 눈에 잘 띄었다. 바람막이 후드티를 뒤집어쓴 나를 편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깊은 밤에 한강 잔디밭에서 토끼를 마주치는 게 당혹스러웠지만 토끼는 별로 그러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빨간 눈이 아닌 검은 눈을 깜박거리며 나를 바라보았고 눕혔던 귀를 총총 세우고 고개를 약간 갸웃거렸다. 그런 다음 두 발로 우뚝 서더니 마치 가까이 오라는 듯 허공 속의 왼손을 약간 까딱거렸다. 기이한 인연의 기억은 필요한 법이지, 비어 있는 내 손이 마중을 나갔지만 내민 손을 거부하며 토끼는 뒤로 물러났고 몸을 움츠리고 옆으로 살짝 옮겨 앉더니 시선을 돌려 내가 아닌 강물 쪽을 바라보았다. 뿌연 조명 몇 개가 달린 거대한 철교와 불투명한 꿈자락 같이 겹겹이 쌓인 암갈색 강물을 토끼는 말없이 바라보았고 할 말이 없어진 나도 그 곁에 함께 앉아 마냥 바라보았다. 가끔은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그런 날이면 아무리 해도 잠을 이룰 수 없고 결코 멈출 수 없이 연달아 일어나는 생각들의 꼬리를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좀 가라앉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깊은 밤의 한강에 앉아 있게 되기도 하는 법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듯하면서 그런 일을 늘상 겪어온 듯한 표정으로 토끼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일어난 일과 일어날 일을 다 알고 지켜보는 것처럼 그 눈은 점점 더 가느다랗게 오므라들었다. 누군가 울고 있고 누군가 웃고 있고 팔을 휘두르며 싸우고, 목이 쉬도록 소리 지르고 그러다 어떤 사람은 끝끝내 그 길 위에 보이지 않고 그런 풍경들이 강물에 뒤섞여 지나가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모두 어디로들 가고 있는 것일까.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지울 수 없는 우울의 씨앗 하나가 잭의 콩나무처럼 뻗어나올 때 단숨에 밑둥을 잘라낼 도끼를 구할 수는 없을까. 뭔가 묻고 싶고 확인하고 싶었지만 대화를 거부하듯 토끼는 고개를 약간 돌렸고 오래오래 기다려야만 한다는 뜻인지 앞발로 마른 땅을 두세 번 천천히 긁었다. 지혜가 흘러넘쳐 이제 세상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노쇠한 노인과 지혜를 익힌 적이 없어 앞으로 무수히 자빠지기만 할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나란히 앉아 빗살 모양의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요다같이 웅크리고 앉은 토끼는 끝내 별 말이 없었다. 수많은 이의 아우성 같은 핏빛 기운이 먼 동쪽 하늘에 비치기 시작했다. 인간들이 세상을 점령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심야 토끼」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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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일 년의 시간을 시에 빠져 살았다. 마지막 한 편을 탈고하고 보니 겨울이 눈앞에 와 있다. 시집 한 권의 사념과 언어가 몸에서 빠져나간 허전함 때문인지 새로 나타난 겨울이 유난히 춥고 뉴스에 등장하는 세상의 모습이 낯설다. 부끄러움으로 얼룩진 이 독백들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라도 되어 줄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쓸쓸해지고 사람의 마음과 마음이 닿는 일의 어려움과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과 그래도 살아 있는 자는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얼어붙은 한강변을 걷는다.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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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적 열정은 일상의 평온함을 마구 흔들어 버릴 수 있는 긴장과 불안감으로 잠재되어 있다가 마침내 깊은 반성과 자조의 시선을 거쳐 강렬하게 표출됨으로써 세속적인 모든 것에 대해 거침없는 환멸을 쏟아낸다. 불온한 피를 계승한 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생을 바라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격한 슬픔에 눈이 멀 수도 있는 시인의 운명을 사는 자.
그의 시는 존중받지 못했던 모든 기억의 파편이다. 그러니, 지금, 시집을 펼치고, “활짝 웃던 누군가의 얼굴을/ 환각으로 맛보기로 하자, 시간을 멈추어 두고”(「스노우볼」) - 김춘식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