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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그동안 내내 그대에게 닿는 허기 4월 여자와 느티나무 얼굴을 씻다 일몰 피아니스트 거인 한나절의 생각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당신과 나의 숲 blues for nothing 스프링클러 10월 처음 온 와 본 듯한 곳 무서운 크리스마스 우리는 서로의 입을 막고 목련 아래 비를 피하다 짐을 싸다 2부 국화빵 만드는 여자 실낙원 박물관의 저녁 그 남자를 떠올려 이런 안부를 묻다 그림 맞추기 대개는 음화 같은 시민의 의무 이런 게 필요한 아침 여름의 짧은 기록 거리 비 갠 다음의 K씨 지금까지 그때부터 키 큰 나무들의 방 B. B. King 300km 물에 잠긴 아침 다산성에 대하여 3부 이름을 바꾸다 천정에 숨어 말 거는 자에게 고생대로부터의 발자국 얼룩 기미 어둡고 넓어서 침묵과 뼈 플라타너스 늘 옳고 이기는 쪽 내 이마의 청동 거울 매듭은 나비 모양으로 산책 풍향은 상관없고 벽화 습관적 실패 부지런한 난쟁이 쉽게 보내는 하루 해설 허무를 견뎌 내는 방식-조재룡(문학평론가) |
임곤택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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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지어 준 죄를 갖고 나는 태어났다
당신을 닮은 들판과 들판의 소나무를 닮는 일 나는 서두른다 허공의 거대한 활을 보았으므로 당신으로부터 낱낱이 적중하는 나는 광기 들린 나뭇잎 하나의 몸으로 어떻게 여러 번의 추락이 가능한지 물과 소금은 잠시 혀를 지나고 열 개의 바람개비가 돈다 열 개의 종잇장 같은 바람이 노인의 얼굴을 덮고 그네 뒤로 숨는다 한 조각 마른 빵에 몰리는 푸른 거품 주인이 바뀐 폐염전 바닥에 반짝거리는 빛 확인하고 싶은 사랑이 있다 ---「그대에게 닿는 허기」중에서 물속의 제 얼굴을 가지려던 그이처럼 세상은 가난하고 야윈다 땅 위에 흰 젖을 뿌리는 목련의 나라 아버지가 알려 준 것은 반드시 슬픈 것 ---「4월」중에서 너의 비극이 탐날 때 ‘네가 제일 예뻐’라고 말하지 너의 고독한 때가 탐날 때‘ 네가 제일 예뻐’라고 말하지 네가 온순해지면 아무도 너를 그리워하지 않고 우리는 거짓말을 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용서했다 짓는 대로의 낯빛으로 증오가 잦아들고 아름다운 노래는 불리지 않고도 끝내 아름다운 그런 세상으로 ---「우리는 서로의 입을 막고」중에서 간밤의 꿈을 한 조각도 줍지 않고 아침을 맞는다. 문을 두들기는 햇살의 행상行商, 동분서주의 수다스런 자투리들. 찬물 한 컵으로 어제의 나 모른 척하기, 어제와 다른 말투로 말하기. 골목은 길고 수다스럽다. 한물간 사내들이 모여 소줏값을 걱정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의 비린내. ‘기표소’라고 쓰인 휘장을 젖히고 처음 맡았던 냄새. 나란히 번호를 붙인 사생결단의 빈칸들. 어린 연인들이 좁은 골목으로, 잘 맞는 신발처럼 척척 나아갈 때, 가장 먼저 서쪽에 닿은 사람은 아침 인사의 격식을 이해한다. 방바닥에 그려지는 긴 수형도. 일몰은 너무 재빨라 한 장으로는 다 그릴 수 없지. ---「그림 맞추기」중에서 귓속말을 하고 귓속말을 듣고 싶은 때 비 올 확률 80퍼센트의 대기 빛 쪽으로 몰리다가 휘발하는 손톱 예언자의 손가락질로 빈 병을 집어 드는 누더기의 사내 애초부터 그쯤에서 그렇게 멈춘 것 같은 너의 발밑 팽팽하게 당겨진 길 녹슨 가위 ---「비 갠 다음의 K씨」중에서 플라타너스가 플라타너스 가지를 사방으로 뻗는다 오늘은 뭔가 자꾸 줄어든다 짐승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면 할 수 있는 일이란 잠시 이름을 바꾸는 것 세탁소 주인의 물음에 가명을 대고 한 생애를 약간 들어 올렸다고 믿는다 ---「이름을 바꾸다」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햇볕 바람과 이파리는 점점 무거워진다 잦아드는 그의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고 생각하는 그녀처럼 나는 있는 것을, 없다고 느낀다 ---「기미」중에서 삶에서 기묘하게 어긋나 있는 것들, 감정 그대로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들, 어느 한순간에 찾아든 저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태, 그 어떤 희망이나 심지어 절망조차 부여잡기 힘겨운 존재들의 다변적인 모습을, 마치 한 삽에 움푹 찍어 흙을 나를 때 그렇게 하듯, 그것도 “너무 빠르거나 놀랄 만큼 느리지 않게”(「10월」), 시집 안으로 옮겨다 놓는 일에 몰두할 뿐이다. (…) 연시戀詩의 형식을 차용해 온 작품들에서조차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따라서 사랑 타령이나 감정의 기울어짐이 아니다. 가령 “백 일은 붉고/백 일은 없는 내 사랑” 같은 구절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사랑의 속성이 아니라, ‘붉거나 그렇지 않은’이라는 고리타분한 이항 대립적 반복의 굴레로 하루가 채워진다는 것이며, 우리의 처절한 삶과 애절한 사랑조차 알고 보면 이렇게 “흔한 이야기(「그대에게 닿은 허기」)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해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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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시인의 말
여기는 처마 밑이거나 객석일 거다 2012년 봄 임곤택 복간본 시인의 말 무엇인가 멀어졌고 어딘가는 더 가까워졌다 아침과 나무와 반복하는 몇몇 이미지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렇게 침침한 채로 아침을 맞고 나무 사이를 걷는다 2026년 봄 임곤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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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다른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무언가를 견디면서 무언가를 찾고 있다. 그는 도처에서 중얼거리면서, 저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문득 정신을 잃어 보려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려면 그래야 할 것이다. 그는 밥 먹는 것보다 더 자주 먼 곳에 닿아 서성이고, 여기 없는 소리들을 음악보다 더 생생히 듣고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없음으로 존재하는 “당신” 또는 “사랑”의 기억에 연루되어 있지만, 사실 우리의 존재 곳곳에 이미 모르는 구멍들이 뚫려 있다. 그래서 어긋나고 부서지고 흩날리는 감각의 편린들이 시집 속에 가득하지만, 나는 “이번 세상과는 아무 관계도 나누지 않는” 운명에 무언가 관계를 걸어 보려는 골똘한 몰두의 기록으로 이 시집을 기억하게 될 것 같다. 가도 가도 모르는 길 말고 우리에게 어떤 삶의 길이 있을 것인가. 그의 목소리는 “악보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이 제 몸에 새겨진 리듬을 따라 부르는 취한 노래를 닮았다. 조금은 늦게 도착한, 하지만 오래 벼린 출발 하나를 마음에 담게 되어 반갑고 기쁘다. - 이영광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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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지상地上의 하루’라는 제목이 심심하게 들렸다. 그런데 시편들을 읽다 보니 그것이 유일하고 맞춤한 시집 타이틀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임곤택은 어젯밤에서 시작하여 오늘 새벽을 맞고 아침 오전 정오 하오 일몰 저녁 밤으로 흘러가 결국 내일에 이르는 상상적 과정을 일관된 서사 충동으로 그려 낸다. 일상의 범용하고도 단조로운 되풀이 속에서 비루하고도 소중한 삶의 속성을 ‘하루’의 은유로 들려주는 것이다. 물론 그 안에는 “아침이 다시/아침이 되는 일의 어려움”(「그대에게 닿는 허기」)을 말하는 시인의 아픈 고백이 번져 있기도 하지만, 우리는 “아침을 맞는 것으로 하루의 의무”(「시민의 의무」)를 다하려는 이 외로된 시인의 절제된 언어를 따라 하루를 동행함으로써 삶의 궁극적 긍정에 가닿는다. 이처럼 하루치의 희망과 고독으로 “한 생애를 약간 들어 올렸다고 믿는”(「이름을 바꾸다」) 그에게, 이제는 우리가 말해 줄 수 있으리라. “괜찮다, 당신은/정말 그런 하루를 보냈다면”(「쉽게 보내는 하루」). 그 지상至上의 하루가 “굼실거리는 천만 개의 이야기”(「그동안 내내」)를 품은 채 묵묵하게, 살풋하게, 때로는 글썽이며, 시집 곳곳에서 느런히 펼쳐져 간다.
- 유성호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