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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발간사
김성희 |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12 기획의 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화가’를 다시 읽다 배원정 |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28 I. 배우되 갇히지 않다: 1930년대-1950년대 84 논고 1 오색의 신명으로 창출한 자연: 이대원의 창작과 미학 홍선표 |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명예교수, (사)한국미술연구소 이사장 96 ARCHIVE 1 경성제2고보와 사토 구니오 104 ARCHIVE 2 2·9 동인회와 신상회新象會 107 ARCHIVE 3 이대원의 번역과 민예 인식 김경연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강사 110 II. 이어가되 휩쓸리지 않다: 1950년대-1970년대 186 논고 2 이대원, 전통의 전유와 ‘한국적 회화’ 모색: 1960-1970년대 작품을 중심으로 김이순 | 미술사가, 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교수 194 ARCHIVE 4 반도화랑과 이대원 정무정 | 덕성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ARCHIVE 5 이대원이 소장한 민예품 208 ARCHIVE 6 이대원이 사랑한 조선의 목공예 김미라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212 III. 쌓아올리니 자유롭다: 1970년대-2000년대 280 논고 3 전통회화와 민예를 품은 색선·색점·색면의 회화: 이대원의 1970-1985년 작품을 중심으로 최경현 | 천안시립미술관장 286 IV.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332 논고 4 예술의 즐거움, 이대원의 회화를 다시 보며 이민수 | 한국외국어대학교 미네르바대학 강사 338 작가 연보 358 영문 논고 |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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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이대원의 회화는 화사한 화면의 인상 때문에 지나치게 쉽게 피상적으로 이해되어 온 측면이 있다. 화사한 색채라는 인상에 기대어, 그가 무엇을 딛고 그 환한 화면에 이르렀는지 깊이 들여다본 경우는 드물었다. 이번 전시는 그 밝음의 이면에 놓인 오랜 관찰과 반복, 축적과 절제의 시간을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한 시간을 거쳐 환하고 자유로운 화면에 도달한 이대원의 회화를 설명하는 데,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한 비평적 언어로 남는다.
배원정,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화가’를 다시 읽다」 ---p.26 이대원이 노년기에 자주 언술했던 “유아기에 자연의 경이로움에 처음 눈뜨게” 하고 “자신의 우주”가 된 농원의 “산과 나무와 흙 속에서 우러나오는 무한한 생명력에 압도”되어 50대부터 이를 표출하는 데 집중한다. 그가 초기의 사조적 양식과, 중기의 국가와 전통 이데올로기에서 50세 이후에 자연으로 돌아와 계절의 무궁한 조화와 창 생의 생명력을 찬미하며 창출한 오색 풍경화는 첨단 과학 문명에 얽매인 우리들 삶에 탄성을 자아내며 감동을 준다. 홍선표, 「오색의 신명으로 창출한 자연: 이대원의 창작과 미학」 ---p.92 이대원의 작품세계는 민예와의 긴밀한 연결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 가운데 야나기 무네요시와 아사카와 다쿠미를 잇는 두 권의 번역은 단순한 언어의 번역이 아니었다. 야나기의 저술을 번역하면서 이대원은 식민지기에 형성된 조선미술론을 현재의 한국적 맥락에서 비판적으로 읽고 재구성했다. 반면 아카사와를 번역하면서는 조선 민예와 생활문화에 대한 공감과 보편적 가치를 다시 확인했다. 김경연, 「이대원의 번역과 민예 인식」 ---p.109 이대원은 한국적인 회화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전통의 전유가 필수적이라고 보 았다. 그가 주목한 대상은 목공예, 도자기, 자수, 민화, 사군자, 산수화 등 조선시대의 조형 문화였다. 그의 회화는 서구 근대미술의 수용에서 출발하였지만, 이후 전통적 조형 요소를 변형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독자적인 ‘한국적 회화’로 나아갔다. 따라서 이대원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왜 전통의 전유를 필요로 했는지, 그리고 어떠한 전통을 어떠한 방식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조형 언어로 전환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이순, 「이대원, 전통의 전유와 ‘한국적 회화’ 모색: 1960-1970년대 작품을 중심으로」 ---p.186 반도화랑의 운영을 맡은 이대원은 판화, 조각, 공예 등으로 판매 범위를 확대하고, 작가별 가격 차등화와 수수료 인상 등의 조치를 통해 자립 운영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앞서 아시아 재단이 반도화랑의 적자 원인으로 꼽은 문제점에 대한 맞춤형 조치였다. 그 결과 작품 판매량이 점진적으로 증가하여 1962년에는 총 330점, 1963년에는 총 335점이 판매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정무정, 「반도화랑과 이대원」 ---p.197 짧지만 담담한 그의 글 속에 ‘우리 것의 우수성을 발견하고 사랑해야 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은 소나무로 만든 목물木物일 것이다.’라는 글귀가 등장한다. 이를 통해 그가 목공예품을 특히 애장하였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에게 전통 목공예품은 단순한 수집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것으로서 적극적으로 애호하고 오늘날의 생활에서도 가까이 두고 사용해야 할 특별한 대상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김미라, 「이대원이 사랑한 조선의 목공예」 ---p.208 1970-1985년에 제작된 이대원의 작품은 빨강·노랑·파랑의 삼원색을 중심으로, 주황·녹색의 보색을 적극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때로는 주홍·분홍·옥색 같은 보색 계열로만 화면을 구성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색채의 병치는 독특한 시각적 긴장과 리듬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색채 감각은 개인적 취향에 머무르지 않고,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계 전반에서 확산된 ‘민예에 대한 재인식’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최경현, 「전통회화와 민예를 품은 색선·색점·색면의 회화: 이대원의 1970-1985년 작품을 중심으로」 ---p.282 1990년대 이후 이대원의 회화는 그의 영원한 테마인 ‘농원’에 천착해 보다 자유로운 풍경표현으로 나아간다. 이전부터 그려 온 과수원의 나무와 연못, 산, 그리고 하늘과 같은 소재로 화면을 구성하는 데는 변함이 없지만, 색채는 더욱 화려해지고 붓질은 보다 활달해졌다. 이민수, 「예술의 즐거움, 이대원의 회화를 다시 보며」 ---p.3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