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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첫 번째 서약|신화에 들어가기에 앞서 제1부 초공 본풀이 『아기씨 치맛자락 푸름 속에는』 - 자지맹왕 아기씨 연작 천문의 그 대서중|청감쥐와 호박달|자지맹왕 아기씨|늦인득이 정하님|대서|자지맹왕 아기씨의 절기록|검은 암소|아기씨 치맛자락 푸름 속에는|기울어진 십자|세 별, 삼맹두|물의 옷 제2부 이공 본풀이 『어미의 강을 건너는 아이』 - 원강아미 연작 서시-어미가 오기 전|원강아미, 흙의 발|천년장자|천년장자의 집|쇠를 씹는 짐승의 침묵|어미의 강을 건너는 아이|사라도령의 의자|꽃의 역설|꽃의 심판|원강아미의 뼈|어미의 봄잠|영등사설|제주 들개와 물질하는 꽃 제3부 삼공 본풀이 『돌 속의 금』 - 감은장 아기씨 연작 길에서 만난 두 사람|배꼽|출가|마판 문턱에서|돌 속의 금|돌 속의 금 Ⅱ|돌 속의 금 Ⅲ|물밥|검은여 물풀|감은장 아기씨 별편 신화가 지나간 자리 깨진 항아리를 위한 변명|큰 쇠는 서글프다|어떤 신발 보시|제주 할망 농사일기|남편 바람도 시절 탓|영혼의 채권자와 협상|촌 하르방과 서울 시계|선인장|화장|삭|화산도 억새|겨울 여백|나무처럼 기다리다|애월 작품에 부쳐 잠든 몸 곁에서 다시 열리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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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장아기는 제 배꼽을 자주 만졌다.
언니들이 조 이삭 꺾어 소꿉놀이할 때도, 어멍이 솥뚜껑을 열어 조밥 냄새를 풀어놓을 때도, 저고리 밑으로 손을 넣어 몸 한가운데 오목한 자리를 더듬었다. 누가 파놓았을까. 물 한 방울 받아먹으라고 이 작은 그릇을 몸에 남겨놓았을까. 처음에는 어멍에게서 떨어져 나올 때 미처 아물지 못한 상처인 줄 알았다. 밤마다 손가락을 얹어보면 아프지 않고 따뜻했다. 제 몸이 아직 제 몸이 아니었을 때, 입도 없이 물을 마시고 손도 없이 피를 받아먹던 길. - 배꼽은 탯줄 떨어진 자리여. 어멍이 말했다. 떨어진 자리. 감은장아기는 그 말을 오래 만졌다. 비가 왔다. 마당을 지나간 소의 발자국마다 오목한 물그릇이 남았다. 아기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구름 한 점이 물속을 지나고 새 한 마리가 거꾸로 날아갔다. 손가락을 대자 하늘이 둥글게 흔들렸다. 그날부터 오목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먹돌에 고인 빗물, 밤이슬을 받아놓은 풀잎의 골. 빈 줄 알았던 곳에 무언가 와 머물렀다. 어느 밤 배꼽에 손가락을 얹자 먼 데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어멍 몸에서 건너오던 물인지, 아직 오지 않은 데서 저를 부르는 물인지. 하늘에 둥근 달 하나, 마당 물그릇에도 둥근 달 하나. 아기는 저고리를 들추어 내려다보았다. 하늘의 달은 멀고 물속의 달은 손대면 부서지는데 이 작은 그릇은 어디를 가도 따라왔다. 집 안에서 어멍이 불렀다. 감은장아기는 대답하며 일어섰다. 손바닥 아래 오목한 자리만 조금 전보다 깊어진 것 같았다. --- pp.14-150 「배꼽」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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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아기씨 치맛자락 푸름 속에는’은 초공 본풀이의 자지맹왕 아기씨를 중심으로 한 여성이 통과한 시간을 그린다. 닫힌 방에 갇혀 지내던 아기씨가 임신하고 집에서 쫓겨나 아이들을 낳기까지의 과정을 절기와 천문의 흐름에 겹쳐 놓는다. 「자지맹왕 아기씨의 절기록」에서는 계절의 변화가 한 여성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감각으로 되살아나고, 「아기씨 치맛자락 푸름 속에는」에서는 푸른 치맛자락이 생명을 품고 기르는 넉넉한 공간으로 확장된다.
제2부 ‘어미의 강을 건너는 아이’는 이공 본풀이의 원강아미와 그 아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 놓인 이별의 강, 아버지를 찾아가는 여정, 서천꽃밭에서의 죽음과 소생을 통해 모성과 상실, 회복의 의미를 되묻는다. 특히 「꽃의 역설」과 「꽃의 심판」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꽃과 살리는 꽃이 함께 자라는 세계를 보여주고, 「원강아미의 뼈」와 「어미의 봄잠」에서는 흩어진 어머니의 몸을 되살리는 아이의 기다림을 그린다. 시집의 제목인 ‘어미의 잠’은 이처럼 오랜 고통 끝에 쓰러진 어머니의 쉼이자, 다시 깨어날 생명을 기다리는 시간과 맞닿아 있다. 제3부 ‘돌 속의 금’에서는 삼공 본풀이의 감은장 아기씨를 통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과정을 탐색한다. 누구 덕으로 사느냐는 부모의 물음에 자신의 몸과 삶의 몫을 말한 감은장은 집에서 쫓겨나지만, 그 떠남은 스스로의 운명을 찾아가는 첫걸음이 된다. 시인은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서야 할 자리를 알아보고 스스로 발을 내딛는 일에 주목한다. 별편 ‘신화가 지나간 자리’에서는 시선을 오늘의 제주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으로 옮긴다. 농사짓는 할망과 서울에 간 하르방, 떠난 이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제주 특유의 자연과 생활의 정서가 스며 있다. 앞선 세 연작을 관통하던 생명과 돌봄, 기다림과 떠남의 문제는 이곳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연결된다. 이 시집은 본풀이를 전하거나 해설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시인은 여러 채록본을 읽고 천문과 역법, 풍수의 의미를 탐색하면서 제주어의 말소리와 인물의 이름, 절기와 방위에 새로운 시적 해석을 겹쳐 놓는다. 작품마다 필요한 풀이를 덧붙여 독자가 낯선 신화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 신화의 인물들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불러내며, 누가 누구를 일으키고 누구의 손을 붙들어 다시 살아가는가를 묻는 시집이다. · 작품에 부쳐(작가의 말) 중에서 닫힌 방에서 무릎을 당기는 아기씨, 아이를 떠나보내고 남은 어미, 제 뜻을 말했다는 이유로 문밖에 서게 된 딸. 이 시들을 쓰는 동안 나는 그들이 몸을 내려놓는 자리와 다시 일어서는 순간에 오래 머물렀다. 누군가의 손을 붙들어야 일어설 수 있고, 먼 길을 걸은 뒤에는 잠시 기대어 숨을 고를 곳도 필요했다. 자지맹왕 아기씨와 원강아미, 감은장 아기씨의 이야기를 한 권에 모으면서 돌아본 것도 그 손과 자리였다. 누가 누구를 일으키는가. 품에 들었던 사람은 어디로 떠나며, 떠났던 사람은 누구를 데리러 돌아오는가. 세 연작에서 별편 「신화가 지나간 자리」에 이르기까지 그 물음이 인물들의 걸음을 따라갔다. 세 본풀이를 지나 별편에 이르면 신들의 이름은 조금씩 뒤로 물러난다. 대신 제주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몸과 말이 앞으로 나온다. 농사짓는 할망, 서울에 간 하르방, 떠난 사람을 기억하는 이와 기다리는 사람이 그 자리를 잇는다. 그러나 신화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돌과 바람, 바다와 달, 기다림과 떠남 속에 앞의 연작에서 지나온 흔적들이 남아 있다. 신들의 이야기를 따라 걸었던 길이 사람들의 하루와 맞닿는다. 이 시집을 쓰면서 나는 자주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왔다. 누가 누구를 일으키는가. 어미는 아이에게 몸을 내어주고, 아이는 그 품을 떠난다. 어떤 아이는 돌아와 어미를 일으키고, 어떤 아이는 받은 온기로 다른 이의 시린 발을 덥힌다. 나는 오래 버틴 어미에게도 잠들 시간이 있기를 바랐다. 그 곁에서 누군가 깨어 있고, 눈을 떴을 때 붙잡을 손이 있기를. 『어미의 잠』은 그 곁에 오래 머물러 본 기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