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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譯註叢書를 발간하면서
凡 例 參考書目 唐大家韓文公文抄 卷12 碑銘 01. 烏氏廟碑銘 烏氏의 廟碑銘 / 15 02. 袁氏先廟碑 袁氏의 先人廟碑 / 20 03. 魏博節度觀察使沂國公先廟碑銘 魏博節度觀察使 沂國公의 先人廟碑銘 / 29 04. 柳州羅池廟碑 柳州의 羅池廟碑 / 36 05. 唐故相權公墓碑 唐故 宰相 權公의 墓碑 / 43 06. 滎陽鄭公神道碑 滎陽 사람 鄭公의 神道碑 / 52 07. 太原王公神道碑銘 太原 사람 王公의 神道碑銘 / 57 08. 贈太尉許國公神道碑銘 太尉에 추증된 許國公의 神道碑銘 / 67 09. 唐故中散大夫少府監胡良公墓神道碑 唐故 中散大夫 少府監 胡良公墓의 神道碑 / 83 唐大家韓文公文抄 卷13 墓誌銘 01. 尙書左僕射右龍武軍統軍劉公墓誌銘 尙書左僕射 右龍武軍統軍 劉公의 墓誌銘 / 88 02. 鳳翔?州節度使李公墓誌銘 鳳翔?州節度使 李公의 墓誌銘 / 94 03. 太原王公墓誌銘 太原 사람 王公의 墓誌銘 / 101 04. 唐故昭武校尉守左金吾衛將軍李公墓誌銘 唐故 昭武校尉 守左金吾衛將軍 李公의 墓誌銘 / 106 05. 唐故朝散大夫商州刺史除名徙封州董府君墓誌銘 唐故 朝散大夫 商州刺史로서 除名되어 封州로 유배된 董府君의 墓誌銘 / 110 06. 唐故朝散大夫越州刺史薛公墓誌銘 唐故 朝散大夫 越州刺史 薛公의 墓誌銘 / 115 07. 唐故江西觀察使韋公墓誌銘 唐故 江西觀察使 韋公의 墓誌銘 / 121 唐大家韓文公文抄 卷14 墓誌銘 目次 01. 唐故監察御史衛府君墓誌銘 唐故 監察御史 衛府君의 墓誌銘 / 132 02. 尙書左丞孔公墓誌銘 尙書左丞 孔公의 墓誌銘 / 136 03. 集賢院校理石君墓誌銘 集賢院校理 石君의 墓誌銘 / 146 04. 尙書庫部郞中鄭君墓誌銘 尙書 庫部郎中 鄭君의 墓誌銘 / 148 05. 河南少尹裴君墓誌銘 河南少尹 裴君의 墓誌銘 / 153 06. 給事中淸河張君墓誌銘 給事中 淸河 사람 張君의 墓誌銘 / 157 07. 考功員外盧君墓銘 考功員外 盧君의 墓銘 / 162 08. 司法參軍李君墓誌銘 司法參軍 李君의 墓誌銘 / 167 09. 孔司勳墓誌銘 孔司勳의 墓誌銘 / 170 10. 李元賓墓銘 李元賓의 墓銘 / 175 11. 試大理評事王君墓誌銘 試大理評事 王君의 墓誌銘 / 177 唐大家韓文公文抄 卷15 墓誌·碣·銘 01. 殿中少監馬君墓誌銘 殿中少監 馬君의 墓誌銘 / 186 02. 殿中侍御史李君墓誌銘 殿中侍御史 李君의 墓誌銘 / 189 03. 太學博士李君墓誌銘 太學博士 李君의 墓誌銘 / 194 04. 國子助敎河東薛君墓誌銘 國子助敎 河東 薛君의 墓誌銘 / 199 05. 國子司業竇公墓誌銘 國子司業 竇公의 墓誌銘 / 202 06. 襄陽盧丞墓誌銘 襄陽 盧縣丞의 墓誌銘 / 207 07. 河南令張君墓誌銘 河南縣令 張君의 墓誌銘 / 209 08. 登封縣尉盧殷墓誌銘 登封縣尉 盧殷의 墓誌銘 / 214 09. 唐故河南府王屋縣尉畢君墓誌銘 唐故 河南府 王屋縣尉 畢君의 墓誌銘 / 216 10. 柳子厚墓誌銘 柳子厚의 墓誌銘 / 220 11. 施先生墓銘 施先生의 墓銘 / 227 12. 南陽樊紹述墓誌銘 南陽 사람 樊紹述의 墓誌銘 / 232 13. 貞曜先生墓誌銘 貞曜先生의 墓誌銘 / 236 14. 女?壙銘 女?의 壙銘(墓誌銘) / 242 15. 唐河中府法曹張君墓碣銘 唐나라 河中府 法曹參軍 張君의 墓碣銘 / 244 16. 淸河郡公房公墓碣銘 淸河郡公 房公의 墓碣銘 / 247 17. ?硯銘 벼루를 묻으며 쓴 銘 / 252 唐大家韓文公文抄 卷16 哀辭·祭文·行狀 01. 獨孤申叔哀辭 獨孤申叔을 위한 哀辭 / 254 02. 歐陽生哀辭 歐陽生을 위한 哀辭 / 256 03. 祭田橫墓文 田橫의 墓에 제사 지내는 글 / 263 04. 祭?魚文 ?魚를 제사 지내는 글 / 265 05. 祭柳子厚文 柳子厚를 제사 지내는 글 / 269 06. 祭河南張員外文 河南縣令 張員外를 제사 지내는 글 / 272 07. 祭十二郞文 十二郞을 제사 지내는 글 / 281 08. 贈太傅董公行狀 太傅에 추증된 董公의 行狀 / 288 [附錄] 1. 韓愈詩文年譜 / 303 2. 參考圖版 目錄 및 出處 / 315 3. ≪唐宋八大家文? 韓愈≫ 總目次 / 316 |
鄭太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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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장가들, 한유韓愈에 빠지다
통일신라 시기 문집인 최치원崔致遠의 『계원필경桂苑筆耕』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문집으로 평가받는데, 여기에도 한유의 문장이 언급되고 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문집은 대부분 조선시대 작품들이다. 그 문집 중에 한유의 문장을 인용하지 않거나 그 문장을 논평하지 않은 것을 찾기 힘들 정도이다. 한유의 문장을 배웠다고 한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시집詩集 속에 인용된 한유의 문장들, 한유를 시詩의 대현大賢으로 평가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당唐나라 시기 묘명墓銘 중에 한퇴지韓退之(한유)만큼 뛰어난 이는 없다고 한 성호星湖 이익李瀷 등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가들은 한유의 문장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한유의 글을 읽고 평을 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문장을 자신의 문장으로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선비들은 어려서부터 한유의 문장을 반드시 읽어야 했다. 율곡은 “지금 문장을 짓는 데에 대강 문리文理를 이룬 것 역시 특별히 공부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일찍이 한유의 문장과 『고문진보古文眞寶』 및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의 대문을 읽었을 뿐이다.” 하였다. 또 조선 중기 문장가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지은 「내가 평생 동안 학습한 내력」이란 글에 “16세 때에 장인어른에게서 창려昌黎(한유)의 글 수십 편을 배웠는데,……이따금씩 이를 모방하여 글을 지어보곤 하였다.……23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이 무렵 관각館閣의 과시課試에서 지은 산문散文과 부사賦詞가 번번이 우등優等으로 뽑히곤 하였는데, 글을 지을 때 한유와 유종원柳宗元의 솜씨를 꽤 터득하면서 진부하거나 쓸데없는 표현은 용납하지를 않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한유, 문체혁명文體革命의 시작 한유는 자字가 퇴지退之로, 자신이 창려昌黎의 망족望族이라고 여겨서 스스로 ‘창려 한유’로 칭하였는데, 후대 사람들이 그를 한창려로 칭하였다. 그는 안사安史의 난으로 쇠퇴기에 접어든 당唐나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능하였으나, 과거에 3차례 낙방한 후에야 급제할 수 있었다. 당시는 귀족의 시대로 가문이 뛰어나지 못하면 높은 직위에 발탁되기 힘들었다. 이 때문에 지방 절도사節度使의 막하에서 종사하였으며, 중앙에 진출하고서도 그의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여러 번 벼슬이 깎이고 유배를 당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문장에 큰 자부심을 가졌다. 무령절도사武寧節度史 장건봉張建封의 막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새벽에 출근하여 밤늦게 퇴근한다는 근무조건을 보고, 장건봉에게 ‘새벽 4, 5시에 출근했다가 오전 8, 9시에 퇴근하고, 오후 4, 5시에 출근했다가 오후 6, 7시에 퇴근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도 직무를 폐기하지 않을 것입니다.’(「상장복야서上張僕射書」)라고 편지를 올렸는데, 이는 자신의 문재文才를 자부하는 글이다. 또 “하늘이 이 백성에게 노불老佛의 허황됨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나의 수명을 기약할 수 없겠으나, 만약 하늘이 이 백성들에게 알리고 싶어 한다면 알릴 사람이 내가 아니고 그 누구이겠소.”(「중답장적서重答張籍書」) 하였으니, 그 스스로 학문에 자부함을 볼 수 있다. 스스로 자부한 글마저도 명문이 되어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수록되었다. 그의 산문은 당시 중국 문단의 혁명이요, 이는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즉 ‘고문운동’이라 불리는 문체변혁의 시발점이 바로 한유이다. 한유는 당시 형식미形式美만을 강조한 사육변려문四六騈儷文에 반대하여 진한秦漢 이전의 고문古文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 유가사상을 바탕으로 한 간결하고 뜻을 충실히 전달하는 문장을 짓고자 하였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도교와 불교를 사상적 철학적으로 비판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였다. 그의 문장에는 맹자孟子에서 끊어진 유학儒學의 도를 자신이 계승한다는 자부심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의 문체와 사상은 면면이 주희朱熹에게 이어져 성리학을 탄생시키게 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한유가 말하지 않았던가. “무릇 사물이 그 화평함을 얻지 못하면 운다.”(「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 하늘은 그에게 시련을 주어 그의 문장을 통해 그를 울어 젖히게 하였으니, 그 울음소리는 커다란 우레 소리로 변하여 후대의 문장을 변화시켰고, 그 문장의 아름다운 여운은 지금까지도 울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