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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차양/ 소나기 무시로 지나는 오후/ 평일/ 붉은 기억의 얼룩/ 함구/ 권태/ 재개발지역/ 늦은 인사 - 나팔꽃에게/ 옥신각신/ 바깥에 갇히다/ 경계에서/ 소리, 손끝으로 듣다-임선빈 악기장/ 짱짱한 목숨/ 난기류 제2부 채송화/ 투명한 슬픔/ 청탁 원고/ 생의 고삐/ 봄 허기/ 산수유 필 무렵/ 너머/ 삼척2/ 막 버스/ 그, 짜안함/ 그리 오래지 않은/ 귀벌레/ BGM/ 가만히 제3부 사는 법/ 이별 후/ 피뢰침/ 낙우송落羽松/ 물고기와 아이들-이중섭展에서/ 모일某日/ 편두통- 변제의 방식/ 파슈파티낫 사원에서/ 산딸나무꽃/ 찻잔의 칼날/ 갑사 당간지주에 기대어/ 껌딱지/ 시인 K/ 몰의 연대 제4부 낡은 시집 한 귀퉁이에 적다/ 곡우살이/ 어떤 동행/ 기억의 비무장지대/ 고요한 잠 거룩한 잠/ 목련 - 큰엄마에게/ 슬픈 관능/ 견본/ 백야/ 아름다운 연착延着/ 칸나/ 대비/ 견고한 잠 |
김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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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낙비 가려주던 양지다방 빛바랜 차양의 배가 불룩해졌습니다 손차양을 하고 나온 마담언니 불룩하게 내려앉은 배꼽자리에 장대 꽂아 고인 빗물 땅바닥에 메다꽂습니다 주르륵, 처진 배 한번 더 추어올리니 경쾌한 함성 내지르며 투신하는 빗물들 이제야 가뿐해졌다는 듯 잠시 수조였던 차양 후줄근히 늘어진 자리에 당글당글 햇빛들 고이기 시작합니다
온몸으로 뙤약볕 가려주시던 낡은 가죽부대, 아버지 몸에 차오른 복수를 빼는 날입니다 --- 「차양」중에서 소음으로 소음의 입 틀어막기도 하는 것인데 빗줄기 땅바닥 세차게 두드려대며 세상의 소리 다 집어 삼키는 것인데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듯 빗소리 멈추고 나뭇가지 속 은닉한 매미들 잔뜩 벼른 목청 돋워 한바탕 울음으로 세상 뒤흔들어 놓는 것인데 왕성하던 떼창도 주춤하고 빗줄기 땅바닥에 내리꽂히며 사위에 쌀뜨물 같은 희부연 안개 풀어 놓는 것인데 시나브로 빗소리 잦아들고 다시 이어지는 매미들 다투어 꺼내놓은 울음 소리에 소리를 덧대어 우렁차기도 한 것인데 겹치지도 엉키지도 않으며 빗줄기는 빗줄기대로 매미는 매미대로 소요의 배턴을 주거니 받거니 허공의 곳간 채웠다간 비우고 채웠다간 비우고 물기 마른 내 안의 울음들 끄집어내어 어딘가에 슬며시 얹어놓고 싶은, --- 「소나기 무시로 지나는 오후」중에서 세상의 윗목으로 밀려나 냉골에 엎뎌 살아온 그는, 지금 불의 침대에 누워 있다 불끈 솟은 굴뚝은 세상의 아랫목 향해 연신 허옇게 토악질을 해대는데 대기실 전광판에 화장 종료 사인이 켜진다 유리벽 너머 흰 마스크 쓴 노인 꾹 꾹 뼛조각을 빻고 있다, 마침표 찍듯 유골함 문이 닫히고 그의 마지막 페이지도 조용히 덮인다 --- 「너머」중에서 앙큼한 저것이 상복을 입었는데 제 아비 죽어 검은 상복 입었는데 해쓱한 낯빛과 짓무른 눈가를 보면 아비의 죽음 자명한데 훤하게 잘난 제 아비는 사시사철 검정양복 차려입은 무일푼 번화한 도심지 네거리 슬렁거리며 지나는 뭇 여인들 가슴만 콩콩 뛰게 했다는데 느지막이 태어난 저것이 아비의 맵시 그대로 빼박아 검은 상복 입은 저것이 왜 아리따워만 보이는 것이냐 스무 살의 고아 저것이 왜 관능미 설설 풍기는 것이냐 제 아비 장례의 날에 스무 살 적 제 아비 닮은 저것이 늘비한 근조 화환 곁에 서서 백치 같은 표정으로 이 앙다물었는데 영정 앞에 절 올리는 뒤태마저 검은고양이만 같아 참 하릴없이 나른한 기운 감돌게 하는데 --- 「슬픈 관능」중에서 세상은 둥글하므로 바다의 아이가 물고기를 데리고 논다 아이와 물고기와 아이와 게와 그리고 중섭이 둥글둥글 하나로 이어지고 콧수염 덥수룩한 중섭도 아이들 틈에 슬쩍 끼어들어 금세 어린아이 돼버리고 천진하게 난만하게 아이들은 물고기를 데리고 게를 데리고 중섭을 데리고 둥글게 둥글게 서로 어우러져 게와 물고기와 아이와 놀이에 빠져 시간 다 잊어 먹고 파도는 신나게 밀려왔다 쏜살같이 달아나고 세상은 둥글하므로 중섭도 놀이에 빠져 세상 시름 다 까먹고 --- 「물고기와 아이들 - 이중섭展에서」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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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무수한 어제를 뒤적여 어쭙잖은 시들을 추려 묶는다 한데 모아놓으니 어설픈 대로 살갑다 천성이지 싶은데 작고 초라한 무녀리들에게 마음 자꾸 쓰이고 눈길 먼저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두 번째다 2019년 이른 가을 채운詩공방에서 김채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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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활짝 핀 붉은 꽃을 지나서 죽음보다 더 시커먼 고통의 늪을 지나 우리의 눈앞에 거대하게 막아선 절망의 회벽 너머 사람들의 어깨를 토닥여 주는 노래가 김채운의 詩다. 그이는 정면으로 마주보면서 노래하지 않는다. 여러 다양한 각도에서 한참을 넌지시 바라보다가 끝내 뒤돌아서서 조용히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그이의 목소리는 달뜨거나 생소하지 않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하고 느끼는 소소한 감정을 절제된 언어와 단아한 운율로 노래한다. 어느 날 늦은 귀갓길에 아파트는 하염없이 높이 솟고 그 아래 걸린 반달에서 한 방울 눈물처럼 문장 하나가 똑 떨어진다. “화수분 같은 울음주머니 하나 달고 태어났는지”(「삼척2」) 그이의 시 한 구절이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져 진저리를 치다가 곧 힘을 모아 가지런히 발을 맞추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詩는 노래다. 시는 아프다는 말 대신에 내는 신음이다. - 홍성담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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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운 시의 수줍은 사투리에 흠뻑 매료되어 페이지를 넘기던 나는, 「너머」를 읽다가 창문 너머 솔나무 한 그루를 바라본다. 주위의 아파트가 묘비라면 저 나무는 도래솔이 될 것이다. 세월호 때도 그랬고, 그 후로도 김채운은 높고 낮은 무덤 주위에 그늘을 드리운 도래솔처럼 조용히 생사를 견딘다. 김지하의 말처럼 그녀는 우리 고유의 말에 흰 그늘을 드리운 시를 쓰고 있다. 그래서 「시인 K」에서는 “폐쇄병동-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유리 감옥”이라는 명구가 탄생한다. 그렇다! 현대는 ‘폐쇄병동의 시대’이다. 그러니 시인은 광기의 시를 쓰다가 죽거나, 정신의 불안을 느낀 시인은 스스로 무덤 같은 병동에 갇힌다. 우리도 그녀도 「몰의 연대」처럼 “살아서는 결코 채울 수 없는/빈칸”이다. 그녀의 「슬픈 관능」을 빌려 말하건대, 스스로 죽지 말고 ‘시인 K’는 살아라. 오늘 병승이도 죽고(哭황병승), 시도 죽고, 폐쇄병동의 시대를 살더라도. “검은 상복 입은 저것이 왜 아리따워만 보이는 것이냐”고 채운이가 우리를 유혹하더라도. - 김영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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