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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기억(記憶) 〔기억〕 명사 불안(不安)과 미안(未安)이 찍어낸 마블링과 그 이본(異本)들. ―정은영 ‘기억’ 정의 칼끝처럼 노려보는 눈빛처럼 무엇이든 그어버릴 기세처럼 밀봉된 몸속에 구겨져 있는 비밀과 사라졌지만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는 것 남아 있지만 남았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 틀린 문제는 또 틀려 아이들은 오늘도 스스로를 기쁘게 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남지은 「흉」 부분 우리는 작은 서점 앞을 걷는다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 나는 정말 작아지고 싶었어 신 하나쯤은 가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아까 그애 발 봤어? 손가락을 봤어? 얼마나 작은지 봤어? 그렇게 말하는 네 옆으로 아주 작고 새카만 개가 지나간다 여기까지 왔으니 소원이라도 빌고 가자 우리는 돌탑 위에 쌓인 돌 중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은 돌을 올린다 ―김지연 「듀얼 호라이즌」 부분 별 〔별ː〕 명사 밤에 하늘을 보는 사람이 찾으려고 하는 것.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 그러나 먼 곳에서 보면 스스로 빛을 내는지 별의 빛을 반사해서 빛을 내는지 알 수 없고 평소에 우리는 하늘에서 빛나는 거의 모든 것을 별이라고 말한다 ―성다영 ‘별’ 정의 내가 일어난 자리에 내가 누운 자국이 남아 있고 투명하다 이 말이 입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쓸데없이 오래 산다 내가 사랑하던 것들이 그 속을 떠다니다가 죽고 만 것처럼 난 아마도 오래 지속될 것이다 ―한재범 「바다가 갈라진다」 부분 부고(訃告) 〔부ː고〕 명사 아무 소식도 도착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봄밤. 모르는 고양이, 꽃, 구름, 내 뒷마당의 푸조나무, 그곳에서 영원히 사랑받을 어린이들…… 생각한다. 조용해지는 봄밤. 달라 진다. 완전히 달라진다. ―최지은 ‘부고’ 정의 눈은 언제 뜨는 것이 옳을까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신념이 생겼다 중얼거리는 사람들은 모두 열심히 마음을 묻어두는 것 같았다 천천히 느리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처럼 나무를 생각하지 않고는 식사를 할 수 없었다 ―정재율 「가정 예배」 부분 발들이 다 어디로 걸어갔을까요 이전에 더 이전에 공간을 다닌 사람 개와 고양이를 끌고 다닌 사람 등을 맞대고 좋은 상상을 해요 벽에 걸리는 그림처럼 뜨거운 심장을, 정말 그런 것을 창에 둔 환영, 환영해요 온 정성으로 달라진 아침 길러지는 공간이 모이면 집이 될 수 있어요 ―김기형 「나는 사라졌어요」 부분 체육-복(體育服)〔체육뽁〕 명사 누군가는 아직도 체육복을 빌리러 교실 뒷문을 서성이는 꿈을 꾼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는데도 여전히 체육복을 빌리지 못하는 꿈을. ―윤다혜 ‘체육복’ 정의 오늘은 내 옆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컴컴한 잠이 수상하다 우리는 밤이면 늘 잠만 자는데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어떻게 아는 걸까 잠에서 깨었을 때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걸 알려주던 그 목소리는 누구일까 ―조온윤 「밤의 마피아」 부분 추천사 사전에는 사실들이 정연한 문장으로 적혀 있습니다. 사전을 읽다보면 어렴풋하던 세계의 윤곽은 명료해지고, 우리의 앎은 제자리를 찾지요. 한편 시는 사물의 의미를 넓히며 사물의 가능성을 최대화하는 일입니다. 시를 통해 우리는 사물에 대한 관념이 우리가 알던 자리를 벗어나 더욱 먼 데 도달하는 순간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시와 함께하는 사전이라면, 사전에서 출발하는 시라면, 우리의 세계는 얼마나 더 멀리, 얼마나 더 새롭게 나아갈 수 있을까요? 『시작하는 사전』은 그 질문에 답하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가 알던 개념들은 아주 낯설어지며, 알지 못했거나 알고 있지만 알아차리지 못하던 사물의 쓸모와 이해는 점차 드러납니다. 새롭게 정의되는 단어들은 낯선데도 어쩐지 오래도록 내가 해온 생각인 것만 같고, 시들은 그 정의에서 한발 나아가 이상하고 아름다운 사물의 쓸모를 보여줍니다. 그러니 어떻게 즐거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 놀라운 사전과 함께라면, 우리는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황인찬 시인 시인의 말 강지이 | 겨울의 어떤 공기, 공간의 적막, 왔다 가는 빛, 고개 들면 하늘로 날아가던 나뭇잎 같은 것을 조금이라도 표현해내고 싶어 시를 쓰기 시작했다. 김기형 | 지금의 산책이 새가 되는 길이므로 시작했다. 김지연 | 과일처럼 부드럽게 물러가는 세계를 상상하면, 종이 위에 너무 오래 있었던 단어들은 부서지고 무너지며 다시 자신이기를 시작했다. 남지은 | 열살 나윤 유민 서영 태연과 시를 쓰기 시작했다. 노국희 | 멈춘 마음이 부서져 허밍을 시작했다. 류진 | 이 골드버그 장치는 훗날 인사도 잘하고 등도 잘 긁기 시작했다. 박승열 | 어떤 믿음도 없이, 즐거움만을 위해 시작했다. 성다영 | 요즘 시인 성다영, 유튜브를 시작했다. 심민아 | 살기를 시작했다. 유이우 | 늘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윤다혜 | 내가 훔치고 잊어버린 물건들에 싹이 나기 시작했다. 이다희 | 시를 읽는 동안 나는 내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이영재 | 어쩔 수 없어서, 다시 느린 산책을 시작했다. 이정훈 | 팔도 다리도 하나씩밖에 없는 거한(巨漢)이 반쪽 남은 혀로 더듬더듬 들려준 이야기를 받아쓰기 시작했다. 전호석 | 가짜인 나는 내가 아닌 것들만 믿기 시작했다. 정다연 | 입술을 열고 나는 사랑을 말하기 시작했다. 정은영 | 누구의 눈도 닿지 않은 행간에 누워 오늘 광합성을 시작했다. 정재율 | 친구들이 놓고 간 칫솔을 보다가 누가 놓고 간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조온윤 | ‘공통점’에서 같은 통점을 찾으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주민현 | 한밤에 불 켜진 미술관에서 인간이 그린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최지은 | 그로부터 내 모든 사랑이, 돌아오고 가까이 오고 여전히 곁에 남아 둘러앉기 시작했다. 한연희 | 이름 없는 괴물에게 엉뚱하고 신묘한 시의 이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한재범 | 어쩌다 불투명한 것만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홍지호 | 인파 속에서 갑자기 모든 일이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