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그럼 떡볶이는 떡을 볶아요?” (...) 우리가 흔히 먹는 떡볶이는 “물기가 거의 없거나 적은 상태”에서 볶은 게 아니다. 포장마차에서는 어묵 국물을 부어가며 만든다. 신당동 떡볶이는 팬에 물을 가득 붓고 떡, 어묵, 만두, 계란 등을 함께 넣어 끓인다. 국물 떡볶이도 꽤 인기가 있다. 이름은 떡볶이지만 조리 방법으로 보면 조림이나 탕에 가깝다.
--- p.21
오래전에 타일러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그는 한국 정부가 초청하는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한국에 왔고 서울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대학원 외교학과로 진학했는데 어느 날 교정에서 마주쳤다. 인사를 겸해서 공부할 만하냐고 물었더니 표정과 목소리가 이미 지쳐 있었다. 리포트 때문에 힘들다며 읽어야 할 책이라고 보여주는데 웃음도 안 나왔다. 한국어로 쓰인 책이 분명했지만, 〈기미독립선언서〉처럼 조사와 어미만 한글이고 나머지는 다 한자였다.
--- p.34
“그럼요, 나는 똑똑하니까. 그럼 제 월급을 올려주실 건가요?” 러시아에서는 직장에서 잘했다고 칭찬받으면 이처럼 대답한다. 그런 러시아어 화자에게 한국의 겸손한 대답은 어색하고 신기하기만 하다.
--- p.44
“금요일에 만나자.” 우리 식으로 “언제 밥 한번 먹자”가 콜롬비아에서는 “금요일에 만나자”이다. 월요일이나 화요일쯤에 “금요일에 만나자”라고 하면 약속이 아니라 그저 지나가는 인사말이다. 한국에 와서 한국 친구에게 “금요일에 만나자”라는 말을 듣고는 콜롬비아 식으로 생각해 약속에 나가지 않았던 경험을 소개했다.
--- p.44
“선생님, (칠판에) 쓰세요. 다시 설명하세요.” 이런 말을 교실에서 종종 듣는다. 슬라브어 계열에서는 상대에게 요청할 때 명령문 형태를 그대로 사용해도 무방하다. (...) 하지만 여기는 한국이다. 너는 학생이고 나는 선생인데, 학생이 (감히) 선생에게 쓰라고 하거나 다시 설명하라고 ‘명령’을 해서는 안 된다. “써주세요. 다시 설명해주세요”라고 ‘부탁’을 해야 한다. 모국어와 한국어의 언어문화가 다른 탓에 때론 불필요한 오해가 생긴다. (...) 교실 밖에서 오해 살 일이 없도록 잘 일러준다. 한국어 교사의 체면이 걸렸다.
--- p.48
무슬림은 할랄 음식을 먹는다. 할랄은 ‘허용될 수 있는’이란 뜻이다. 소나 닭이라 하더라도 이슬람 방식으로 영성의 과정을 거쳐 도축해야만 한다. 우선 신에게 고한다. “비스밀라”(신의 이름으로)라고 세 번 말하고 기도를 올린다. 다음으로 고통이 없도록 목의 혈관을 바로 끊는다. 잡은 뒤에는 곧장 피를 다 빼낸다. 이 과정을 착실히 거쳐야만 할랄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람(haram)’일 뿐이다. 아예 먹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꺼려지고 불편해지게 만드는 것이다.
--- p.61
한참 연습하는데 학생 표정이 또 좀 이상하다. 역시 그 질문이다. 단위는 다섯 자리마다 바꾸면서 왜 콤마(1,000단위 구분 기호)는 세 자리마다 찍느냐고 묻는다. 영어는 ‘thousand’(1,000), ‘million’(1,000,000)을 쓴다. 1,000마다 단위를 올리며 콤마를 찍어 분명히 한다. (...) 그런데 우리는 만, 억, 조를 써서 다섯 자리(10,000)마다 단위를 바꾸는데, 콤마는 영어처럼 세 자리 앞에 찍는다. 10,000은 십천이 아니라 일만이고, 20,000,000은 이십 백만이 아니라 이천만이다.
--- p.133
한국어 수 표현에는 경향傾向이 있다. 작은 수는 고유어를, 큰 수는 한자어를 선호한다. 고유어 단위명사인 켤레도 한 켤레, 두 켤레 하다가 이십 켤레, 삼십 켤레라고 한다. 한자어 단위명사인 명도 한 명, 두 명, 세 명 하며 세다가도 수가 커지면 이십 명, 삼십 명으로 센다. (...) 시간은 12시간으로 10 안팎의 작은 수이니 고유어, 분은 60분으로 수가 크니 한자어를 쓰는 것으로 보인다.
--- p.134
국어를 배우는 우리와 외국어로서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은 다른가? 한국어 선생은 어떤 기준으로 외국인의 한국어 문장을 고쳐주어야 할까? 위 작문을 어디까지 고쳐주어야 할까? 전 경희대학교 교수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는 외국인에게도 수준 높은 한국어를 요구해야 한다고 거듭 말한다.
--- p.200
토픽반 수업은 본말의 전도다. 영어 시험 토익의 부작용과 비슷하다. 입학과 취업에 반영하니 토익 점수에 목을 맬 수밖에 없지만, 토익 점수가 온전히 영어 능력은 아니다. (...) 시험을 위한 수업을 하면 언어 능력의 향상과 측정이라는 목적은 사라지고 오로지 점수만 덩그러니 남는다. 게다가 ‘K-시험공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시험 준비와 점수 향상에는 한국이 탁월하지 않은가. 시험이라는 꼬리가 언어능력 향상이라는 몸통을 흔든다.
--- p.210
문제는 예금 잔고 증명. 이 대목에서 편법이 동원되고 불법체류의 씨앗이 뿌려진다. 외국의 현지 유학원이 학생들의 예금 잔고 증명을 도와(?)주면서 일이 시작된다. 유학원에서 A 학생 통장에 1,000만 원을 넣어주고 예금 잔고 증명을 받는다. 이내 돈을 찾아 B 학생 통장에 넣고 다시 B 학생의 예금 잔고 증명을 받는다. 이렇게 여러 학생을 반복한다. 이런 유학원 덕분에 재정 능력이 부족한 학생도 은행 잔고를 증명하여 어학연수 비자를 받는다. 그러고는 한국에 들어와 불법체류자가 된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 p.242
처음 며칠은 학생들이 어학당에 잘 나온다. 한국어도 조금씩 배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업 시간에 졸기 시작한다. 급기야는 수업 시간에 대놓고 잠을 잔다. 이제 교실 분위기는 한국 고등학교 교실처럼 흐트러진다. 결석이 잦아지더니 결국 학생이 사라진다. (...) 한국어 교원이 되어 한국어를 가르치러 어학당에 왔는데 교실에서 잠자는, 수업에 안 나오는 학생 관리(?)부터 해야 한다. 자괴감은 이럴 때 쓰는 단어이다.
--- p.247
한국어 교원은 대학에서 아무 지위가 없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명의의 자격증은 한국어 ‘교원’이지만, 교육부 관할인 대학에서는 마땅한 법률적 지위가 없다. 한국어를 가르치긴 하지만 학부(또는 대학원)의 교육과정이 아니고 언어교육원 자체 프로그램 강의이니, 고등교육법의 교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교육부 입장이다. 무슨 홍길동도 아니고 가르치기는 하지만 교원이 아니다.
--- p.252
호주 사람 샘 해밍턴은 한국에서 투표를 할까? 무슨 뚱딴지같은 우문(愚問)이냐고 하기 쉽다. 샘이 한국으로 귀화한 것도 아닌데 한국에서 투표할 권리가 있다는 게 어불성설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선거에 따라 다르다. 국민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서는 샘에게 투표권이 없다. 반면 지방자치단체의 의회 의원과 그 장을 뽑는 선거에서는 샘도 투표한다. 정확히 7개 선거다.
--- p.285
한국에 남아서 일을 하다가 비닐하우스에서 얼어 죽은 외국인 노동자 사연도 들렸다. 이들은 한국어를 배우지 못했다. 힘이야 들더라도 저녁이나 주말에 한국어를 배울 충분한 기회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적어도 얼어 죽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외국인이 한국에 살면서 인간의 기본적 자유와 존엄, 권리를 누리려면 한국어를 알아야 한다. (...) 《훈민정음》 어제서문의 현대판이 있다면 이런 내용이지 싶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 말하려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내 이를 가엾게 여겨 한국어를 가르친다.”
--- p.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