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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라의 죽음 _ 7
2. 유디트 _16 3. 에비앙 _ 49 4. 미미 _ 80 5. 사르다나팔의 죽음 _116 해설 자살의 윤리학(류보선, 문학평론가) _121 개정판 작가의 말 _166 |
저김영하
관심작가 알림신청Kim Young-Ha,金英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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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의 마라는 편안하면서 고통스럽고 증오하면서도 이해한다. 한 인간의 내부에서 대립하는 이 모든 감정들을 다비드는 죽은 자의 표정을 통해 구현했던 것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의 시선은 가장 먼저 마라의 얼굴에 머문다. 표정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시선은 크게 두 방향으로 움직인다. 한쪽 손에 들린 편지로 시선이 옮겨지거나 아니면 욕조 밖으로 비어져나와 늘어진 다른 팔을 따라간다. 죽은 마라는 편지와 펜, 이 두 사물을 놓치지 않고 있다. 거짓 편지를 핑계로 접근한 암살자는 답장을 쓰려던 마라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마라가 끝까지 움켜쥔 펜이 차분하고 고요한 이 그림에 긴장을 부여한다. 다비드는 멋지다. 격정이 격정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건조하고 냉정할 것. 이것은 예술가의 지상 덕목이다.
--- p.7~8 압축할 줄 모르는 자들은 뻔뻔하다. 자신의 너저분한 인생을 하릴없이 연장해가는 자들도 그러하다. 압축의 미학을 모르는 자들은 삶의 비의를 결코 알지 못하고 죽는다. 나는 파리로 갈 것이다. 그곳에서 헨리 밀러나 오스카 와일드의 글을 읽거나 아니면 루브르에서 앵그르나 모사하면서 세월을 보내리라. 여행을 떠난 후에도 여행책자를 읽는 사람은 지루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여행을 떠난 후에는 소설을 읽는다. 대신 이 도시에서는 소설을 읽지 않는다. 소설은 삶의 잉여에 적합한 양식이다. --- p.10 이런 게 인생일까. K는 생각한다. 어차피 패는 처음에 정해지는 것이다. 내 인생의 패는 아마도 세 끗쯤 되는 별볼일없는 것이었으리라. 세 끗이 광땡을 이길 가능성은 애당초 없다. 억세게 운이 좋아서 적당히 좋은 패를 가진 자들이 허세에 놀라 죽어주거나 아니면 두 끗이나 한 끗짜리만 있는 판에 끼게 되거나. 그 둘 중의 하나뿐이다. 그래봐야 그가 긁을 수 있는 판돈이란 푼돈에 불과하다. 어서어서 판이 끝나고 새로운 패를 받는 길. 그 길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 p.25 큐레이터의 경고가 아니었어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경계심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자신을 나락으로 밀어넣은 것들은 언제나 그를 매혹시켰던 존재들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 할당된 매혹이라는 이름의 채권. 그 첫 전주錢主는 박제된 나비들이었다. 몸통에 핀을 꽂은 나비들이 다시 태어나서도 핀을 꽂은 채로 날아다니는 환상에서 아직까지도 그는 자유롭지 못했다. --- p.91 이 글을 보는 사람들 모두 일생에 한 번쯤은 유디트와 미미처럼 마로니에공원이나 한적한 길모퉁이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다가가 물을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때 내 손을 잡고 따라오라. 그럴 자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 일이다.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도 그대들 갈 길을 가라. 나는 너무 많은 의뢰인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내가 쉬고 싶어진다. 내 거실 가득히 피어 있는 조화 무더기들처럼 내 인생은 언제나 변함없고 한없이 무료하다. --- p.119~120 |
충격적 신예의 가장 강렬한 자기 출현 예고!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개정판 김영하 등단 25주년을 맞이해 시작된 ‘복복서가×김영하 소설’ 시리즈 2차분 3종이 출간되었다. 김영하라는 이름을 문단과 대중에 뚜렷이 각인시킨 첫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분단 이후 한국 문학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빛의 제국』, 그리고 비교적 최근작인 소설집 『오직 두 사람』이다. ‘자살안내인’이라는 기괴한 직업을 가진 화자를 등장시켜 그가 만난 ‘고객’들의 일탈적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한국문학의 감수성을 김영하 출현 이전과 이후로 갈라놓은 문제작이다. 복복서가판은1996년 초판의 모습을 보존한다는 취지에 충실했던 지난 개정판들과 달리, 원숙기에 접어든 작가가 세밀하게 다듬은 마지막 결정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세기말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에게는 세 부류의 독자가 있다. 첫째는 ‘한때 김영하를 좋아했던’ 문학 독자다. 이들은 근대 한국문학의 정서적 토대였던 낭만주의와 센티멘털리즘을 단 한 권의 소설로 격파한 김영하를 보면서 짜릿한 대리만족을 경험했다. 소재, 주제, 인물, 문체의 모든 면에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과격했다. 스피드, 섹스, 수어사이드로 압축되는 서사는 전쟁과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점철되었던 20세기에 종말을 고하는 신드롬이었다. 이 소설 속 나르시시즘과 에로티시즘은 ‘소비자본주의와 후기정보화사회’의 급류 속에서 파편화된 고독한 개인이 기댈 수 있는 위안의 빈곤을 드러낸다. 작품 속 인물들은 성별, 직업, 국적은 다르지만 하나같이 정신적 ‘고아’들이다. 혈연이 폭력을 합리화하고 친밀한 유대가 착취를 정당화하는 조건에 놓인 사람들에게는 무연고자가 되는 편이 차라리 안전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나’의 연속성을 입증해줄 관계들이 부재할 때 사람은 누구든지 쉽게 자기 삶에 대한 충실성을 포기할 수 있다. 세기말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가공할 공허의 무게에 짓눌린 부피 없는 존재들에 관한 소설, 현대인의 냉소와 우울을 감각적으로 묘사한 소설이었다. 21세기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세간의 이목을 끌며 등장해 한동안 사랑을 받던 많은 작가와 작품이 그사이 잊혀갔다. 현대 한국소설은 십수 년의 시간도 견디지 못할 만큼 수명이 짧고, 또 어쩌면 시대를 초월하는 작품에 대한 추구도 별로 없는 듯하다. 하지만 김영하는 여전히 건재하고, 덕분에 그에게 두번째 독자군이 생겼다. 다양한 경로를 거쳐 비교적 최근작인 『살인자의 기억법』이나 여행에세이를 먼저 접한 독자들이다. 이 독자 그룹에게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파격’과 ‘도발’의 대명사였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는다. 장르와 매체를 막론하고 온갖 자극적인 서사가 차고 넘치는 시대에 ‘이 정도면 클래식’인 것이다. 동시대적 공감대를 떠나온 퇴폐와 허무의 정서는 언뜻 연극적 제스처로 보일 가능성도 있다. 독자는 늘 새로운 작가의 등장에 열광하지만, 작가에게는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 쓸 수 있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작가의 신작은 언제나 자신의 전작들에 맞서는 분투다. 그리하여 김영하의 작품 목록이 성공적으로 업데이트될수록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점점 더 과거로 밀려난다. 하지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다른 어떤 소설들보다도 철저히 1990년대적이었고, 따라서 이 작품은 시간이 흐를수록 유의미한 ‘시대소설’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공공재로서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많은 비평이 이 소설의 이야기 요소들을 즉자적으로 받아들여 진지하게 분석하지만, 이 작품의 가장 독창적인 측면은 ‘파괴’를 유희의 한 양식으로 다뤘다는 점이다. 소설 속에서 표류하고 질주하고 무너져가는 인물들과 달리, 일관되게 깔끔한 톤과 매너로 자신의 일을 착착 진행시켜나가는 인물, 즉 자살안내인이 하고 있는 일은 다름 아닌 ‘글쓰기’다. 자살안내인의 다른 직업은 예술가고, 그는 잉여로서의 삶이 부과하는 권태를 견디는 수단으로 소설을 택한 인물이다. 어쩌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김영하라는 신인 소설가가 장차 무수한 독자들을 유인해 자신이 구축한 픽션 세계로 이리저리 이끌고 다니리라는, 미혹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예고한 소설이었는지 모른다. 이번 개정판 ‘작가의 말’에서 김영하는 이런 얘기를 한다. “이 소설은 한 시대의 산물이고, 세상에 나가 독자를 만난 지도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어느 정도 공공재처럼 느껴진다.” 김영하의 세번째 독자는 이 공공재의 일부분으로 기능한다. 작가와 독자는 소설을 매개로 이뤄지는 ‘파괴의 역할놀이’에서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공범자다. 작가의 궁극적 목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삶의 진부함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고객인 독자는 이 노련한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일상에 박제된 ‘가짜 나’를 멋지게 부숴버리는 꿈을 꾼다. 추천의 말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그간의 좁고 견고한 환상체계에 의해 가려져 있던 무시무시하면서도 매혹적인 실존들, 예컨대 현대사회의 고독과 퇴폐, 권태감과 그로 인한 에로티시즘과 죽음충동들을 설득력 있게 귀환시킨다. 그렇게 『파괴』는 그 동안 한국문학이라는 규범성에 의해 가려졌던 끓어넘치는 수많은 실재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집중적으로 텍스트화하거니와, 이는 『파괴』의 득의의 성과라 할 수 있다. 해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파괴』와 더불어 비로소 한국문학은 현대의 우울한 실존에 대한 깊고 냉정한 응시를 하게 되었다고. (…)그렇게 『파괴』는 한국소설 전반을 『파괴』 이전의 소설과 실질적으로 단절시키는 알랭 바디우적 의미의 사건에 해당하는 소설이라 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 이후에 출몰하는 소설의 운명을 미리 결정지은, 그러니까 『파괴』 이후 소설의 한 기원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다. ―류보선 (문학평론가) 김영하의 이 첫번째 장편소설은 1990년대 한국에서 처음으로 부상하는 새로운 세대, 풍요로워진 경제사회 속에서 자유를 누리는 동시에 그로 인해 방향성을 상실해 혼란에 빠진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작가의 시종일관 암울하고 냉정한 목소리, 군더더기도 흔들림도 없는 무표정에 어느샌가 넋을 놓고 빠져들게 된다. ―북리스트 이 소설이 한국에서 처음 출판되었던 때 김영하는 한국 문단의 ‘슈팅스타’인 동시에 ‘스캔들’이었다. 그는 아시아의 전후 문학, 이념 문학과 결별을 고한 세대이고, 스스로를 세계화된 거대도시의 코즈모폴리턴으로 자각하는 그룹에 속한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지독하게 암울한 소설이지만, 그것이 쓰인 방식은 찬란하다. ―크리스토프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Christoph von Ungern-Sternberg, 《벨트암존탁》 의미심장한 주제, 다면적 서사, 변화해가는 인물들. 정교하고도 섬뜩한 감각으로 세기말 인간실존의 소외효과를 탐구한 이 소설은 모든 면에서 확고하게 문학적인 성취를 이뤘다. ―엔터테인먼트위클리 김영하의 소설은 예술 위에 지은 예술이다. 그의 문체는 카프카에, 삶이 무가치하고 보잘것없다는 소설 속 철학은 카뮈와 사르트르에 닿아 있다. _로스앤젤레스 타임스 기존의 한국문학과는 전혀 다른 지점에 서 있는 작품이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을 읽어야 할 이유이다. _쥐트도이체 차이퉁 무수한 함의가 압축된 기묘한 소설. 김영하의 작품은 진실, 죽음, 욕망 그리고 정체성에 관한 자의식적 문학적 탐구다. ―퍼블리셔스위클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