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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내내 여자의 문장만 읽기로 했다

: 김이경 독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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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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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3년 05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432쪽 | 133*210*26mm
ISBN13 9791192988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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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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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은 소설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제인 에어》는 여성이 주인공인 드문 성장소설이었다. 열두어 살의 내가 그걸 읽고 글을 써보려 했던 것은 당연했다. 바로 그것이 《제인 에어》가 가진 힘이었다. 여자아이에게 독립을 꿈꾸게 하고, 다른 세상을 그리게 하고, 자기 이야기를 써볼 마음을 내게 하는 것.
---「27쪽(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중에서

고정희는 “민중해방이 강조되는 곳에 몰여성주의가 잠재”하고, “여성해방이 강조되는 곳에 몰역사, 탈정치성이 은폐”된 현실을 직시했고 피하지 않았다. 둘로 나뉜 전선을 하나로 아우르는 미션에 도전했고,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을 홀로 감당했다. 그는 여성과 남성, 농촌과 서울, 민중과 지식인으로 나뉜 세상에 있었으나 어느 한쪽에 속하는 대신 이 모든 경계를 살았다.
---「82쪽(고정희, 《고정희 시 전집 1·2》」중에서

예리한 시선으로 말하면 최초의 근대 여성 작가로 알려진 김명순을 빼놓을 수 없다. 기생첩의 딸로 태어나 평생 질시와 구설에 시달린 김명순에게 글쓰기는 욕망을 넘어선 생의 의지였다. 일본 유학 중 숙부가 소개한 군인 이응준(훗날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에게 성폭행을 당한 그는 쫓기듯 고국에 돌아와서 첫 소설 〈의심의 소녀〉를 썼다. 작품은 이광수의 찬사를 받으며 조선 최초의 현상 문예로 꼽히는 《청춘》지의 공모전에 입상했고, 그는 당당히 최초의 등단 작가 중 하나로 이름을 올렸다.

김명순은 일본어·영어·독일어에 능통한 언어적 재능을 바탕으로 성폭행의 참혹을 견디며 시와 소설에서 자신의 언어를 구축했다. 그는 에드거 앨런 포를 국내에 소개하고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을 번역했으며, 그리스 신화와 니카라과의 국민 시인 루벤 다리오의 시를 인용해 조선 문단을 자극했다. 그리고 창작시와 번역시를 모아 1925년에 작품집 《생명의 과실》을 출간했다. 여성 작가로는 최초였고 남성 작가들에게도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이 드문 성취에 대한 응답은 지독히 악의적이었다. 김기진·김동인·방정환 등이 문학의 이름으로 퍼부은 언어의 저열함은 놀랍기 그지없어, 작가로서는 물론이요 인간으로서의 자질조차 의심케 한다. 그러나 남성 문인들의 집요한 돌팔매질에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나쁜 피”를 운운하며 거짓 소문으로 2차 가해를 가하는 이들에 맞서, 김명순은 직접 자기 삶을 이야기한 〈탄실이와 주영이〉를 썼다. 여성 스스로 성폭행을 공론화한 최초의 사례였다.
---「86~87쪽(김명순 외, 《근대여성작가선》」중에서

벨 훅스는 페미니즘을 이렇게 정의한다. “페미니즘이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 많은 이들이 페미니즘을 남성에 반대하는 여성의 운동이라 생각하지만, 그는 페미니즘이 반대하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남성중심주의이며, 가부장제 사회에 사는 한 여남을 불문하고 누구라도 성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 그의 정의는 ‘페미니즘=양성평등’이란 통념도 넘어선다.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것은 양성평등을 넘어 성별이 차별의 잣대가 되지 않는 사회, “누구나 타고난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세상,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실천할 수 있는 세상”이다. 벨 훅스는 페미니즘만으로 이런 세상을 만들 수는 없으며 인종차별과 계급 엘리트주의, 제국주의가 함께 종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페미니즘이 중요한 것은 이 완고한 차별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한 걸음이기 때문이다.
---「108쪽(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중에서

《3기니》는 가상의 남성 변호사를 내세워, ‘전쟁을 막기 위해 여성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 울프는 전쟁 저지를 위해서 자신은 여성대학을 설립하는 데 1기니, 여성 취업을 지원하는 단체에 1기니, 마지막으로 반전 단체에 1기니를 기부하겠다고 답한다. 그리고 여성의 교육과 취업이 왜 반전으로 이어지는지, 독자가 지칠 만큼 상세히 설명한다. 무엇보다 그는 전쟁이 그 자체로 “남성성의 배출구”이며, 특히 파시즘은 가부장제 독재의 극단적 형태임을 분명히 한다. 그에 따르면 “공적 세계와 사적 세계는 분리될 수 없고, 한쪽의 폭정과 예속은 다른 한쪽의 폭정과 예속”이므로, 파시스트 독재에 맞서 저항하는 것과 여성이 가부장적 종속에 반대하는 것은 같은 싸움이다. (…) 그는 “어떤 형태의 국가적 자화자찬에도 동조하지 않을 것이며, 전쟁을 장려하는 박수부대의 일부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페미니즘과 평화주의는 분리될 수 없다. 하여 버지니아 울프는 선언한다. “여성으로서 내겐 조국이 없다. 여성으로서 나는 조국을 원하지도 않는다. 여성으로서 나의 조국은 전 세계다.”
---「113쪽(버지니아 울프, 《3기니》」중에서

남성이 작정하고 여성을 배제하거나 괴롭혀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그냥 남성이 인간 사회의 기본값이어서다. 그 세상에서 여성 구조대원은 몸에 맞지 않는 남성용 안전장비와 씨름하다 목숨을 잃고, 쓰나미로 피해 입은 난민을 돕겠다고 나선 활동가들은 연료 없이 식재료만 주거나 부엌 없는 집을 지어줘 난민들의 배를 두 번 곯린다. 이 황당한 사태에 고의나 저의는 없다. 단지 여성과 함께 일하지 않고,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고, 여성에게 의견을 묻고 이야기를 듣는 당연한 과정을 밟지 않아서 생긴 일일 뿐이다. (…) 이 악순환을 끊는 첫걸음으로, 70kg의 젊고 건강한 남성이 기준이 아니라 더 작고 늙고 약한 사람이 표준인 사회를 상상해보자. 그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이 누릴 평화를 상상해보자. 이제는 그런 세상, 그런 정치를 꿈꿀 때도 되지 않았나.
---「118~119쪽(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보이지 않는 여자들》」중에서

고맙게도 페데리치는 이 모든 의문에 답한다. 마녀사냥은 광기의 산물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관계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여성들의 저항에 대한 공격”이며, 여성을 노동력 재생산 기계로 만들려는 국가 차원의 “정치적 기획”임을 분명히 한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증기기관이 아니라 마녀사냥과 식민화, 노예노동이라는 폭력을 통해 확립되었고, 마녀사냥은 중세의 암흑이 낳은 비극이 아니라 근대의 자본이 요구한 사건, “국가가 개시한 전쟁”이었다. (…) 지난 300여 년간 세상은 가족이라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요구했다. 그러나 페데리치는 말한다. 세상이 사랑이라 말하는 것을 “우리는 부불노동이라 말한다”라고.
---「173~175쪽(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 《혁명의 영점》」중에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소설-코러스’, 일명 ‘목소리 소설’이라는 독특한 다큐멘터리 산문으로 문학의 새 지평을 연 작가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여성 200여 명을 인터뷰하고 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도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끔찍한 비극의 현장을 어떤 상상이나 은유도 배제한 채 오로지 당사자의 목소리로만 전한다. “그들의 울음과 비명을 극화하면 삶 대신 문학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릴 터”이기에, 작가는 자신의 말이 아니라 “이름 없는 목격자들”의 기억을 묵묵히 옮긴다. 무려 7년 동안 “노래는 없고 울음소리만 가득한 합창”을 들으며 “악의 노예가 되어 그 심연을 들여다”본다.

그리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혹한 경험들이, 강요된 침묵 속에 감춰두었던 금지된 기억들이, 수사(修辭)는 적고 말줄임표는 많은 문장으로 드러난다. (…) 목소리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전쟁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의 이야기 속엔 “얼마나 영웅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승리했는지, 어떤 기술이 사용됐고 어떤 장군이 활약했는지 따위의 내용은 등장하지 않는다.” 전쟁에 참여한 여성들은 “허무맹랑한 무용담” 대신 어쩔 수 없이 “비인간적인 일을 저지른 인간적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말한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땅도 새도 나무도 고통을 당하는 전쟁에 대해, 모든 존재의 고통에 대해 증언한다.
---「178~179쪽

미셸 쿠오는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스물두 살 때, 퇴락한 소도시 헬레나에 있는 흑인 대안학교를 찾아간다. 당시 그에게는 당찬 꿈이 있었다. “자신을 변화시키고 자신에게 사회적 책임을 안겨준” 흑인문학을 통해 미국의 역사를 가르치겠다는, 그래서 남부의 게토 지역에 사는 흑인 아이들의 삶을 변화시키겠다는 “낭만적인” 포부가 있었다. 그러나 변변한 일자리는 물론 가난을 벗어날 희망도 거의 없는 그곳에서 모두가 무상 급식 대상자인 흑인 학생들을 마주했을 때, 그는 자신의 꿈이 얼마나 크고 무모한 것인지 깨닫는다. 일찍이 자신을 깨우쳤던 제임스 볼드윈, 맬컴 엑스, 버락 오바마 같은 흑인 지도자의 글은 이들에게 어렵고 지루하고 자신과는 너무 먼 이야기일 뿐, 아무 감흥도 주지 못한다.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한 그는 충격요법을 쓴다. 그곳에서 일어난 흑인 린치의 역사를 얘기하며 불타 죽은 흑인의 사진을 들이민 것이다. 분노로 각성하길 바라면서. 그러나 학생들은 “이런 건 보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돌리고,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이 그들의 아픔을 “우쭐대는 태도로” 다뤘다는 것을.
---「192쪽(미셸 쿠오, 《패트릭과 함께 읽기》」중에서

왜 옛날 귀신들은 자기를 괴롭힌 원수 앞에 안 나타나고 아무것도 모르는 원님 앞에 나타나서 애꿎은 사람을 혼비백산하게 했을까? 국문학자 최기숙에 따르면 이것은 여자 귀신에게만 해당되는 행동 패턴이며, 이런 행동 패턴이 나타나는 이유는 그 이야기를 전하는 사대부 남성들의 의도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귀신 이야기에 이런 속내가 있었다니! 구미가 당겨서 단숨에 읽은 책, 최기숙의 《처녀귀신》이다. (…) 귀신 이야기가 실린 야담집은 사대부가 여가에 읽는 독서물이었다. 야담을 모아 쓴 사람도, 그것을 읽는 사람도, 사대부 남성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니 당연히 담력과 지혜를 갖춘 양반 관리가 나서서 법에 따라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만약 여자 귀신이 직접 나서 치죄(治罪)한다면, 현실에서 남성 관리가 설 자리는 없어지고 그들이 내세우는 현실의 법도 무력해질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처녀귀신은 ‘탄원자’가 되고 양반 남성은 ‘해결자’가 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귀신 이야기에도 읽고 쓰는 사람의 의도, 나아가 현실의 권력관계가 담겨 있는 셈이다.
---「208~210쪽(최기숙, 《처녀귀신》」중에서

국문학자 김영희는 《한국 구전서사의 부친살해》라는 보기 드문 저작에서, 부친 살해보다 자식 살해가 더 많은 한국의 서사 전통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천착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에는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나 오이디푸스처럼 아버지를 부정한 아들이 없다. 나라를 세운 주몽, 불법(佛法)을 세운 아도는 아비를 ‘죽인’ 자식이 아니라 아비 ‘없는’ 자식이다. 그들은 부친 살해가 아니라 ‘부친 탐색’에 나선다.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의 세계를 떠나며, 아버지의 세계에서 정체성을 인정받고 권력을 위임받는다. (…) 주로 조선시대로부터 전해지는 구전서사에는 늙은 부모를 위해 아이를 죽이는 효행담이 수두룩하다. 며느리가 제 자식을 삶아 먹은 시부모를 감싸 효부상을 받는 것처럼, 자식 살해는 패륜이 아니라 효행이다. 주목되는 건 이때 여성이 며느리란 이름으로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자식 살해가 유발하는 죄의식과 불안을 대리 표출할 대상, 곧 ‘남성’의 ‘죄’를 대신할 알리바이로서 ‘여성’이 필요했다고 설명한다.
---「336쪽(김영희, 《한국 구전서사의 부친살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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