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 읽을 기회를 낭비한 역사가 없다. 하루는 고작 스물네 시간, 게다가 일곱 시간은 잠으로 보내야 하니 내 견지에서는 나머지 열일곱 시간 중 아무리 적어도 네 시간은 읽기에 할애해야 한다. 물론 그 네 시간으로 나의 독서욕이 충족될 리는 없다. 한번은 어떤 친구가 인간이 읽고 싶은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천년만년 살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브램 스토커가 『드라큘라』에서 전하려 했던 메시지라고 했다.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책벌레 드라큘라 백작이 수만 명 처녀들의 도자기처럼 매끈한 목덜미에서 피를 빨아먹었던 이유는 그가 악의 화신이라서가 아니라 읽고 싶은 책들을 웬만큼 읽을 때까지 오래오래 살 방법이 달리 없어서였다나. 그러나 여태껏 살면서 『드라큘라』를 읽을 시간은 없었던 나는 그 말이 맞는지 확인할 도리가 없다. --- p.12~13
나는 내가 강박적으로 책 읽기에 매달리는 이유를 안다. 나는 다른 곳에 있고 싶어서 책을 읽는다. 그래, 지금의 우리 사회가 그나마 합리적으로 살 만한 세상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책이 제시하는 세상은 그보다 훨씬 낫다. 가난에 시달리거나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면 더욱더 그럴 것이다. 극빈자 임대주택에서 표준에 한참 미달인 부모와 살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책만 읽어댔고,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이 욕망이야말로―그날그날, 아니 매시간―독서의 가장 강력한 동기라고 굳게 믿어왔다. 우리는 한결 흥미진진하고 살맛 나는 세상으로 도피하려고 책을 읽는다. 자신의 밥벌이, 배우자, 자기 나라 정부, 생활이 진절머리 나지 않는 세상으로. --- p.13~14
나는 속독을 하지 않는다. 속독은 책 읽기의 목적, 느긋하고 기분 좋은 경험을 한다는 목적을 좌절시키는 듯하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거나 끼니를 빨리 감기로 때우는 일은 드물다. 모로코에서 딱 한 번 예외가 있었을 뿐, 섹스를 빨리 감기로 때우지도 않는다. 그런 내가 왜 독서를 빨리 감기 해야 한단 말인가? --- p.17
책에 뭔가를 써넣으면서 얻는 기쁨은 내가 전자책 단말기를 구입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은 내게 부적이요, 죽음을 상기시키는 상징물이 맞다. 그러나 책은 장난감이기도 하다. 나는 내 책을 가지고 노는 게 좋다. 책에다 표시를 남기고, 손때 탄 느낌을 불어넣기 좋아한다. 책장에 책을 쌓아놓았다가 옮기고 새로운 기준―높이, 색상, 두께, 출신, 출판사, 작가의 국적, 주제, 유사성, 다시 읽게 될 확률 등―에 따라 재배치하기를 좋아한다. 그러고 나서는 또 책을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곤 한다. 무작정 책을 끄집어내어 인상적인 대목을 읽어주는 방법으로 우리 집에 불쑥 찾아온 멍청이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도 좋아한다. 책을 소유하는 순간부터, 아직 첫 페이지도 펼치지 않은 책이라 해도, 어떤 면에서 그 책이 내 삶을 바꾸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내 책을 옷이나 신발이나 음반을 다루듯 한다. 책은 내가 사용하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킨들로는 절대 이렇게 할 수 없다. --- p.30~31
어떤 것들은 존재 그대로 완벽하기에 아무런 개선도 필요치 않다. 하늘, 태평양, 자식을 본다는 것,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딱 그렇고, 책이 딱 그렇다. 책은 숭고하지만 본능적인 것이기도 하다. 책은 물리적으로 눈길을 끌고 정서적으로 자극하는 하나의 완벽한 전달 체계다. 책에 포함된 정보를 중시하는 사람들, 시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 지하철에서 책을 즐겨 읽는 사람들, 남들에게 자신이 읽는 책을 노출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책 보관과 정리가 골치 아픈 사람들에게 전자책은 이상적이다. 그러나 평생 책과의 뜨거운 애정 행각을 일삼았던 이들에게 전자책은 무용지물이다. 우리가 만질 수 있는 책, 체취를 맡을 수 있는 책이어야 한다.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책이어야 한다. --- p.47~48
“이미 스물다섯 권을 읽고 있으면서 나는 왜 이 책을 사는 걸까?” 나는 당시 내 옆에 있던 친구에게 물었다. “이거 병 맞지?”
“병이죠.” 계산대 점원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걸려도 좋은 병이에요.” --- p.110
“여왕은 어떤 책을 읽으면 그 책이 길잡이가 되어 다른 책으로 이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문들이 계속 열렸고 바라는 만큼 책을 읽기에는 하루가 너무도 짧았다.” --- p.135
“책 읽기는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게 무엇인가를 상기시키지.” 물리학자 친구가 말했다.
“독서란 내가 언제라도 책을 펼치면 삶을 네 배로 살 수 있다는 의미가 있죠.” 어느 어린이책 작가가 말했다.
“나는 책 읽기에서 희망을 얻어.” 동료 기자가 한 말이다.
“내일은 오늘만큼 암울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게 독서의 의미죠.” 내 딸이 한 말이다.
예전에 아프가니스탄 버전 아메리칸 아이돌에 대한 영화를 제작했던 친구에게 물어봤다. “자네에겐 책 읽기가 어떤 의미인가?”
“사람으로 산다는 거지.” --- p.324
우리는 책이라는 사물 그 자체에 마법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 전자책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말이 이해 안 가거나 바보 같다고 할지 모른다. 그들은 책이 자리만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그 말도 맞다. 하지만 귀여운 자식들도, 프라하도, 시스티나 성당도 자리를 차지한다. 나는 책의 미래를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 p.375
독서는 인류가 피할 수 없는 것을 지연시키는 방법이다. 독서는 우리가 하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방식이다. 이 장대하고 가능할 성싶지 않은 독서 계획이 우리 앞에 줄지어 있는 한, 우리는 숨을 거둘 수 없다. 나는 아직 『빌레트』를 다 읽지 못했으니 죽음의 천사에게 나중에 다시 오라 전하라. 거기에는 우리 모두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거라는 희망이 있다. 나 믿노니, 이것이 책이 인류에게 주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모든 생은, 최고의 생조차도, 끝은 슬프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는다. 우리가 듣고 싶은 목소리는 영원히 멈춰버린다. 책은 끝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드러낸다. 제인은 로체스터와 결혼할 것이다. 엘리자는 사악한 노예주 사이먼을 저지할 것이다. 장발장은 자베르를 이겨낼 것이다. 핍은 에스텔라의 짝이 될 것이다. 악한 이는 나가떨어지고 정의로운 이는 번창하리라. 우리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책들이 있는 한, 아직은 배를 돌려 안전한 항구를 찾을 기회가 있다. 포크너의 말마따나, 그저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아직도, 우리 모두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 p.380~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