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8년 05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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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587쪽 | 562g | 130*195*35mm |
ISBN13 | 9788932030982 |
ISBN10 | 8932030987 |
발행일 | 2018년 05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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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587쪽 | 562g | 130*195*35mm |
ISBN13 | 9788932030982 |
ISBN10 | 8932030987 |
프롤로그 그리스인 조르바 작가 소개 작품의 배경 조르바와 카잔자키스, 니체 옮긴이 후기 |
“내가 새삼 이 작품을 새로이 번역하려고 마음먹은 까닭은 (...) 평생 그리스학을 전공한 언어학자로서 이 명작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다 더 정확하게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580~581쪽)
한국에 『그리스인 조르바』가 처음 번역된 것은 1981년 고 이윤기 선생(이하 고인)에 의해서였다. 이후 조르바의 삶은 한국 독자를 매료시켰고, 카잔자키스(1883~1957)*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카잔자키스 : 유재원 선생은 기존에 알려진 ‘카잔차키스’는 잘못된 표기라고 주장한다. 그리스어 이름 표기 Καζαντζάκης에서 세 번째 음절의 자음 [τζ]는 유성 파찰음이므로 이에 대한 한글 표기는 [ㅈ]이지 [ㅊ]이 아니라는 것이다(552쪽).
유재원 선생은 고인과의 인연을 후기에서 상세히 소개한다. 1999년 두 사람이 함께 크레타의 카잔자키스 무덤에 참배했다고 한다. 고인이 한국에서 가져간 소주병과 오징어 안주를 정성스레 올려놓고 절을 했다. 길을 안내했던 그리스 사람들도 눈시울을 붉혔다고 전한다. 이역만리 떨어진 사람들이 하나의 명작으로 이어지게 하고 말이 통하지 않으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껴안고 교통하도록 만든 위대한 문학의 힘을 절감한 순간이었다.
조르바는 니체가 생각해내고 주장했던 삶을, 그리고 작가 카잔자키스가 늘 꿈꿨지만 결국은 실천하지 못했던 삶을 그냥 살았다. 조르바는 영원한 자유인이다. 니체가 광기에 사로잡힌 듯 단숨에 써내려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온전히 계승한 인물이 바로 조르바였다. 빼어난 인간(위버멘쉬), 조르바. 오늘날 우리가 조르바에게 그렇게 환호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리라.
2017년 요르고스 스타시나키스 '친구들' 회장(왼쪽)이 중국 행사 전 한국에 들러 유재원 선생과 자리를 함께 했다.
유재원 선생이 고인과 함께 크레타를 찾은 지도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2017년은 카잔자키스가 사망한 지 꼭 60주기가 되는 해였다. 1988년 결성된 ‘국제 카잔자키스 친구들’(현재 128개국 지부 8500여 회원)은 작년 12월 베이징에서 컨퍼런스를 열었다. 중국에서 행사가 열린 이유는 뭘까. 전 세계를 유랑했던 카잔자키스가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이 중국이었다. 1957년 당시 아시아독감이 유행했다. 중국 방문 후 귀국길에 상태가 급격히 악화돼 독일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카잔자키스가 살았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 시대는 크레타의 독립 전쟁과 발칸 전쟁, 1차, 2차 세계대전, 그리스 내전 등으로 암울했던 시기였다. 그 역시 조국과 민족을 위해 투쟁하고 싸웠건만 혹독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개인의 힘은 보잘 것 없었다. 하지만 그는 문학의 힘으로 앞으로 불멸할 인간, 조르바를 그려냈다. 1941년 『그리스인 조르바』를 쓰기 시작해 45일 만에 완성한 뒤 1943년 8월 10일 탈고했다. 하지만 전쟁의 여파로 1946년에야 출판될 수 있었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1964)에서 조르바(앤서니 퀸 분)와 보스(엘런 베이츠 분)가 제임베키코 춤을 추고 있다.
“자, 조르바, 이리 와서 내게 춤을 가르쳐줘요.” 내가 소리쳤다.
조르바가 펄쩍 뛰어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번개 치듯 빛났다.
“대장, 춤이라고요?” 그가 말했다. “춤이라고요? 좋아요!”
“자, 조르바, 내 삶을 바꿔줘요! 자, 시작합시다!”
“내가 우선 제임베키코 춤부터 가르쳐드리리라. 아주 용감한 전사들의 거친 춤이외다. 게릴라들이 전투를 앞두고 추던 춤이죠.” (502~503쪽)
이 작품을 그리스어 원전으로 다시 읽게 된 것은 카잔자키스 팬의 한 사람으로서 감개무량하다. 아무쪼록 이번 번역을 계기로 카잔자키스의 작품과 생애가 새롭게 조명되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위대한 문학의 힘은 시공간을 초월하기 마련이다.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가 이런 것이 아닐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묘비명)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자키스(1883~1957)는 평생 자유를 갈망하는 삶을 살았다. 작가의 자유에 대한 열망은 어린 시절 고향 이라클리온의 혁명과 학살을 목격한 데서 비롯된다. 아테네 대학교 재학 시절 <뱀과 백합>이라는 소설로 데뷔한 작가는 이후 파리로 유학하여 니체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이후 그는 독일, 오스트리아, 소련, 일본, 중국 등을 여행하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러한 경험은 이후에 출간된 소설의 바탕이 되었다. 이 책도 여행 중 만난 요르기오스 조르바스와 갈탄광 개발 사업을 했던 경험이 소재가 되었다.
주인공 ‘나’는 갈탄광 사업을 하러 크레타 섬으로 가는 길에 어느 항구에서 알렉시스 조르바라는 60대 노인을 만난다. 그는 자신이 광산일에 경험이 많다며 고용해줄 것을 요구하고 '나'는 책벌레인 자신과 완전히 다른 성향의 조르바에게 매력을 느껴 섬으로 데려간다.
섬에서 ‘나’와 조르바는 사장과 광산 책임인부로 일하며 마을의 오두막에서 함께 지낸다. 그러던 중 조르바는 섬의 여관 주인 오르탕스 부인과 연인이 되고 ‘나’는 마을의 젊은 과부 델리카테리나에게 관심이 생긴다. 조르바는 내게 과부와 사귀라고 말하지만 ‘나’는 계속 망설인다. 어느 날 젊은 과부를 짝사랑하던 젊은이가 자살하고 마을 사람들은 죽음의 책임을 과부에게 전가하며 비난한다. ‘나’와 조르바가 부당하다고 항의하지만 마을사람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라고 말하며 카테리나를 살해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르탕스 부인도 병으로 세상을 뜨고 조르바와 나는 광산에 케이블을 설치하는 일에 집중한다. 마침내 케이블 공사가 끝나는 날, 케이블 기둥이 무너지고 탄광 사업은 완전히 실패한다.
모든 것을 잃고 조르바와 헤어져 섬을 떠난 ‘나’는 자유로운 조르바를 동경하면서도 여전히 여행과 독서로 시간을 보내고, 몇 년 후 조르바가 죽었다는 편지를 받는다.
사업을 하러 섬으로 들어가면서도 그다지 돈 버는데 관심을 보이지도 않고, 고용인인 조르바를 만나면 영혼의 동반자처럼 반갑게 대할 뿐 진짜 사업 얘기는 하지도 않는다.
도대체 ‘나’는 왜 크레타 섬으로 가는 걸까? 마지막까지 읽고 나면 그저 ‘나’를 옭아매던 얼마간의 재산을 사업실패라는 핑계로 그럴듯하게 없애버리고 자유로워지고 싶어서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고전이라지만 내겐 ‘나쁜 남자’처럼 매력 있지만 사랑하기엔 쉽지 않은 작품이다.
어떤 점이 좋았고 무엇이 불편했을까?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생각해 보았다.
첫째, 애국에 대하여
한 때는 이놈은 터키 놈, 저놈은 불가리아 놈, 또 이놈은 그리스 놈 하고 구분했었죠. 대장, 난 조국을 위해서라면 대장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못된 짓을 저질렀다우. 멱을 따고, 약탈하고, 마을을 불태우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온 가족을 몰살하고...... 왜냐고요? 그건 그들이 불가리아 놈들이고 터키 놈들이었으니까죠.
...
하지만 대장, 이제는 나도 생각을 좀 하고 사람을 보죠.
...
난 모든 사람이 불쌍할 뿐이예요. 사람을 보면, 비록 내가 잘 자고 마음에 아무런 시름이 없어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p.393~394)
작중에서 조르바는 젊은 시절 그리스의 독립 운동을 한 인물이다. 자고나면 국경선이 바뀌던 혼란한 시절, 그는 독립 투쟁 중 의도치 않게 적국 사람들을 여럿 살해하고 그 과정에서 선량한 사람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주고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 그리고 ‘나’에게 말한다. 세상이 정한 애국이나 정의, 도덕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정말 절대적으로 정의로운 가치관이란 게 존재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둘째, 자유에 대하여
아침 일찍 일어나 과수원으로 가서 체리 한 광주리를 샀어요. 그리고 구석에 숨어서 먹기 시작했죠. 먹고 또 먹고, 배가 터지도록 처먹었죠. 그랬더니 배가 거북해지면서 구역질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모조리 다 토했죠. 대장, 다 토했다고요. 그러고 나서는 체리에서 완전히 해방됐죠. 다시는 눈길조차 주지도 않아요. 난 자유로운 인간이 됐단 말입니다. 그 후로는 체리를 보면 ‘너하고는 더 이상 별 볼일이 없다’라고 말해주죠. 술도 담배도 마찬가지죠. 아직도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지만 내가 바라기만 하면 당장 끊을 수 있어요. 고향이나 조국도 마찬가지고요.
(p.343)
질리도록 체리를 먹고 토했듯이 사랑하는 고향도 조국도 모든 걸 걸고 지겹게 사랑했노라. 그래서 이젠 자유로워졌노라고 말하는 조르바. 조르바가 말하는 자유로운 상태는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책에서 관념으로 자유를 배울 때 그는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사랑함으로써 미련조차 남기지 않는 진짜 자유를 얻는다. 배움도 짧고 책도 전혀 읽지 않는 조르바지만 책벌레인 ‘내’가 영혼의 동반자이자 스승처럼 의지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현실에서 이 방법을 그대로 따라하기엔 무모하지만 그래서 더욱 조르바의 자유가 부럽다.
셋째, 조르바의 여성관
여자들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란 없다고요. 분명히 말씀드리죠. 여자들은 병약한 존재고 불평꾼이란 말이오. 만일 사랑한다고, 원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당장 울음보를 터뜨려요. 전혀 원하지 않거나 심지어 질색인 남자라도 말이오. 여자가 ‘싫어요’라고 말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건 전혀 별개의 문제예요.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여자들이란 항상 자기를 봐주고 탐내는 남자를 바란단 말이오.
(p.90)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이런 성의식을 가진 인물을 만난다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인 20세기 초반의 성의식이 지금과 같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대놓고 여러 차례 여성을 폄하하는 발언을 하고, 여성을 비속어를 섞어 성적으로만 묘사하는 장면은 너무 불편하다. 작가에겐 평생 동안 여자사람과 인간적인 교류를 할 기회가 없었던 걸까. 성평등의식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여성관을 제외하면 예절이나 도덕이라는 필터가 없는 조르바의 언행은 권위에 눌려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돌직구들이라 작중의 ‘나’처럼 대리만족하는 독자가 많을 것 같다.
그리스 역사에 어둡고 작품을 관통하는 불교와 니체의 사상에 대해 잘 모르는 채로 정리한 리뷰라 아쉬움이 크다. 한 번 읽고 덮기에는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다. 훗날 독서력이 좀 더 향상되었을 때 다시 읽고 리뷰를 쓴다면 오늘보다는 낫지 않을까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