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 머리. 어쩌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이게 내 별명이다.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외삼촌은 나를 토끼 머리라고 불렀다. 그렇게 나는 토끼 머리가 됐다. 토끼 머리를 지닌 인간. 반인반수(半人半獸). 물론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외삼촌은 엄마가 죽은 뒤 내가 사람 노릇을 할 때까지 돌봐준 고마운 분이다. 그러나 이 괴상한 별명 때문에 나는 외삼촌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다. --- p.10
[토끼 머리가 토끼 몸통을 구합니다]
나는 인터넷 게시판을 돌아다니며 글을 올렸다. 당시 기분으로는 토끼 몸통만 구한다면, 바늘로 꿰매든 접착체로 붙이든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의 완벽한 토끼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 p.33
그가 내 이야기에 눈물을 보이며 나를 꼭 안아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가 되려면 교합을 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내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던 걸 미리 밝혀 둔다. 그 미친 짓에 합의했으니 말이다. 나는 옷을 벗었고, 그는 내게 키스를 퍼부었다. --- p.36
시간이 흐르자 토끼 인간들은 나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내 몫의 먹이를 훔쳐 갔고, 밤마다 나를 때리고 할퀴 었다. 토끼 머리 주제에. 그들은 말버릇처럼 나를 무시했다. --- p.59
넌 토끼 머리잖아. 왜 토끼처럼 굴고 이 난리야. 어서 죗값을 치루고 돌아와. 사람처럼 살 수 있도록 도와줄게. 몇몇 지인이 나를 찾아와서 설득했다. 어린아이들도 부모를 졸라 나를 찾아왔다. 아이들은 여전히 나를 좋아했다. 부모들은 위험하다고 했지만 아이들은 나를 만지지 못해 안달이었다. 어느 날, 아이 중 하나가 철창 안에 손을 넣고 나를 쓰다듬었다.
--- p.62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 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 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서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 p.13
당신은 아직도 그날 밤을 기억한다. 희영이 써온 긴 글을 처음으로 읽고 들었던 순간의 충격을. 그곳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아 차갑게 언 발의 감각을 느끼며, 그녀의 글을 읽고 있던 스물에서 스물하나가 되어 가던 당신의 모습을 기억한다. --- p.24
당신은 지나가는 말로라도 희영에게 칭찬을 한 적이 없었다. 희영이 지닌 통찰력, 글쓰기 능력, 절제력을 지니고 자기 삶을 운영하는 능력에 대해서. 희영이 얼마나 드문 사람인지, 어떤 의미에서 강한 사람인지 이야기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었는데도. 당신에게 그럴 주제가 없다는 생각이었을까,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순간 당신의 초라함이 더 분명해지리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 p.31
희영은 차분한 표정으로 정윤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정윤의 말에 어떤 반박을 할지 궁금했지만 희영은 알겠다는 대답만 하고 말을 잇지 않았다. 그다음 회의 자리에서 희영은 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자신이 쓰고자 했던 주제를 폐기했다. --- p.49
희영은 열어놓은 창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 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는 생각만으로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랬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달랐겠지만.
--- p.58
사고사나 타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 생각에 집중하다 보면 화가 치밀었다. 그렇지 않다는걸 너무 잘 아니까. CCTV에 다 찍혔으니까. 카메라에 찍힌 동생의 동선대로 움직여 본 적이 있다. 동생은 혼자 걸었고 혼자 건물에 들어섰고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 동생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층이 바뀔 때마다 비상문 표시가 나타났다. 그 표시를 따라 계속 오르다 보니 정말 대피 하는 기분이었다. 그 끝에 희망이 있다는 표시 같았다. 끝에 다다라 비상문을 열었다. 옥상이었다. 그다음엔? --- p.12
사람마다 시력이 다르듯 존재의 어둡고 습한 부분을 유독 잘 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남들은 찾지도 못하는 얼룩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남들은 듣고도 들은 줄 모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 감각이 그쪽으로 유별나게 발달한 사람들. 나는 신우가 그런 사람이었다고 믿는다. --- p.16
입대한 다음에, 야간 보초 설 때 많이 울었다. 고요한 어둠을 마주하면 신우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악마도 잠들어 나를 조롱하지 않았고, 우는 소리를 내서 누군가를 깨우지만 않으면 아무 방해 없이 오래 울 수 있었다. 신우야 왜 그랬어, 라고 백번 물어보다가 신우야 미안해라고 백번 사과하고, 이기적인 새끼 지독한 새끼라고 백번 욕했다. 까만 허공은 신우 대신 내 질문과 사과와 욕을 받아먹었다. 무섭게 무겁도록 짙어지던 밤. --- p.23
자살이 어때서. 자기를 죽이는 게 뭐 어때서. 다들 조금씩은 자기를 죽이면서 살지 않나? 자기 인격과 자존심과 진심을 파괴하고 때로는 없는 사람처럼, 죽은 사람처 럼, 그러지 않나? 그렇게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끔찍할 수있다. 그럼 죽을 수 있지. 죽는 게 뭐 이상해. 자살이라고 달라? 남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자기를 위해 죽을 수도 있지. 자기를 구원하는 방법이 죽음뿐인 사람도 있지. --- p.48
너는 행복할 수 있어. 다들 행복하려고 안달이지. 난 그게 끔찍해. 신우야, 죽지 마. 일단 살아. 그럼 다 잘될 거야. 무책임한 소리. 형이 내 미래를 알아? 너도 모르잖아. 모르는데 왜 죽어. 난 알아. 어떻게 알아. 뭘 알아. 네가 신이야? 형은 보면서도 모르지. 인간 진짜 징그러워.
--- p.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