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 p.17
우리는 갑작스럽게, 서투르게, 뜨겁게, 고통스럽게, 미친 듯이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절망적이라는 말도 덧붙여야겠다. 서로를 소유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을 충족시키려면 실제로 서로의 영혼과 육체를 송두리째 받아들여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p.23
나는 이 비참한 기억들을 거듭거듭 뒤적이며 나 자신에게 묻는다. 그때부터였을까, 내 인생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그 아득한 여름의 빛 속에서였을까. --- p.24
돌이켜보면 내 젊은 날은 달리는 전망차가 일으키는 아침 눈보라인 듯 열차 승객의 눈앞에서 흩날리는 휴지조각처럼 창백하고 반복적인 파편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훌쩍 지나가버린 듯하다. --- p.27
아홉 살에서 열네 살 사이의 소녀들 중에는 자기보다 나이가 두 배 또는 몇 배쯤 많은 나그네 앞에서 자신의 참된 본성을 드러내는 아이들이 더러 있다. 자기에게 매료된 나그네에게 그녀들은 인간이 아니라 님프의 모습(즉 마성)을 보여주는데, 나는 이 선택받은 소녀들을 ‘님펫’이라 부르고 싶다. (…) 야릇한 기품, 종잡을 수 없고 변화무쌍하며 영혼을 파괴할 만큼 사악한 매력이야말로 또래 가운데 님펫과 어중이떠중이를 가르는 기준이다. 롤리타와 같은 부류는 남들이 들어갈 수 없는 매혹적인 시간의 섬에서 노닐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때그때의 현상이 지배하는 공간적 세계에 훨씬 더 종속된 채 살아간다. --- p.29
그녀를 알아보는 찰나에 섬광처럼 떠올랐던 그 영상, 그 전율, 그 충격을 어떻게 표현해야 그 강렬함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내 영혼의 진공은 그녀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구석구석 남김없이 빨아들여 내 죽은 신부의 모습과 하나하나 비교해보았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잠시 후 이 새로운 소녀, 이 롤리타, 나의 롤리타는 그녀의 원형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 p.66
나의 롤리타는 꿈 많은 천진함과 섬뜩한 천박함을 동시에 지녔다. 광고나 잡지 사진에 등장하는 들창코 아이처럼 앙증맞기도 하고, 구대륙의 (짓밟힌 데이지꽃과 땀냄새를 풍기는) 어린 하녀처럼 어렴풋한 관능미도 있다. 시골 갈봇집에서 어린애로 변장한 젊디젊은 매춘부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그 짙은 사향 냄새와 진흙탕 속에서, 그 더러움과 죽음 속에서 문득 티 없이 맑고 깨끗하며 다정한 일면이 드러나기도 하니, 오 하느님, 오 하느님.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이 롤리타가, 나의 롤리타가 해묵은 내 욕망을 되살려냈고, 그리하여 롤리타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 p.74
내가 미친 듯이 소유해버린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의 창조물, 상상의 힘으로 만들어낸 또하나의 롤리타, 어쩌면 롤리타보다 더 생생한 롤리타였다. --- p.103
님펫을 어루만질 때의 희열에 견줄 만한 기쁨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느낌의 수준이 다르고 차원이 달라서 아예 비교할 수도 없는 희열이다. 우리가 아무리 말다툼을 해도, 그녀가 심통을 부려도, 온갖 소란을 피우고 오만상을 찡그려도, 천박하게 굴어도, 이 모든 상황이 너무 위험하고 지독하게 절망적일지라도 나는 스스로 선택한 낙원에 깊이 빠져 헤어날 수 없었다. 비록 하늘마저 지옥불의 빛깔을 닮았지만 그래도 낙원은 낙원이었다. --- pp.265-266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내 비록 다리가 다섯 달린 괴물이었지만 너를 사랑했다. 내 비록 비열하고 잔인했지만, 간악했지만, 무슨 말을 들어도 싸지만, 그래도 너를 사랑했다, 너를 사랑했다! 그리고 때로는 네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고, 그때마다 지옥의 괴로움을 맛보았다, 나의 아이야. 롤리타, 씩씩한 돌리 스킬러. --- p.458
우리가 기괴하고 짐승 같은 동거생활을 하는 동안,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의 롤리타는 날이 갈수록 가정생활이 아무리 불행해도 근친상간의 패러디 같은 관계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이 고아 소녀에게 마련해준 삶은 그렇게 보잘것없었다. --- p.462
지금 나는 들소와 천사를,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물감의 비밀을, 예언적인 소네트를,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떠올린다. 너와 내가 함께 불멸을 누리는 길은 이것뿐이구나, 나의 롤리타.
--- p.4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