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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나무가 몸을 열다 껍질에 대한 명상 벽 뻐꾸기가 열한 점을 울릴 때 별을 팝니다 어느 몽상가의 푸른 침묵 목어 깃의 여정 어둠을 재편집하다 장미향기 치료사 하얀 물고기 눈부처는 그림책이다 결승문자 개복숭아나무 빈집, 별자리로 내걸리다 소리의 껍질 속으로 달섬 히말라야를 넘는 새 단청하늘 자작나무숲, 그늘에 들면 2부 거울 속에 사는 사과 무형식무반주 장미정원 그늘을 경작하다 새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범람 빈둥지증후군 운학문매병 이상한 날개 달에게 과적 가뭄, 그 얼룩무늬 가방 혹은 여자 철물점 아저씨는 새털구름이다 그믐 인면와당 3부 기린보다 긴 목을 가진 겨우살이 깊이 혹은 가벼움 때론 주석이 필요한 삶이 있다 스키드마크 어둠의 화석, 그 단면 낡은 것은 우리의 어머니 우리 모두 농담처럼 새고 있다는 것을 나의 이름이 닿지 않는 저녁 지그재그, 계절이 낙서처럼 머물다 가고 수상한 벽 달항아리 당신의 바다는 안녕하나요 휘어지는 동안 바람은 정규직 대각 4부 먹고양이가 있는 골목 벼랑 캔버스 100호, 물거울에 빠지다 클립 속의 여자 주름을 모으는 손 묵은 거울 어탁 겨우살이 삶과 죽음은 한 문장이다 무증상 감염주의보 백목련, 영면에 들다 물 위의 남자 은행나무수선집 잠 위를 걷다 휘발된 말들은 모두 어느 행성으로 날아가 쌓이는지 감을 잡다 박새, 바람의 갈피를 넘기다 해설 지상에서의 삶을 천상의 노래로 부르다│ 이승하(시인ㆍ중앙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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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 그늘에 서면
초가을 빛이 모로 누운 자작나무 숲 여름내 키워놓은 두툼한 그늘 한 자락을 들춰보면 꾸다 만 반쪽 꿈과 태우지 못한 붉은 심장들 남아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자작자작 한 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계절이 지나가는 자작나무 숲 그늘에 서면 부스럭대던 발소리는 돌아오지 않고 초록 내부를 관통하며 빠져나오는 느린 물소리 한 가닥 따라가 봅니다 걷다 보면 엉킨 실마리 하나 찾을 듯도 싶습니다 수직으로 늘어선 외곬 위에서 수평으로 옷을 벗는 저 흰 수피, 자작나무는 천 겹 번뇌를 내려놓고 소슬한 바람을 순하게 놓아 보냅니다 깊고 순한 그늘 속으로 기대어 오는 어린 맨발의 목숨들 혼곤히 잠에 빠져듭니다 바다 건너 화엄華嚴, 자작나무 숲에서 시작된 오래된 이야기는 밤새 어둠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 나무가 몸을 열다 나무는 새들의 경전이다 까막딱따구리 한 마리 저녁 예불을 올린다 부리로 두드리는 목탁 소리 먹을수록 허기지는 식탐을 버리고 딱, 딱, 딱, 오 분 향례를 올린다 나무 깊숙이 타들어 가는 기도 소리 가슴의 물컹한 진언들이 시월 중턱을 붉게 굽는다 벼랑 끝 금강송, 까막딱따구리의 저녁을 뚫고 가는 울림이 내 안에 새살을 들어앉힌다 찰나를 쪼는 무아경의 부리 온몸으로 받아적는 딱따구리 경전 닫힌 나무의 문이 열리고 까닥이던 머리도 꼬리도 사라진다 구멍 속, 無자 한 말씀 발아 중이다 벼랑으로 구르는 솔방울 하나 -------------------------------------------------------------------------------- 낡은 것은 우리의 어머니 잎사귀들이 억세지는 여름, 진초록에 자꾸 어깨가 짓눌린다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구름 통장을 순한 입들이 베어 먹는 동안 놀이동산 같은 꽃노을이 자꾸 등에 달라붙는다 어깨가 무거운 건 진초록이 아니라 저 노을 때문이라고 말하자 몇 수레의 폭풍을 홀로 품은 노모가 꽃노을처럼 웃으신다 서른일곱 그해 봄, 남편을 잃은 세상은 암전되고 분질러진 봄 속으로 유난히도 진한 향기를 흩날렸던 연분홍 찔레꽃, 버짐 꽃핀 순한 눈동자들만 등에 매달려 반짝거렸다 넘겨받은 짓눌린 무게가 메아리를 치고 돌아와 돌덩이처럼 바닥에 쿵- 떨어지면 내뱉은 어머니의 외마디 탄식에 봄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가난한 고갯길은 왜 자꾸 각도를 높이는지 엄마를 따라나선 열세 살 어린 맏아들은 닥치는 대로 어슬렁대는 골목의 새벽어둠을 수레에 싣고 돈으로 환불해야 했다 골목은 밤새, 쥐도 새도 모르게 그만큼의 어둠을 또 채워 두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옥수수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새벽을 깨우는 발걸음, 빗물처럼 스며드는 가난을 퍼내려 애써 보지만 돌아오는 길, 엄마의 광주리엔 찔레꽃 가시에 박힌 달빛만 무성했다 지친 모자母子를 가누지 못하고 골목은 자꾸 휘청거렸다 누런 신문지로 덧바른 판잣집에서 새어 나오는 아이들 웃음소리를 쬐며 대문에 들어서면, 엄마의 모든 시름은 낡은 외등이 외투를 건네받듯 받아들었다 유난히도 진한 연분홍 찔레꽃이 흩날렸던 어머니의 봄은 분질러진 채 그렇게 낡아가고, 아주 오랜 뒤에야 여름이 평면적으로 도착했다 우릴 키운 건 어둡고 가파르며 낡은 것 그러니 낡은 것은 우리의 어머니, 진초록이 억세어가는 밤 홀로 키를 낮추며 깊어가는, 낡은 것들에 대하여 -------------------------------------------------------------------------------- 어둠의 화석, 그 단면 1월 중순 한밤중, 찬 공기를 가르는 여인들 웃음소리로 골목은 따뜻해진다 어둠 틈새로 차곡차곡 쌓이는 함박눈, 몸집을 키우는 흰 골목엔 인기척들 사라지고 투명한 웃음소리만 남아 담장을 넘고 지붕을 넘고, 또르르또르르 골목 어디쯤에서 태어난 나는 지구 반 바퀴를 돌아 골목 어디쯤에서 배회 중이다 돌아 나온 골목 언저리마다 내 발자국을 지우고 별빛들이 눕는다 별빛 아래, 내 발자국 소리 아래, 새 울음소리 덮이고 국화와 수국 철쭉꽃이 덮여 있는 첩첩 어둠 한밤중, 골목들 첩첩 낡고 습한 골목에 불면의 발자국이 지날 때마다 엽서 같은 어린 봄날이 압화로 소환된다 벽장 속 눈깔사탕을 몰래 꺼내먹던 죄목도 하나둘 늘어 물방울로 터지는 소리 첩첩, 먼발치 그녀들 웃음소리 다시 깨어나, 또르르또르르 첩첩 -------------------------------------------------------------------------------- 휘발된 말들은 모두 어느 행성으로 날아가 쌓이는지 1. 숲이 부려놓은 말들 위로 노을의 뼈마디가 잡히는 초저녁, 회갈색 어둠이 내려앉는다 노랑턱멧새 딱새 모두 둥지로 돌아가고 바리대가 되어 여기저기 놓여 있는 왕밤들, 잎맥만 남아 나뒹구는 손바닥이 수화로 말을 걸어온다 눈으로 듣는 잎의 언어에 무수한 반점이 찍혀있다 단단한 말의 흔적들만 남아 점자로 돋을새김 된다 바스락대는 마음을 수화로 남기고 무릎까지 차오르는, 어둠이 뒤섞인 말들을 밀치며 숲을 빠져 나온다 말문을 닫은 숲이 조용하다 휘발된 말들은 모두 어느 행성으로 날아가 쌓이는지 2. 아직 어둠이 밝음으로 환생되기 전, 어둠도 밤새 다비식을 치렀나 보다 휩싸인 안개들 산을 오르고 있다 책장 안에 들지 못하고 방 귀퉁이에 쌓여있던 책들을 낙엽과 함께 태운다 떠도는 한 조각 구름, 스러진 말들을 소각하는 일은 말을 본 거처로 되돌리는 일, 나를 다녀간 들꽃과 새 울음소리, 바람과 노을과 별들의 다비식을 치른다 시인의 홍채 뒷방에 들어 몇 해를 머물다 책으로 거듭난 말들, 연기로 몸을 바꾸어 들녘으로 퍼진다 들꽃들 다시 누군가의 씨방에 들어 다른 의미로 환생하는, 휘발된 말들은 모두 어느 행성으로 날아가 쌓이는지 3. 선거 때만 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돋을새김 되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그들은 국민을 또 한 번 가볍게 들어올린다 도돌이표로 되돌아오는 선거공약 같은 말들이 눈에서 휘발되는 동안, 허공 한쪽이 납작하게 기울고 있다 돋을새김 된 말들이 감옥에서 풀려나는 사이 또다시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은 돋을새김 되고 능선과 능선 사이 거듭되는 태양의 난생卵生, 의미를 쫓던 문장들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쓰는 환생還生의 유전자, 말의 뼈마디가 잡히지 않는 아침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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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전체를 통해 가장 색다른 모습의 시는 「무증상 감염주의보」일 것이다. 중국과 미국과 영국 같은 강대국에서 문제의 질병 COVID-19가 발생하고 증폭되는 현실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식이 느껴지는 시편이다. 하지만 대놓고 비판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불가의 가르침이 그렇다. 무엇을 삼가라고 하지 무엇을 하라고 지시는 잘 하지 않는다. 시라는 것이 그래야 하지 않을까. 은근히. 넌지시. 알 듯 모를 듯.
불자로서 살아오면서 인간들의 부박한 삶과 자연의 질서를 지키는 운행, 즉 삼라만상의 이치에 대해 혜안을 갖게 된 것이 편편의 시에서 느껴진다. 대상 혹은 사물에 대해 깊이 있는 사유를 계속한다면 분명히 우리 시단에서 일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승하(시인ㆍ중앙대 교수) 시인의 말 새들이 머물다 간 가지마다 새 울음소리 쟁여 있습니다. 바람 위에서 기생하며 소멸하는 동안 새겨진 안간힘 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계절이 바뀌는 갈피마다 제 안에서 웅웅 울어댑니다. 결코, 잠재울 수 없는 울음소리들 시의 형식을 빌려 여기 허물처럼 모아 두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