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제1부
나귀 한 마리/ 마부아비/ 금성이발소/ 잡초/ 내 속의 아버지/ 큰 쉴 곳/ 어머니의 부채/ 새벽 닭소리/ 묘비명/ 목조계단/ 밤차의 추억/ 지나온 길/ 피란열차/ 달밤/ 권재은 중사 제2부 모성암/ 증기기관차/ 방성榜聲/ 똥 푸는 날/ 한포 숙부/ 새벽 연필/ 눈 나리는 밤/ 우랑탕/ 비밀댄스홀/ 저 새벽은/ 함 오는 날/ 강릉 일과/ 슬라 잇몸/ 고라니 똥/ 박 서방 제3부 메아리/ 부러움의 등급/ 구름과 풀덤불/ 내가 사랑하는 리듬/ 樂器의 이유/ 고요論/ 고요에 대하여/ 馬頭琴 소리/ 쇠똥 하나가/ 소낙비/ 초록을 마시다/ 미루나무/ 구름 빨래/ 새벽 빗소리/ 몽골에서/ 茶毘/ 낙엽의 뜻 제4부 오미자/ 단풍 사연/ 밤바다/ 부서진 안경/ 관음사/ 금정산성/ 영양에서/ 압록강 돌 이야기/ 우물 개구리/ 해양생태계/ 지난 세월/ 봉쇄수도원에 밤이 깊다/ 가르멜수도원에서의 식사/ 외할머니의 눈물/ 싱거 미싱/ 범내골 시장 정지용(鄭芝溶) 시인께 드리는 편지 |
李東洵
이동순의 다른 상품
|
저 새벽은
어찌하여 고양이걸음으로 살금살금 골목길 걷나 주변 흘끔거리며 담장 밑으로 사라지나 그렇게 다가와 우리 곁에서 불과 엊그제 강아지였던 녀석이 몰라보게 쑥 커버린 어미 개처럼 모두를 놀라게 하는가 닭소리 들으며 미사에 가는 수도원 수녀처럼 발소리도 나직나직 걸어온 새벽은 왜 돌연히 나타난 염소 떼처럼 부산하고 왁자지껄한 아침이 되는가 새벽아 너에게 간절한 부탁 있으니 들으면 누구나 왈칵 울음 터뜨릴 감격의 소식 갖고 오너라 오래 갈라진 땅 드디어 하나 되었노라는 그런 소식 말이다 --- 「저 새벽은」 중에서 빛깔만 보고 그저 감탄할 일은 아니다 땅바닥에 떨어져 바람에 쓸려 다니는 그 모습에 그냥 슬퍼할 일은 더욱 아니다 나무가 잎을 돋게 해서 이 한 해가 서로 어울려 아름다웠으나 이젠 나무가 정을 끊고 단호히 등 떠밀어 쫓아내는 박절과 비정 세상살이도 저 낙엽과 무엇이 다르리 단풍의 울긋불긋한 빛깔은 잎의 가슴에 든 피멍 제 살기 위해 잎으로 보내던 물을 끊고 모진 단절과 작별로 건너가는 시간 사람들은 이런 영문도 모르고 그저 단풍 배경으로 사진 찍어대는데 귀 기울여 들어보라 낙엽이 땅바닥에 뒹굴며 내는 저 소리는 울음이다 흐느낌이다 통곡이다 느닷없이 찾아온 작별과 배신에 괴로워하는 눈물이다 신음이다 --- 「낙엽의 뜻」 중에서 저 구름은 오래도록 먼 곳 다니느라 옷깃이 땀에 절고 찌들어 꾀죄죄하지 어쩌다 큰 강물 보이면 입은 옷 그대로 풍덩 들어가 온몸 담그고 설렁설렁 흔들어 빨래하지 물 줄줄 흐르는 옷은 산맥에 펼쳐 길게 널어두고 잠시 머문 채 쉬며 가끔 낮잠도 잔다네 이렇게 구름떼가 산맥 위에 널어놓은 빨래 풍경은 그야말로 놀라운 장관 한낮 바람과 햇살에 구름 빨래 뽀송뽀송 다 마르면 하얀 옷 냉큼 걸쳐 입고 또 먼 길 떠나지 --- 「구름 빨래」 중에서 어떤 것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어서 놓여나야겠다 고요가 도와주리 자신의 정당함을 자꾸 입증하려고 하지 말아야겠다 그냥 고요하게 제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겠다 온전한 자신 꽉 찬 자유의 느낌은 내가 고요 속에 머물 때 비로소 만나고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것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고요는 내 속의 고요를 불러낸다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 거기에 이미 고요의 공간이 있나니 나는 이 공간을 그동안 너무 잊고 살았다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 줄도 모르고 --- 「고요에 대하여」 중에서 저 어부는 위험을 알고도 물속에 들어가네 저 사냥꾼은 사자 코뿔소가 두려워도 들판에서 짐승 발자국 따라가네 저 의로운 열사는 칼과 총의 숱한 위협 속에서도 죽음을 삶으로 여기며 앞으로 나아가네 아, 불행이란 잠시 휘몰아친 광풍이며 행운은 우연에 의한 것일지니 아무리 큰 고난 휩싸인들 두려움 떨치고 마음 편히 가지려네 내가 줄곧 북 치고 나팔 불며 손풍금 연주하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일세 --- 「樂器의 이유」 중에서 |
|
“일찍이 우리 문학이 지리멸렬의 늪에 빠져 질식하고 있을 때 시인 백석을 불러서 오고, 정신의 혼미를 뒤적이고 있을 때 저 멀리 광야의 홍범도 장군을 불러서 오고, 외롭고 고단한 삶의 기슭에서 울고 있을 때 아코디언에 실린 옛 가요의 체온을 불러서 온 시인”(류근 시인 추천사 앞부분), 이동순 시인이 스물한 번째 시집 『고요의 이유』를 발간했다. 이번 시집은 등단 50주년을 기념하는 시집이라 의미가 남다르다. 시인이 “우리는 고요에 대한 새로운 학습이 필요하다”라고 〈시인의 말〉에서 밝혔듯이 고요에 대한 근원적 갈망과 태도, 완전한 고요, 참신하고 품격 높은 고요에 대한 통찰의 시선으로 가득 차 있다.
류근 시인은 서두에 이어 “이 시인은 풍경과 노래와 이야기가 한 몸을 이룩하는 경지에 이르러서 우리에게 시의 맑고 투명한 몸매를 다 보여준다. 서정과 서사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흑백사진첩 속의 풍경들을 일깨우며 잔잔한 강물을 지어내고 있는 시집. 소리 높이지 않고 부질없는 힘 바치지 않고 시의 진정한 중심에 닿아있는 시편들이 참으로 오랜만에 우리가 시를 읽어야 할 이유를, 고요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를 깨우쳐 준다.”고 말한다. “등단 50주년에 발간되는 자축(自祝)이자 기념시집이 되었네요. 그런 뜻에서 그간 발간했던 다른 시집들보다 특별한 느낌이 듭니다. 이번 시집에 담은 작품은 고요에 대한 시적 탐색입니다. 고요란 잠잠하고 조용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은 죽음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탄생 직전의 두근거리는 기다림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41년 교직생활을 마치고 나서 비로소 고요를 경험했습니다. 무기력한 고요는 망각과 소멸로 이어지지만 무언가를 준비하는 고요는 또 다른 생성과 창조로 이어지지요. 나는 지금 그 무언가를 준비하는 고요의 시간 속에 있습니다.” 이동순 시인의 출간 소회를 들으며 시집 속으로 들어가 보면, 등 뒤 수레에/제 몸보다 더 큰 짐 싣고//가파른 언덕길/아등바등 오르는 나귀 한 마리//나귀의 입에선/열차화통처럼 허연 입김 뿜어져 나온다//내 할아버지도/아버지도 형제들도 모두//그렇게 살다가 갔다/나도 그렇게 허덕지덕 살았다“(「나귀 한 마리」 전문) 시인은 지나온 길과 잡초 같은 인생살이를 보듬으며 “하늘과 땅은/내 돌아갈 넉넉한 집/해와 달은 꽃상여 꾸미는/빛나는 구슬/내 입엔 별 몇 개만 넣어다오”(묘비명)라는 구절로 “큰 쉴 곳”을 노래하는가 하면 “오래 갈라진 땅/드디어 하나 되었노라는” 감격의 소식을 ‘새벽’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땅바닥을 뒹구는 낙엽의 울음과 흐느낌에 귀 기울이며 낙엽의 뜻을 새기는가 하면 몽골 대초원을 떠받들고 있는 쇠똥 하나가 가족 먹여 살리고 황소바람 막아주고, 훈훈한 온기가 되는 서정, 고려인 외할머니의 눈물, 뼈아픈 역사와 우리 사회의 아픔을 성찰하는 시편에 이르기까지 시인이 고요를 익히고 터득하는 눈길은 시종 정갈하고 웅숭깊다. 시인의 말 세상의 소란에 오래도록 휩쓸려 살아와서 그 훤소(喧騷)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듯하다. 아니 길들여져 있는지도 모른다. 대다수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다. 갑자기 고요 속에 앉아있으면 그 환경이 낯설고 불편해서 마음이 차츰 불안해지고 초조와 강박마저 느끼게 된다. 우리 주변에서 여러 여건의 변화로 갑자기 찾아온 고요에 적응 못하고 자기 앞의 시간과 불화를 겪는 경우를 가끔 본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고요를 새로 익히고 터득해가야만 한다. 고요 속에서 나를 다시 가다듬고 호흡도 안정시켜야 한다. 말하자면 고요에 대한 새로운 학습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간 써온 시작품을 정리하며 매만지다 보니 고요에 대한 근원적 갈망과 지향이 나도 모르게 깊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삼 놀란다. 이제 머지않아 완전한 고요에 다다르겠지만 그때까지 참신하고 품격 높은 고요를 하나 둘씩 익혀가야겠다. 등단 50주년이다. 이 시집의 발간으로 자축(自祝)을 삼는다. 2022년 봄 이동순 |
|
이런 시집 드물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요가 쨍한 이명과 몸을 바꾼다. 짐짓 소음과 소란을 한 손으로 밀쳐낸 사람의 단정한 눈길. 일찍이 우리 문학이 지리멸렬의 늪에 빠져 질식하고 있을 때 시인 백석을 불러서 오고, 정신의 혼미를 뒤적이고 있을 때 저 멀리 광야의 홍범도 장군을 불러서 오고, 외롭고 고단한 삶의 기슭에서 울고 있을 때 아코디언에 실린 옛 가요의 체온을 불러서 온 시인.
바야흐로 이제 이 시인은 풍경과 노래와 이야기가 한 몸을 이룩하는 경지에 이르러서 우리에게 시의 맑고 투명한 몸매를 다 보여주네. 서정과 서사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흑백사진첩 속의 풍경들을 일깨우며 잔잔한 강물을 지어내고 있는 시집. 소리 높이지 않고 부질없는 힘 바치지 않고 시의 진정한 중심에 닿아있는 시편들이 참으로 오랜만에 우리가 시를 읽어야 할 이유를, 고요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를 깨우쳐 준다. 이런 시집 드물다. - 류근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