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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차가운 사람·13/나는 텅 빈 초코케이크 안으로 들어갔다·14/평균·16/덜컥·18/하몽·20/체르니, 불가능한 체르니·21/야근·24/해적 0·26/해적 1·28/해적 2·30/발렛·32/표류·33/복도·34/방주·36 제2부 니체·39/교양·40/거미적인 너무나 거미적인·42/기일·46/영업·47/단란·48/애드리브·50/모빌·52/상냥한 사람·54/오와 열·56/여독·60/자맥·62 제3부 채광·65/이명·66/악몽·68/해적 3·70/도핑·72/유족·74/헤픈·76/해적 4·78/우리·80/해적 5·82/해적 6·83/첫눈·84 제4부 새·89/다정·90/무릎·92/청혼·94/갈대·96/라떼·97/종유석·98/나비·102/만월·103/스윙·106/다도·108/불안·110/비트메이커·112 해설 고봉준(문학평론가)·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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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너무 따뜻해서 어서 이 손을 놓아야겠다고 아니 뿌리쳐야 한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럼 나는 분명히 손을 잡은 것이었고 그게 맞았다 허나 그렇다면 손이 없는 내가 손을 잡게 된 것이라면 그것은 뭔가 크게 잘못되었거나 뭔가 크게 아름다운 일에 속하는 것일 텐데 그렇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나는 그때 분명히 손을 잡았다고 믿어도 되는 거겠지? 그 온기와 촉감은 분명하게 살아있는 것이어서 닿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라고
---「차가운 사람」중에서 빛이 모여들면 나는 조금씩 가능해졌다 내가 가능해질수록 나의 기능은 사라져가고 잘 사는 것으로도 잘 죽어가는 것으로도 나에게 작은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았다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빛이 모여들면 나는 완전히 쓸쓸해졌다 나의 쓸쓸은 양털처럼 보드라웠고 독실했다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의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빛이 모여드는 곳에서 나는 가장 멀리 손 흔드는 사람 빛보다 빠르거나 빛나게 빛보다 어둡거나 빛나게 ---「평균」중에서 사랑은 아니지만 자꾸만 소중해지는 사람이 있었다 풍경은 아니지만 점점 더 벅차오르는 나무 아래가 있었다 그늘은 우리 이름을 짓이겨서 만들었을까 나무 아래 작은 미래가 있었고 게으름과 첨탑과 가지 끝에 걸린 하얀 운동화가 있었다 심장은 뛰거나 가라앉고 있었고 침묵하거나 침해하고 있었고 굳이 꺼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심장은 푸른색이라는 것과 심장 속에서는 무수한 틈이 태어나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나무 아래 작은 미래 속에서 새근새근 서로 다른 숲을 그리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다만 몰래 묻어주었던 꽃과 저녁과 서로의 굽은 등을 기억해 기억해줘 추억은 아니지만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내일이 있었다 인연은 아니지만 자꾸만 더 애틋해지는 이야기가 있었다 ---「해적 0」중에서 나는 나와 같이 살고 있어요 우리는 혼자가 된 적이 없고요 나는 내 곁을 언제든 떠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요 나를 살아가는 것보다 오래가는 끝은 없으니까요 영원한 것보다는 그럴듯한 문장 하나 믿는 편이 영원에 더 가까울 테지만 가끔은 또 다른 내가 와서 내가 나와 잘 지내고 있는지 보고 가요 나는요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나에게서 우리라는 말을 배우고 말았어요 아직 한 번도 발음해 본 적 없지만 내가 많아질 때마다 내가 너무 많아져서 헷갈릴 때마다 그 말을 쓰고 싶어요 아무도 우리 사이를 우리의 관계를 인정해주지 않겠지만 언젠가 그 말을 꼭 쓰고 싶어요 나는 내게 무릎을 꿇고 있어요 또 다른 나는 제 살을 발라 아름다운 만찬을 준비해요 너무 행복한데 내가 너무 많아서 다 가진 것 같은데 그런데 그렇다고 내가 좋다는 건 아니에요 그건 정말 아니에요 ---「방주」중에서 새로 들인 화분이 있어 보기 좋았다 둘 자리를 찾느라 애를 먹었다 잎이 넙대대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화분을 계속해서 옮기고 옮겼다 집이 오히려 전보다 넓어 보이고 외로워 보였다 그게 좋았다 요즘엔 반려식물이라고까지 하더라 어디로 옮기든 어울렸고 보기 좋아서 마음이 부요해졌다 신을 모시듯 화분을 고르다 보면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삶과도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는 힘들겠지만 꼭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확신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보기 좋게 살다가 죽었을 때 겨우 머리 하나 들어갈 만큼의 화분에 묻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예쁜 화분에 묻히면 보기 좋게 문드러질 수 있지 않을까 작은 화분 하나에 머리만 묻혀서 거꾸로 매달려서 사지가 분주히 허우적거려서 살아있을 때보다 더 잘 살게 되지 않을까? 유쾌하고 기묘한 숨을 날마다 들이마실 수 있지 않을까? 화분을 들이고 화분을 옮기다 보면 우두커니 쌓인 먼지와 미래들이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화분이 많은 집에는 먼지와 미래가 빈틈없이 잘 섞여 있다 ---「니체」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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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전욱의 시는 아르토의 잔혹극이나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을 연상시킨다. 아르토의 잔혹극은 관객이 공포와 광란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무대 위의 행동과 관객의 내면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이성이라는 벽을 허물어뜨리고, 상징적이고 원초적인 육체적 표현을 통해 관습적 질서에 의해 가려진 원초적인 욕망을 드러낸다. 그가 추구한 ‘잔혹’은 대본 중심의 연극적 전통은 물론이고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모든 외관을 파괴하는 것을 겨냥했다. 쇤베르크의 무조음악 또한 조성(tonality)이 없는 음악을 지향함으로써 조성이 중심인 서구의 음악적 전통에 반기를 들었다. 음악에서 조성이 없다는 것은 어울림, 즉 조화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조성, 화음, 선율 등이 배제된 음악은 난해하면서도 듣기 거북한 것이 된다. 이처럼 모든 파행적이고 전복적인 예술은 장르적 관습이나 전통을 부정함으로써 기존의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의도적인 불편함을 초래한다. 이런 실험적인 예술의 공통점은 ‘이해’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저/이해받고 싶지 않아서였다”(「채광」)라는 강전욱의 화자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아르토는 원초적이고 육체적인 표현을 통해 언어, 즉 대본 중심의 전통을 해체했고, 쇤베르크는 조성을 없앰으로써 조성 중심의 음악적 전통을 부정했다. 그렇다면 ‘이해’를 추구하지 않는 방식의 시 쓰기는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시(詩)가 ‘언어’ 예술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대략 두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언어’에서 벗어나는 것, 가령 사진이나 그림처럼 시각적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언어’라는 조건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언어’를 기존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때의 ‘언어’는 탈영토화 계수가 높은 언어, 즉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탈(脫)기표화된 언어, 강도적(intensive)인 언어이다. 오랫동안 시인들은 이 후자의 방식을 통해 새로운 언어를 생산해왔다. 강전욱의 시 또한 이 계열에 속하는 듯하다. 여기에서 언어는 의사소통, 즉 ‘의미’ 전달을 목표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일상적 세계에 존재하는 특정한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적 작용도 수행하지 않는다. 가령 “축구선수는 친구들을 꺾어 신었다”(「다도」)나 “흰 접시처럼 무릎을 꿇고”(「해적 6」), “손님을 개로 모셔”(「첫눈」)처럼 명확한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진술들이 바로 그 사례들이다. 이런 언어로 쓰여진 시는 비문(非文)을 엮어서 시적인 효과를 연출하거나 의도적으로 미완성을 지향, 즉 미완성의 완성을 겨냥한다. 물론 이러한 작품일수록 ‘언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즉 사물/세계와의 연관성이 해체되면 그때부터 언어는 일종의 자율적 실체가 되고, 시는 ‘언어’로 구축된 자기완결적 세계가 된다. ‘언어’와 외부 세계의 연관성이 끊어진다는 것은 시어를 지시나 의미의 맥락으로 환원시키는 익숙한 해석 방식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때 시의 언어는 그 자체의 질서와 문법에 따라 시적인 효과를 생산하게 된다. 가령 “다한 문장들과 더한 문장들 사이로/다정한 문장 한 줄이 껴 있었다”(「새」)라는 작품을 살펴보자. 이 시의 제목은 ‘새’이다. 이때의 ‘새’가 ‘새(bird)’, 한곳에서 다른 곳까지의 공간, 어떤 때에서 다른 어떤 때까지의 동안 가운데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니, 시인은 잉여적인 정보도 부가하지 않음으로써 의도적으로 모호성을 조장한다. 독자는 다만 ‘사이’와 ‘껴’라는 시어를 통해 ‘새’가 ‘새(bird)’가 아니라는 사후적으로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새’가 ‘새(bird)’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와 거의 관계가 없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한 문장들”과 “더한 문장들”과 “다정한 문장”의 관계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시는 이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으며, 독자 또한 그것에서 표면적인 차이 이외의 것을 발견하기 어렵다. “다한 문장들”과 “더한 문장들”의 차이가 ‘다-’와 ‘더-’의 차이, 즉 양성모음과 음성모음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질감의 차이라는 사실만이 느껴질 뿐이다. 그렇지만 이 차이를 반복적으로 읽으면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 생겨난다. 그것을 ‘시적인 것’이라고 칭하는 것, 따라서 이 시가 ‘의미’를 경유하지 않고 시적인 효과를 생산한 사례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시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대상이 이미-항상 명확한 의미를 갖거나 문법적으로 정확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이 없는 사람들과 오늘을 살아가고 있었다”(「무릎」)라는 진술처럼 때로는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표현이 한층 큰 울림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 고봉준(문학평론가) ■ 시인의 말 10월이 태어났다 짓무른 방과 따스한 이념이 두 볼에 흐르는 해변과 어느 먼 걸음이 태어났다 안개와 안녕 사이에서 사람과 눈사람 사이에서 태어났다 2023년 7월 강전욱 ■ 시인의 산문 애인은 화장실이 급한지 잠깐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