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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그럽기 그지없는
박성규
시인동네 2025.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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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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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제1부

찻잔 13/입춘 아침 14/이젠 봄이라 하자 1 16/이젠 봄이라 하자 2 18/이젠 봄이라 하자 3 20/과식 22/시치미 23/국민연금 2 24/욕심 26/우편물 28/고성능 우의 30/거울 보기도 무섭다 31/맞짱에 대하여 32/불공평 34

제2부


꽈배기 37/만취(晩翠) 38/수제비의 맛 39/고맙다 40/비타민 효과 42/눈 깜짝할 새 43/거미와 나 44/내가 봄 45/때를 놓치다 46/와(蛙) 48/앵(鸚) 49/소통 50/문천도사(蚊川倒沙) 52/벌지지(伐知旨) 눈물 53/형산강 지구대 54/자가격리 56

제3부


새집 59/제비집 1 60/제비집 2 62/제비집 3 64/열암곡 부처 66/도토리 해부학 67/방학 숙제 68/코로나 피서법 70/장마가 설치는 저녁 71/산삼의 효능 72/빈집털이범 74/하루를 삼켰다 76/무적(無籍) 77/동해남부선 열차 78/나락 80

제4부


감자꽃 83/서출지 84/4월 86/복날 88/부양대책 89/기차다 90/헛꽃 92/고욤나무 93/죽어줘야겠어 94/어떤 밤이 좋을까 96/혼자 마시는 술 98/청맹과니 99/공동 소유권 100/입동 저녁 102/상그럽기 그지없는 104

해설 고영(시인) 105

저자 소개 1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2003년 《한맥문학》, 2004년 《시인정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꽃아』 『멍청한 뉴스』 『오래된 곁눈질』 『어떤 실험』 『이제 반딧불을 밝혀야겠다』 『텃밭을 건너온 말씀』 『내일 아침 해가 뜨거나 말거나』 외 다수가 있다.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대구문인협회, 경주문인협회 회원과 〈시하늘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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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09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120쪽 | 180g | 125*204*7mm
ISBN13
9791158967116

책 속으로

종발이 연못에
꽃잎 떠 있다

꽃잎을 건지려고
물을 비웠다

꽃잎은 건졌지만
연못이 사라졌다
--- 「찻잔」 중에서

제법 오동통해진 눈들
큰 것은 꽃눈이고
작은 것은 잎눈이니라

살아오면서
과실수를 가까이 한 적 없기에
그냥 보기만 해서는 알 수 없는 일

상상으로 이름을 붙여 부르다가도
설령 틀렸어도 나중에 제대로 알면
제대로 불러 주기로 하면서
틈만 나면 과실수를 점검한다

사과꽃도 그랬고 배꽃도 그래서
과실수 꽃이 예쁘다는 것은 알지만
살구일까?
자두일까?

찬 기운 맴돌아도 봄은 봄
생각만 해도 군침 도는 마음
성급하다
--- 「이젠 봄이라 하자 3」 중에서

이른 저녁을 먹으며 반주로 두꺼비 한 병을 잡았다. 취기가 올라도 시 한 줄은 읽고 자야지 하고 시집을 펼쳤지만 한 줄도 읽지 못하고 잠이 들어 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늦게 퇴근한 아들이 꽈배기 두 줄 사다가 머리맡에 놓고 가는 바람에 부스럭 잠이 깼다. 이내 또 잠들었다가 새벽에 깨어 커피를 타서 꽈배기를 먹었다. 가라는 장가는 안 가고 아비 생일에 꽈배기나 사 들고 오는 녀석과 그걸 요깃거리로 뜯고 있는 우리 부자가 안쓰러웠다. 다시 시집을 펼쳐 들었다. 배배 꼬인 시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 「꽈배기」 중에서

딱히 할 일도 없는 겨울이지만
한파와 코로나 19로 옴짝달싹 안 하고 자가격리하듯 보내는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초저녁잠에 취했다가
눈을 뜬 늦은 밤
TV에서 〈동행〉이란 프로가 저 혼자 떠들고 있었다.

채널권 싸움에서 진 후부터 TV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아무렇게나 살아도 특별하게 귀에 들어오는 것도 없었는데
이날 따라 스물두 살 아빠의 육아일기가 눈물 흘리게 만들고 말았다.

한 사내의 육아일기를 보면서 깨달았다.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했던가.
월급쟁이 시절 지나고 딱히 벌이도 없지만
굶지 않고 세상사 신경 끄고 살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TV의 저 사연보다는 너무 편하고 안일하게 살아온 날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부끄러웠다.

지금껏 함께 동행한 것들이여, 고맙다.
일일이 호명할 수는 없지만
삼라만상이 움직이는 이 순간에
내가 누군지를 일깨워준 것들이여, 고맙다.
동행을 위해 애쓴 것들이여, 고맙다.
--- 「고맙다」 중에서

여생을 보내려 지은 집에
제비 부부가 전세 들었다

먼 길 온다고 고생했으니
계약서도 없이
올 한 해 편히 살다 가라고
눈인사로만 계약했다

답례하듯 이내 공사를 시작하여
알콩달콩 살 것 같더니만
공사 도중에 중단하고 말았다

세간에
건축 자재비가 상승하여
공사를 못 한다는 소문이 흉흉했었는데
저들도 자재 조달이 힘겨웠던 것일까

한 달여 후 다시 돌아와
공사를 재개했지만
집이 너무 작았다

내 보기에도 좁지 싶은데
새끼까지 부양하려면
턱없이 작은 집이었다
--- 「제비집 1」 중에서

어떤 부처는 서 있고
어떤 부처는 앉아 있다

누워 있는 부처도 있지만
엎드린 부처도 있다

사바세계에서는
서 있기도 하고 앉아 있기도 하고
누워 있기도 하고 엎드려 있기도 하지만
생사 지옥 벗어나기 위해선
어떤 모습이 제격일까

자세가 중요하지 않으니
상에 얽매이지 말라고
코 닿을 듯 엎어져 있는
열암곡 부처

--- 「열암곡 부처」 중에서

출판사 리뷰

내게 사건이 생겼다는 건,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해 주는 일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사건의 발생은 엔도르핀을 자극하고 그로 인해 나는 살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렇듯 생존은 사건을 통해 드러난다. 세계는 매 순간 셀 수 없이 많은 사건으로 채워지지만 내 일상의 변화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제와 같은 어제였고, 오늘은 어제와 다를 바 없을 것 같은데 내일에의 기대 또한 그렇다. 어느 시점에선 ‘십 년’, 강산이 변했을 기간에도 일상은 한결같았다고 느껴진다. 왜 그럴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사건’은 의미부여를 통해 형성된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지구에서는 매일 수백 차례 이상의 지진이 발생하지만, 그것은 정보일 뿐 나의 관여를 곧바로 촉발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사는 도시, 마을에 지진이 나면 그것은 곧바로 중대한 사건이 된다. 지진의 안전지대라 믿었던 믿음이 무너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경험은 미래의 불안 요소로 즉시 투여되기 때문이다. 즉, 사건은 일어난 일의 성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관여로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에 형성된다. 다른 하나는 사건을 대하는 인식 태도와 관련된다. 우연이나 자연의 섭리처럼 불가항력으로 보느냐, 인과관계의 귀결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전자의 관점에서는 행위 주체의 관여와 선택이 작거나 기회가 줄어든다. 반면에 후자는 모든 사태의 결과에서 원인을 찾으며, 행위 주체의 선택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박성규 시인은 어떤 선택의 결과와 그 결과를 받아들이면서 계속 따라붙는 또 다른 선택의 ‘갈등’을 이번 시집, 『상그럽기 그지없는』을 통해 현미경처럼, 때로는 초점이 안 맞는 돋보기를 들이대듯 확대하거나 즐겁게 왜곡해서 보여준다.

겨울 초입
금방 비가 올 것 같고
금방 눈이 내릴 것 같다

팥 타작도 해야 하고
콩 타작도 해야 하고
무도 뽑아 저장해야 하고
질금도 담가야 하고
메주도 쒀야 하고
오그락지도 만들어야 하고
김장도 해야 하는데
바람조차도
마구잡이로 불어 재낀다

짧은 하루
상그러운 가슴만 끌어안고
날씨만 탓한다
- 「상그럽기 그지없는」 전문

이 시는 표제작으로 시집의 지향을 거뜬하게, 꼭 알맞게 함축하고 있다. 전체 3연은 짧지만 단단한 구성을 보여준다. 1연은 화자의 의지로 어찌해볼 수 없는 계절의 변화를, 2연은 ‘타작과 저장’, 생존을 위해 화자가 계절에 맞춰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작업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3연은 선택 앞에서 갈등하는 화자의 심리를 보여준다. 축약하면, ‘예상-예정-갈등’의 구조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상그럽다’라는 경상도 방언을 통해 이미지가 강화된다. ‘상그럽다’는 “차갑다, 불편하다”라는 뜻을 가졌는데 본문 3연의 “상그러운 가슴만”이라는 표현에서는 ‘차갑다’라는 뜻으로, 제목 ‘상그럽기 그지없는’에서는 ‘불편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방언의 활용은 단순히 ‘시어의 확장’이라는 차원을 넘어선다. 3연의 “오그락지”와 본래 뜻인 ‘무말랭이’를 비교해서 읽어보면 그 차원을 금방 알 수 있다. 물론 품사의 문제도 아니다. 시인은 「부양대책」에서 “잘 뜨기 위해선 가벼워야 한다”는 깨달음을 명제로 보여준다. 이 명제는 근래에 알게 된 것도 아니고, 어떤 사유의 결과물도 아니다. 잘 알려진 과학적 명제일 뿐이다. 다시 상기하게 된 것은 “이름 꽤나 알리고 싶은 요즘/끼니를 위한 부양대책을 고민하”면서부터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곧 갈등 상황에 빠진다. “왜 가벼워선 안 될까”라는 의문은 생활과 시작, 양방향으로 뻗어 나간다. 생활은 짐작해 볼 방법이 없지만, 시작에서 ‘부양대책’으로 삼은 몇 가지 시도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 하나가 바로 인용한 표제작이다.
- 고영(시인)

시인의 산문

여름에는 몰랐다. 한두 해 지나서도 몰랐다. 그런데 한 오 년 지나고 나서야 서서히 보이는 것이 있다. 한 해 농사 별것 없다고 해도, 털 것 털고 딸 것 따고 갈무리해둔 것으로 겨울 양식 삼겠지만 해 넘어가 버리면 여명조차도 이내 따라가 버리는 산 아래 동리가 참 멀다. 첩첩 마음 때문인가.

가까운 저 산이 별리를 만들고 있음을
이제야 깨닫기 시작했다.
산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기 시작했다.

시인의 말

늘그막에
삼재(三災)가 닥쳤는지
한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나마 내게
시(詩)가 남아 있어
견딜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감사한
작금이다.

2025년 9월
박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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