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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렇게 다정합니다
박나나
시인동네 202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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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

책소개

목차

제1부

꽃에 대한 예의 13/우리는 피아노 위에서 저녁이 된다 14/슐레밀의 그림자와 무엇들 16/과자를 귀에 걸어두면 18/구름이 부풀었다 20/블랙의 목례 22/바나나 시클리드 23/새의 모양을 하고 24/오르골 26/절박한 질문 28/흙바닥 29/손톱 30/누군가 툭툭 쳤다 32/파랑 34

제2부

그림자 37/농담은 농담일 뿐 38/목소리의 행렬 40/밤의 자세 42/꽃잎감옥 44/배추흰나비를 따라 45/도도한 숫자 46/젤라또 48/늦봄 50/후유증 52/넌 그런 적 있니 53/가시는 장미의 발톱 54/화분은 조용하고 56/딱딱한 입술 58

제3부

발레리나와 고양이 61/휴일 62/드라이플라워 1 64/드라이플라워 2 66/푸른 얼음 68/낙관의 비관 69/이상한 나라 70/물고기 인간 72/죽·은·잎 74/가벼운 너 76/놓쳐버린 악보 77/방은 꼭 사각이어야 하나 78/틈 80/유리벽의 쥐 82

제4부

너를 끊어내야 해 85/달과 무녀와 훌라후프 86/각진 매듭으로부터 88/엎드린 잠 90/무관심 92/뜨거운 지점 93/블랙홀 94/이제부터 우기가 시작되겠습니다 96/번개가 지나갈 때 98/부끄러운 기도 99/빗소리를 따라갔다 100/거짓 음률이 피었다 102/다짐 104

해설 이송희(시인) 105

저자 소개1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2015년 《문예운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시간이 앉았던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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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12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124쪽 | 184g | 125*204*10mm
ISBN13
9791158967291

책 속으로

꽃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걷자고 했다

그 말을 들었는지
한꺼번에 후르르 쏟아지는 풍경

해바라기가 그녀를 쓰다듬는다
그녀가 해바라기를 쓰다듬는다

희고 창백한 손가락에 감기는 초가을
꽃이 부르는 노래를
한 잎 한 잎 삼키고 있다

잘 나오지 않은 목소리로
노란 입술이 되었다

고개를 숙였지만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 「꽃에 대한 예의」 중에서


책갈피 속에서 걸어 나온 슐레밀
우리는 햇살을 받으며
네모반듯한 유리 정원을 향해 앉았다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말을 건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다

그림자를 팔고 후회하는 슐레밀을 읽는다

가면으로 덮었던 일그러진 얼굴
먼 곳에서 들려오는 동굴처럼 깊은 허밍
무엇들의 그림자를 만진다

물집처럼 고인 시간
응답으로 눈을 바라보고 있다

책에서 빠져나온다
슐레밀이 팔아버린 그림자를 찾을 수 없다

저기 그늘이 그림자를 끌고 걷는다
--- 「슐레밀의 그림자와 무엇들」 중에서


낙관주의자 하나가 빠져나간다

간직하고 있던 모서리가 뿔이 되려다 멈춘다
뒤집어도 흰빛은 돌아오지 않는다

달이다!
주름투성이 필레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
상처 없는 목소리
막 허물을 벗는 순간이 올 거야

오늘의 기분은 창가에 놓인 꽃다발
부드럽고 달달한 슈크림

빨간 제라늄 꽃잎이 흔들린다
점점 투명해진다

당신이 선명해진다
--- 「그림자」 중에서


우리의 춤은 아직 유효합니다

숨이 살갗을 스칩니다
여름의 숨구멍 열어 점프를 합니다
모호한 시간을 견딥니다

잠깐 숨죽인 창문을 거미줄이 가렸습니다
시야가 흐려집니다
발랄한 현기증이 찾아옵니다

고양이와 함께 무대를 만들려던 발레리나는
웃음이 터졌습니다

서로의 매끈한 허리를 빙빙 돕니다

우리는 그렇게 다정합니다
--- 「발레리나와 고양이」 중에서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렸다

커피는 멋진 곳에서 마셔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하늘이 바다로 보이는 하얀 건물
헤겔의 집이라고 했다

기이한 꽃이 피었다
나무 이름을 여러 번 물었고
사람들의 대답은 귀에 들리지 않았다

진공관 속 물고기
입만 뻐끔거리는,

한 여자가 정원 구석구석을 돌며 공깃돌을 숨기고 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사람들이 떠난다

스마트폰에 적힌 이름은 지워지지 않았다
술래는 영·구·적·으·로·죽·은·잎이라고 중얼거렸다

길 위에서 동서남북을 잃어버렸다

몸이 오싹했다
정원이 눈을 떴다

--- 「죽·은·잎」 중에서

출판사 리뷰

눈을 뜨는 기도,
벽처럼 견고한 것이 물러났다.

무사히

나만의 속력으로
멀어진 것을 바라보면

낮은 어조의 리듬이 되었다.

길이 우거진 세상
방향을 잃지 않기로 한다.

2025년 12월
박나나

한 사람의 옆모습이 사라진다.

화분을 가져가라고 하는데
꿈속에서 들려오는 말은 소리가 없다.

향기 나는 선물을 해야지
용서한다는 말과 함께

전화번호가 외워지지 않는다.
조금씩 멀어지는 숫자

내 단어들이 점점 성장할 때
빈손이 가까이 다가온다.
- 「시인의 말」 중에서


박나나의 시는 일상적 사물과 장면을 내면 풍경과 정교하게 연결한다. “푸른 수국을 두 손으로 꽉 쥐면/열꽃이 핀다”(?거짓 음률이 피었다?)거나 “벽시계를 떼어”내자 벽에서 “발레리나와 피아노 치는 여자가/벽에서 나온다”(?도도한 숫자?)는 이미지는, 일상의 사소한 경험이 상상과 감각을 통해 비약하며 내적 생명을 얻는 과정을 보여준다.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계속 확대 재생산되는 시적 경험은 리좀적 사고로써 여러 층위의 연결과 확장을 감각하게 한다. 시집 전반에는 희망과 불안, 낙관과 비관이 공존하는 내면 풍경이 반복된다. 시인은 현실의 무거움과 불안을 견디며 자신을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인간의 모습을 담는다. 시적 장치는 감정과 기억을 시각적·청각적 이미지로 전환하며, 부서지고 흩어진 생각과 느낌이 새로운 생명과 의미로 피어나는 과정을 담아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언어의 불완전성과 동시에 그것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울림을 경험하게 된다. 박나나는 어둠 속에서 말을 주워 담고, 사라져가는 존재와 감각을 기록한다. 무덤 앞, 요양병원, 장례식장 등 삶과 죽음이 맞닿는 장소에서 시인은 사라진 목소리와 희미한 울림을 따라간다. 말과 소리, 이미지가 겹쳐 만들어내는 저녁과 블랙의 순간은, 내면과 기억이 어둠 속에서 살아나는 장면을 담는다.

깊이 본다

아이는 언덕을 단숨에 오르고
거꾸로 미끄럼틀을 탄다
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맹그로브 나무
가파른 계단

건반이 튄다
버려진 지 오래된 고양이는
높은 도를 누른다
우리는 피아노 위에서 저녁이 된다
- ?우리는 피아노 위에서 저녁이 된다? 부분

시인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것들을 말하는 화자의 행위는, 각각 한 연으로 분리된 동사 ‘보인다, 본다, 깊이 본다’를 통해 구체화된다. 이는 단순한 동사의 나열이 아니라, 떠난 자를 향한 관찰과 인식의 심화 과정을 보여주는 장치다. 먼저 ‘보인다’는 시린 말의 뼈나 허기질수록 울창해지는 말의 뿌리처럼, 눈에 들어오는 대상이 막연하게 드러나는 초기 시선을 뜻한다. ‘본다’는 사람들의 멜로디, 기울기, 점으로 사라지는 세부 과정들을 능동적으로 읽어내는 단계다. ‘깊이 본다’는 아이가 언덕을 오르거나 맹그로브 나무, 피아노 위의 저녁 같은 이미지 속에서 대상과 시적 감정이 융합되는 몰입적 시선을 나타낸다. 이렇게 짧은 단어를 한 행씩 나누는 형식은, 단계적 인식과 시적 체험의 심화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결국 관찰이 삶과 존재, 언어와 시간 속으로 깊어지는 과정을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무덤 앞이라는 장소가 주는 죽음과 회상의 분위기 속에서, 화자는 말의 뿌리, 사람들의 멜로디, 아이, 고양이, 계단, 피아노 등 다양한 이미지가 겹쳐 만들어내는 어둡지만 따뜻한 저녁의 감정을 바라본다. 우리는 ‘영원하지 않은 사라져가는 것’을 보고, 그것을 언어와 기억으로 붙들 수밖에 없다. 시인의 말과 피아노는 소리를 통해 이 덧없는 순간들을 간직하며, 사라져가는 존재들을 기록한다.
- 이송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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