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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기억하기 위하여
김현옥
시인동네 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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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제1부
깊고 푸른•13/삶의 문법•14/어떤 하루•16/그해 여름•18/무언극•20/낙엽, 그리고 섬•22/다시 낙엽•26/낯익은 쓸쓸함•27/또다시 낙엽•28/팔월의 끝•30/꿈꾸는 섬•32/아직도,•34/아직도?•35/의자·계단·창문•36/그림자•38

제2부
저녁 6시•41/렌토보다 느리게•42/모데라토 마 논 트로포•44/그래서 꿈은 늘•46/신기루•47/솔로•48/몽상가•50/그,라는•52/타오르는 얼음•53/폭풍, 그리고 사막•54/그럴 수밖에?•56/스케르초•58/길 없는 길•59/그녀의 발•60/외줄 타기•62

제3부
벼랑의 노래•65/상실의 시대•66/추억의 고고함•68/퇴원•69/덧없는 얼굴•70/상처•72/애초에•74/새드 무비•75/그녀의 방•76/바로 저거?•78/관 속의 세월•80/구토•81/대화•82/생의 식탁•84/기적 같다•86

제4부
사물들•89/팽이처럼•90/처형된 말들•91/어떤 개인 날•92/겨울동굴•94/작정한다•95/사양하리라•96/처형•98/빈손•99/그녀는 물이므로•100/이게 전부라는 것!•102/마침내•103/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만•104/잠시 쉼표•106/기도•108

해설 염선옥(문학평론가)•109

저자 소개 1

1994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언더그라운드』 『니르바나 카페』 『그랑 블루』 『룸펜들』 『댄싱 붓다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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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3월 27일
쪽수, 무게, 크기
132쪽 | 194g | 125*204*8mm
ISBN13
9791158967703

책 속으로

세상에 결근 신고를 하고
문득 한가해진, 아픈 데 없이 아픈 그녀
상처의 깊고 푸른 눈이나 들여다본다
그녀의 눈으로 깊고 푸른 강 흘러들고
물살 거슬러 오르는 연어 떼들의
투명한 지느러미 같은 슬픔,
잠시 쉬어 갈 그녀에게 닿아
깊이 잠수하며 물풀처럼 흔들린다

(이제, 만삭인 슬픔의 산란을 위해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세상에 결근 신고를 하고
그녀는 깊고 푸른 바다로 가는 길을 묻는다,
상처의 깊고 푸른 눈에게
--- 「깊고 푸른 전문」 중에서

그녀는 오래 …… 말없음표로 서 있었다 어떤 투명한 적막의 눈이 그녀 속말들 읽어줄 날 기다리며, 우두커니 …… 버스정류장의 표지판처럼

(코발트색 하늘 그려진 맑은 수채화로
세상 한 켠에 걸려 있고 싶어
지쳐 누운 눈빛들 하늘 들여다보면
하늘의 정다운 웃음소리 같은 새털구름으로
무장무장 피어나고 싶어)

숫자만 읽을 줄 아는 근시의 사물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대충 훑어보곤 바쁘게 저마다의 도착지를 챙겨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침내 닿을 곳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그들의 자랑거리인가 …… 후훗, 슬퍼할 일인가, 그들이 그녀 얼굴에 빈 눈빛들을 스티커처럼 붙여놓는다 해서? 거리에 넘치는 광고 포스터에 성실히 불려 다니는 그들의 눈이 묵음된 철자 따위 건너뛴다 해서, 슬퍼할 일인가 과연?

아무 데로도 갈 수 없는 그녀의 슬픔
가서는 돌아올 줄 모르는 세월
무심코 던지는 세월의 돌에도
후루룩 놀라 달아나다 도랑에 처박힌
그녀 꿈의 녹슨 자전거 바퀴

부조리연극의 단출한 소품들처럼
슬픔과 꿈이 우두커니 붙박여 있는
구시대의 무언극(無言劇)
관객 없이 막 내리고 마는

(기다림의 막이 내리고
늙은 슬픔과 꿈의 고요한 포옹)
--- 「무언극 전문」 중에서

그녀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은 완벽한 침묵
그녀가 편지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은 완벽한 백지
그녀가 만나러 가지 않았으므로
세상은 완벽한 부재

세상은 벽이었으므로
그녀는 지독하게 고요한 밤
세상은 사막이었으므로
그녀는 무서우리만치 요요한 밤
세상은 벼랑이었으므로
그녀는 한 발 내디딜 수도 없는 칠흑 같은 밤
--- 「그림자 전문」 중에서

그들 : 저녁에 집에 돌아가면 혼자 뭘 합니까?
그녀 : 벽 보고 앉았거나 허공을 후벼파거나.

저녁 6시면 도 닦듯 앉아 FM에서 젖처럼 흘러나오는 저녁의 클래식,을 마시는 그녀의 클래식한 저녁이 거리의 취한 유행가들이 엉겨붙는 밤으로 건너갈 때, 그녀의 밤을 구부려놓는 생각의 망치질; 그들은 누군가와 저녁을 먹고 앉아 TV를 보거나 산책의 휘파람을 불거나 헛돌아버린 하루를 누군가에게 드문드문 떼어주고 있겠지, 음악의 젖이나 빨며 허공을 후벼파는 시는 그들의 밤과 아무 상관없겠지

그들은그럴테지그들은그럴테지그들은,그녀와주파수가다른그들은그럴테지! 순대처럼 둘둘 말려 그녀의 머리 위에 얹힌 머저리 같은 그 무거운 문장을 이고 욕실로 가는 그녀는 알고 있다, 그녀의 적은 어쩔 수 없는 일상의 빈틈없는 회로가 아니라 먼지처럼 떠돌다 아무 데나 주저앉는 그녀의 헛말과헛웃음과헛발길질과헛악수그리고악취나는한숨임을

그러므로 그녀는 매일 밤 하루치의 늙음을 비누질한다 낡아빠진 걸레 같은 그녀의 일상을 헹구어내며 그녀는 문득 아무에게라도 묻고 싶어진다,
―걸레 같은 것이란?
①걸레처럼 더러운?
②걸레처럼 더러운 것을 닦아주는?

싱거운 그녀, 순결한 걸레로 출구 없는 마음의 벽을 닦는다 『하녀 볼기치기』란 소설을 쓴 로버트 쿠버의 방 청소는 자신이 할까, 하녀가 할까, 아내가 할까, 뜬금없이 궁금해하며
--- 「솔로 전문」 중에서

그래 고작?
(나는 폐허 같은 그녀를 돌아보며 이죽거린다)
어쩌다 보니‥‥‥
(그녀는 더 이상 할 말 없다는 듯 우물거린다)
어쩌다 보니? 그 말, 자기앞수표쯤 되나?
(나는 타향의 빌딩처럼 딱딱하게 되쏜다)
그 말밖엔‥‥‥
(그녀는 말의 빈 지갑을 만지작거린다)
볼거리가 하나도 없군
(나는 이미 아무 데도 보고 있지 않다)
그게, 그러니까‥‥‥
(그녀는 빈혈인 듯 이마를 짚고 기우뚱거린다)
언제까지, 허구한 날, 이럭하면서, 여기?
(나는 최후의 심판자처럼 말의 심장에 악센트를 넣는다)
나 좀 어디 괜찮은 데 데려가 줄라우?
(그녀가 돌아서서 코미디언 흉내를 낸다)
넌 무소의 뿔이라며?
(나는 그녀의 잘난 상처에 뿔을 들이댄다)
여태껏 날 다녀갔으면서 나에게 하는 말이라곤‥‥‥?
(그녀가 막판 대거리를 하려다 모호한 눈빛으로 대신한다)
네 마음 가자는 대로 가
이사할 필요 없으면 그냥 죽치고 살고
(나는 한 방 먹은 목소리로 그녀의 눈빛을 메운다)
세상과 조금 떨어져 있다는 거,
전망 좋은 방 같은 건지도 몰라
(그녀는 돌아선다, 저물녘 황량한 들판의 얼굴로)
--- 「대화 전문」 중에서

무수한 그녀를 통과해 지금의 나에게 도착했다.
나는 그녀였으며 그녀가 아니다.
그녀는 지금의 나에게 이르기 위한 통과 제의.

그녀라는 허물을 벗고 또 벗으며
진정한 나에게로 가는 여행은
내 생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다행한 것은 그 여행을 시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

시는 내 인생의 진실한 길동무,
모든 것이 다 나를 떠나도
내 곁을 지켜줄.

--- 「시인의 산문」중에서

출판사 리뷰

시인의 말

세월의 지층 깊숙이 매장되어 있던 그녀.

그녀,라는 미망과 슬픔과 고통과 고독.

세월 가면 그 어떤 슬픔도 고통도 다 발효되어
생의 거름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그녀를 세상으로 방생한다.

상처받은 모든 고독한 영혼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2026년 3월
김현옥

김현옥의 시에서 시인과 화자, 혹은 내포 화자와 현상 화자라는 구분은 교과서적인 분화 구조로 말끔히 나뉘기보다는, 시인의 내면적 분열과 상처의 결을 따라 미세하게 흔들리면서 재배치된다. 여기서 ‘나’가 의식 표면에서 자신을 고백하는 화자라면, ‘그녀’는 무의식이라는 ‘너머’ 혹은 ‘심연’의 층위를 가리킬 때 호출되는 또 다른 화자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인의 방식이, 단순한 자전적 고백을 넘어서 한 인격 내부에서 서로를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수많은 ‘나들’의 역학을 드러내고 견디는 서정적 실험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저녁 6시, 쇼는 끝나고
그들은 의자에서 자동인형처럼 일어선다
시답잖은 농담 같은 쇼가 지루했는지
그들의 얼굴은 밀랍처럼 딱딱하다
쇼가 어땠어요? 그들은 묻지 않는다
간단한 인사 정도면 충분한 예의
그들은 낙엽처럼 흩어진다,
쇼에 찌든 그들의 위장을 위로해 줄 밥을 향해
잠들기 전까지 그들이 연출해야 할 단막극들은
해피엔딩일까? 언제나 똑같은 레퍼토리?
그녀는 그들의 단막극을 감상한 적 없다

저녁 6시, 그녀는 화면 속의 그녀를 끈다
Comedy's over! 그녀의 독백은 언제나 똑같다
잠들기 전까지 그녀의 모노드라마는 우울한 세레나데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들어본 적 없다
― 「저녁 6시」 전문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행은 위에 인용한 2연의 첫 행인 “그녀는 화면 속의 그녀를 끈다”이다. 이 한 행에는 시인과 내포 화자, 현상 화자라는 세 개의 ‘그녀’가 중첩되어 삼층 구조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지점이다. 첫째, 화면 속의 ‘그녀’가 있다. 이것은 사회적 역할극을 수행하는 페르소나로서의 자아이다. 융이 말하는 페르소나에 해당하며 직장이나 사회적 장에서 ‘그들’과 같은 “쇼”에 참여하는 외면적 자아를 가리킨다. 둘째, 화면을 끄는 ‘그녀’가 있다. 이 ‘그녀’가 바로 시의 현상 화자에 해당한다. “Comedy's over!”라는 독백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역할극이 끝났음을 선언하는 존재이다. 셋째, 이 모든 것을 서술하는 시적 주체가 있다. ‘그녀’를 3인칭으로 관찰하면서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들어본 적 없다”라는 판단을 내리는 이 존재가 바로 내포 화자이다. 내포 화자는 현상 화자의 행위와 독백을 관찰하면서, “아무도 그것을 들어본 적 없다”는 존재론적 고독의 진단을 수행한다. 현상 화자는 자신이 고독하다는 것을 느끼지만, 아무도 그 고독을 들어본 적 없다는 사실까지 인식하는 것은 내포 화자의 몫이다. 이러한 삼층 구조에서 실제 시인은 텍스트 밖에 존재하며, 내포 시인은 허무와 고독을 직시하되 체념하지 않는 태도라는 텍스트 전체의 톤과 세계관을 통해 재구성된다. 내포 시인이 ‘그녀’라는 퍼소나를 선택한 것 자체가 시인과 화자 사이의 거리 설정의 전략일 것이다. 시인이 자신을 ‘나’가 아닌 ‘그녀’로 설정함으로써, 고백의 직접성을 회피하면서도 고백보다 더 깊은 자기 고찰이 가능해진 것이다.
― 염선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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