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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에게 닿을까 봐
이향
시인동네 202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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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

책소개

목차

제1부

돌에게 13/거울 14/너의 방식으로 16/접시는 매일 조심한다 18/나는 공이 되어가고 있다 20/쉼보르스카 22/그렇게 알게 되었을까 24/책상은 태어난다 26/연인들은 눈이 온다 28/아침마다 시집이 도착했다 30/월식 32/악몽 34/슬픔을 확인하러 갔다 36

제2부


작약 39/누가 장미에게 꽃을 주었을까 40/빌어먹을 옐로우 42/삶은 계란 44/두부 같은 날 46/액자 48/오늘의 형태 50/나무는 조금만 잠든다 52/우리는 같은 계절을 겹쳐 입고도 54/바다라는 감정 56/안전문자 58/캐리어 60/당신의 안부 62

제3부


오, 아름다운 잠 65/혼자 있을 때 밤이 왔다 66/허기 68/질문들 70/유빙 72/어쩌다 꽃다발을 받을 때 74/백일홍 75/저녁을 희게 널었다 76/당근마켓 78/풀밭 80/이사 82/낮달 83/엔딩 크레딧 84/우리가 빛이라 생각하는 모든 것 86/해남 88

제4부


북향 91/입김 92/언제까지 잠들 수 있을까 94/세 개의 바다 96/여행 99/백야 100/사주 타로 카페 102/슬픔이 돌아올까 104/그것은 겨울이 주고 간 것 106/문 앞에서 108/긴 계절이 있었다 110/봄 112

해설 고봉준(문학평론가) 113

저자 소개 1

시인. 1964년 경상북도 감포에서 태어나,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시집『희다』(문학동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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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10월 13일
쪽수, 무게, 크기
132쪽 | 194g | 125*204*12mm
ISBN13
9791158967130

책 속으로

진도 대파가 유독 좋다고 해서 파 한 단을 샀다 줄기가 희고 길어서 단맛이 난다는데, 그것을 가지려면 푹 파묻혀 있어야 한다는데

마치 얼굴을 가려주듯 언 발을 감싸주듯 그곳 사람들은 뿌리를 두둑하게 덮어준다는데

언젠가 파 모종을 심을 때
너무 가늘어 흙에 기대 놓은 적 있다

너에게도 그런 시간이 없지 않았을 텐데

그땐 혼자 일어설 수 없어서
그땐 사는 것이 잘 안 되어서

오늘이 점점 가늘어지고 있다

어딘가에 묻혀 있었던 시간이 겨울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렇게 어둠을 알게 되었을까

잘 다듬어진 파는 고양이의 뽀얀 발처럼 고요하다

매일 아침 물을 끓인다
끓었다 식는 것을 반복하는 사이

어떤 것은 흰 것이 될 수 없었는지 모른다
어떤 것은 다 쏟아버렸는지 모른다
--- 「그렇게 알게 되었을까」 중에서

누군가에게 읽히고 싶어 쓰는 걸까
읽히지 않아도 되는데 하면서

읽히는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당신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한 번 두 번 책을 묶을 때마다
읽히지 않는 당신을 더 깊이 잃어버리려고 나는 쓰는 걸까

우리는 여러 개의 계단을 가져야 한다

누군가 당신을 자세히 읽는 줄도 모르고
잘해보려고 더 잘해보려고
눈을 뜬 채 뛰어내린 적 있지

어두울수록 더 큰 잎을 키우려는 식물처럼
반려식물이 되려고 제 잎을 찢는 몬스테라처럼

얼굴을 가지려고 창가에 얼굴을 묻었다

아침마다 아침이 도착했다
화분 속에는 쌓아둔 시집이 넘치고

열어보지도 않고 던져지는 상자들
뜯지도 않은 채 쌓여가는 봉투들

서두르지 않으면 버려질까 봐

당신은 당신과 헤어지는 중이다
--- 「아침마다 시집이 도착했다」 중에서

창문을 닫아 놓았는데 작약이 피었다 너무 큰 꽃이라 가느다란 운명을 그는 가졌다 그래서일까 선뜻 다가갈 수 없는 적막이 붉어지는 날은 얼굴이 바닥에 닿기도 했는데, 그것이 작약의 불안이 되지는 않는 듯했다 당신은 창 안으로 들어온 적 없지만 밖인 적도 없어 슬쩍 비치는 린넨커튼을 가졌다 밤과 낮, 사랑은 어느 쪽을 선택한 적 없지만 작약은 자신도 모르게 한쪽으로 치닫고 있는 듯했다 모든 것을 쏟아낸 애도를 나는 모른다 나른한 미래가 이글거리는 작약 곁에 열흘 정도 그렇게 머무르는 것 같았다 열어둔 창으로 큰 허무가 조금씩 아물고 있다
--- 「작약」 중에서

얼굴이 뭉개졌다

잃어버리는 줄도 모른 채 얼굴이 얼굴을 덮고 있다

그것은 처음부터 얼굴이 아니었는지 모르는데, 온갖 것으로 덧칠된

문을 열 때마다
끝없이 태어나는 얼굴,

익숙한 얼굴로 얼굴을 가리며, 낯선 얼굴끼리 서로를 열고 닫으며

당신을 기억하려고
벽에는 없는 초상화를 걸어 두었다

다리 밑에는 누군가 던져버린 얼굴들끼리
사랑을 지우고

거울 앞에 서면

그 누구도 아니어서
아무것도 아니어서

모르는 얼굴에 얼굴을 묻었다
--- 「액자」 중에서

아침 식탁에서 우리는 흩어졌다

당신과는 식탁이 잘 차려지지 않는다

더 사랑하기 위해 겨울을 준비했는데
아침이 잘 구워지지 않네

사랑도
추울 때는 좀 쉬어요, 누군가 말해줬다

아무것도 쓰지 않기 위해 빈 노트를 달래는
입술이 점점 두꺼워지고 있다

엉킨 머리카락을 뜯느라 어둠을 다 써버렸다

식탁 위로 마른 뿌리가 드러났다
발등이 점점 갈라지고 있다

마주앉아 서로 다른 청원을 하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입김을 소비했는데

아무리 다가가도 뭉쳐지지가 않네

우리는
서로에게 닿을까 봐 조심했다

--- 「입김」 중에서

출판사 리뷰

이향의 시는 일상적 경험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이향의 시가 일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거나 그 세계를 충실하게 재현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나무’가 걸어 나오기 위해서는 이미-항상 ‘나무’가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향의 시에서 ‘밤’은 ‘낮’과 완전히 단절된 시간이 아니라는 것, ‘밤’은 ‘낮’의 이면, 타자, 그림자, 궁극적으로는 잔여와 유사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시인에게 일상은 빠져나오기 위해 선차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낮’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향의 시는 ‘밤’이 열어젖히는 ‘언어’의 행로를 따라 이 ‘일상=낮’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출구 찾기이다.

밤에 나무는 나무가 되지 않으려고 하늘로 오른다 나무에서 멀리 더 멀리 가려고 부글거리며 끓어오른다 밤에 나무는 나무가 되지 않으려고 숲으로 간다 숲은 검게 타올라 어둠의 집을 크게 가진다 밤에 나무는 춤춘다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고 격렬하게 제 흰 그림자를 떨어뜨린다

우리는 사랑을 가지려고 아무렇지도 않게 밤을 밟고 지나갔다

나무는 안다 밤이 되어서야 오롯이 나무가 된다는 걸 숲이 거대한 불안에 휩싸여 희게 뱉어질 때

한쪽 가슴에 죽은 새를 안고

은빛 촛대를 들고
한 잎 한 잎 당신을 생각하느라

나무는
밤에 나무는 조금만 잠든다
― 「나무는 조금만 잠든다」 전문

‘나무’는 시인이 가장 선호하는 시적 대상이다. 첫 시집에 등장하는 “나무는 나무에서 걸어 나오고”(「밤의 그늘」)라는 진술만이 아니라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된 “나무는 빗속으로 희게 타들어 가고 있다”(「나무의 밤」) 등에서 확인되듯이 이향의 시에서 ‘나무’는 ‘밤’과 함께 등장해 화자를 ‘낮’의 잔여로 견인하는 대표적인 사물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무’가 이향의 시세계로 들어가는 유력한 입구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닐 듯하다. 두 번째 시집 『침묵이 침묵에게』 역시 비탈을 기어오르고 있는 나무의 형상으로 시작된다. “검푸른 치마를 걷어 올리고 나무들이 기어오른다”(「비탈」)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통째로 뽑힌 나무의 하부”(「비탈」)를 드러낸 채 비탈에 위태롭게 뿌리내리고 있는 나무의 형상, 시인에게 그것은 검푸른 치마를 걷어 올리고 비탈을 기어오르는 한 여성의 모습으로 각인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인용 시에서 화자에게 ‘밤’의 ‘나무’는 “나무가 되지 않으려고 하늘로 오”르는 형상으로 가시화된다. 나무가 되지 않기 위해 “나무에서 멀리 더 멀리 가려고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나무는 나무이면서 동시에 나무가 아니다. 아니, ‘낮’과 ‘밤’에 걸쳐 있는 이 사이-존재로서의 나무야말로 “오롯이 나무”가 된 상태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낮’의 시간에 속한 ‘나무’는 이미-항상 인간을 전제한 존재, 가령 풍경의 일부이거나 인간의 삶을 위한 유용한 수단, 그러니까 ‘대상’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때의 ‘나무’는 존재하지만 이미-항상 수단이나 도구로서 존재할 뿐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존재하는 것, 요컨대 “오롯이 나무”로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반면 ‘밤’의 시간에 속하는 ‘나무’는 나무를 빠져나온 나무, 나무가 되지 않으려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나무, “나무에서 멀리 더 멀리 가려고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나무”처럼 오직 ‘나무’로 존재할 따름이다. “밤에 나무는 나무가 되지 않으려고 숲으로 간다”라는 진술처럼 시인은 ‘숲’을 나무에서 벗어난 나무의 형태로 인지한다. ‘숲’이라는 새로운 배치의 일부로서의 ‘나무’는 한 그루, 즉 단독자로 존재하는 ‘나무’와 다르다. “밤에 나무는 춤춘다”라는 표현처럼 이러한 특징은 특히 ‘밤’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시인은 숲의 일부로서 다른 나무와 더불어 어둠에 잠긴 상태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형상에서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고 격렬하게 제 흰 그림자를 떨어뜨”리는 듯한 모습을 발견한다. ‘밤’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나무’를 가리켜 시인은 그것이 깨어있다고, 조금만 잠들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인간이, 인간적인 것들이 잠든 ‘밤’이야말로 ‘사물’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 즉 사물의 시간은 아닐까. ‘인간’의 세계가 잠에 빠질 때, 그리하여 침묵할 때 비로소 ‘사물’의 세계가 입을 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때 시인은 이 사물의 목소리를 듣는 존재일 것이다. ― 고봉준(문학평론가)

시인의 산문

돌을 무심히 던져두거나 가끔 쓰다듬다가
어느 날은 물에게 돌려주고 온 적 있다.

잘 말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애도의 방식일까
슬픔은 멈췄으나 그 무늬는 아직 일렁이고,

그것을 뒤집었을 때
우리는 입을 다물었는지 모른다.

당신이 당신에게 가는 것처럼

시인의 말

저녁이면 그림자를 옮겨 심었다.

우리는
뿌리 없는 밤을 이미 가졌는지 모르는 채

곧 사라질 말들,

2025년 9월
이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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