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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구석은 힘이 세다 13/분홍을 감추고 14/암흑 16/탑 쌓는 마음 18/나무의 주름살 20/쉼표 22/벚꽃 23/구름의 밀도 24/콩꼬투리 26/틈 28/그림자가 앓는 밤 30/보호자라는 시간 32/삼월 34 제2부 사람을 감추는 사람 37/파도를 수선하는 섬 38/머뭇거림의 질량 40/시큰거리는 맛 42/물의 옹이 44/고봉밥 바다 46/물방울 탑 48/물 냄새 50/폐선 52/손에 묻은 것들 54/여름 우울증 56/후유증 58/소낙비 60 제3부 마음이 가는 쪽 63/멀찌감치 64/테두리에 관하여 66/연기 68/계단참 70/뒤끝 72/생각에는 생강이 필요해 74/깨진 창문 76/피미엔 나카스 77/붉은 숨, 사라지지 않는 이름 78/근심의 무게 80/군락지들 82/겨우살이 84 제4부 순창, 겨울 눈 87/벽과 벽 88/어떤 계산 90/오메, 오메 92/둥우리 버섯 94/교정 96/직립보행 98/매미 100/해가 증언하는 방식 102/지척 104/우리 집, 혹은 우리 꽃 106/나팔꽃 사랑 108/새하얀 온기 110/구겨진 뒤끝들 112 해설 강동우(문학평론가, 가톨릭관동대 교수) 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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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람을 감춘다
내 눈빛은 대낮 부엉이 눈이다 어부의 뒤집힌 쪽배다 --- 「사람을 감추는 사람」 중에서 세상의 탑들을 보면 다 순서가 있다 가장 넓은 무거운 것부터 차츰차츰 부피와 무게를 줄인 것을 올려놓은 방식 그런 높이들이란 다 끝으로 갈수록 좁아진다는 것 아슬아슬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그건, 염원이나 소원들은 늘 좁은 곳에 넓은 부피로 올려져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높이를 애써 쫓지 말라는 것이다 기원들에는 방해하는 것들이 많지만 대부분 올려지는 것들이나 좁아지는 높이가 아니라 그곳에 무엇을 올려두려는 사람의 손과 마음이 덜덜 떠는 일이라는 것 앞서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밑이 위보다 더 무겁고 넓어서 세상의 높이들이란 무너지지 않는다고 보여주는 것 같지만 원래 무너지는 것들은, 일들은 위쪽부터 시작된다 높은 곳이 좁은 곳만은 아니다 무한한 우주가 뾰쪽한 꼭대기에 그 시작을 밟고 있고 무너질 것을 염려하는 일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끌어모은 정성들이 있다 저 위로 누구를, 무엇을 올려놓는 마음으로 이 좁은 곳에다 소원을 올려놓는 일이다 갈수록 작아지다 결국엔 티끌 같은 그 무욕이 하늘에 닿는다고 탑은 알려준다 합당한 방식으로 쌓은 끝들은 다 하늘이 꼭 잡아주는 것이다 --- 「탑 쌓는 마음」 중에서 여름을 달리던 계절은 아침저녁으로 머뭇거린다 북향이 섞인 날씨들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한 며칠쯤 뒷날에 맡겨놓은 여러 식물들의 성장점 머뭇거리는 날씨들을 겪은 채소나 과일들에선 생장점을 넘은 헛된 맛이 나기도 한다 흐릿한 날 저녁은 허기가 빨리 온다 입속으로 달려가는 숟가락들 내 손과 입이 머뭇거리는 사이 언니의 키는 문지방을 넘보듯 자랐지만 머뭇거렸던 일들은 두려움이라는 문턱 높이가 있다 잔뜩 흐린 반나절 같은 머뭇거림 우산에게 물어도 묵묵부답 같은 그런 질량들은 약 처방전으로 혹은 장롱 속에 접어들었던 간절기의 두께로 소환된다 그런 일례로 보아 계절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식물들의 고유한 처세들 같다 --- 「머뭇거림의 질량」 중에서 돌멩이 하나를 던져보면 물은 금세 구겨진 옹이가 생겼다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헝클어졌다 다시 잠잠하게 펴지는 바다엔 그런 옹이들이 많다 나무의 옹이들이 제 수족을 뚝 떼어낸 자국들이라면 바다엔 사나운 옹이에 받혀 침몰하는 어선들이 있고 풍세 사나운 밤을 지나는 바닷가 마을이 있다 물의 기슭을 물고 있는 아가미 같은 마을 그런 물기슭엔 따개비 같은 집들이 또 있다 물에서 돌아오지 않은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도 짭짤하게 절인 몇 방울 옹이들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의 밥을 버는 일이란 늘 울렁거리는 뱃멀미를 앓기 마련이지만 뭍은 뭍대로 휘청거리기 마련이다 큰 섬 하나를 감고 도는 물결이 있듯 나무의 옹이를 살펴보면 살짝 무뎌진 곳을 돌아나가는 물살들이 보인다 --- 「물의 옹이」 중에서 나는 이 다리가 맞다고 말한다 올 때 보도블록 사이의 무늬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저 다리가 맞다고 말한다 올 때 붉은 지붕들이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무릎 아픈 사람은 느릿느릿 발을 옮기며 다리 위를 걷고 우리는 서로 조금씩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다리 위에 서 있다 다리 아래 시냇물은 돌부리에 부딪혀도 말없이 한쪽으로 흐르고 낯선 다리 위 다르던 눈길들이 같은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 잠시 멈춰 흐르는 물처럼 나란히 바람을 맞는다 --- 「마음이 가는 쪽」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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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언제나 사라진 자리를 지운 듯 보이지만, 실은 가장 깊은 곳에서 빛을 품고 있다. 그래서 빛은 어둠을 통해 더 선명해진다. 김화연의 시가 오래 머무는 자리도 바로 그곳이다. 구석, 그림자, 옹이, 틈 같은 낮고 서늘한 공간들, 우리가 쉽게 지나쳐 버리고 잊어버리는 자리에 시인은 귀를 기울인다. 그늘진 곳이야말로 누군가 기대어 숨 고르기를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자리가 되며, 말하지 못한 침묵이야말로 가장 오래 남는 목소리가 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래서 김화연은 격정과 환희가 아닌, 그늘과 낮춤 속에서 발견되는 삶의 진실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말하지 못한 말, 드러내지 못한 얼굴, 그리고 감춰져 있기에 더 선명한 삶의 결들을 보여준다. 그의 시 속 어둠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고, 구석은 소외가 아니라 위안이며,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라 더 깊은 응시로 나타난다.
집 한 채 지을 때 구석 없인 지을 수 없다 네모난 공간의 기둥 같은 구석들 생뚱맞은 탁자라도 모서리를 붙이면 귀퉁이들도 이렇게 딱 맞게 되는구나 알게 되는 곳 그늘진 구석은 가장 기대어 있기 좋은 곳 가족 중 누구라도 혼자라는 생각이 불쑥 밀려오면 그곳을 빌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 아들이 기대어 있었다 - 「구석은 힘이 세다」 전문 시인은 집이라는 구체적 공간 속에서 ‘구석’이 갖는 실질적·정서적 기능을 동시에 부각시키며, 우리가 자주 지나치지만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존재의 자리를 사유하게 한다. 집이라는 물리적 구조물 안에서 구석은 단순한 공간의 모서리가 아니라 기둥과도 같은 필수적인 구조다. 그러나 시인은 그 물리적 공간을 곧장 정서의 자리로 이행시킨다. “그늘진 구석은/가장 기대어 있기 좋은 곳”이라는 구절은 ‘구석’이 단지 숨거나 머무는 곳이 아니라 ‘마음’이 가장 먼저 찾는 피난처라는 사실을 조용히 환기시킨다. 무엇보다 이 시의 감동은 후반부에서 고조된다. “가족 중 누구라도/혼자라는 생각이 불쑥 밀려오면/그곳을 빌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언술은, ‘구석’이 개인적인 고립의 장소인 동시에 가족 안에서 공유되는 무언의 정서적 연대의 공간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행에서 “아들이 기대어 있었다”는 사실은, 그 공간이 물리적 쉼터였을 뿐 아니라 누군가의 아픔과 외로움이 ‘묵인되면서도 감싸졌던’ 자리였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이 시의 마지막에서 문득 빠져나가는 한 존재의 뒷모습과 그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을 시인의 고요한 시선을 떠올리게 된다. 이렇듯 김화연의 시는 언제나 낮은 자리에서 말을 건넨다. 이런 사정은 「암흑」에서 “우주 대부분은/암흑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둠은 절대적인 빛이라는 것”이라며, ‘암흑’이 결핍의 은유가 아니라 존재의 충만임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김화연에게 ‘어둠’은 삶을 감싸는 다른 차원의 빛이며, 살아 있음의 위안이다. 이러한 ‘구석’과 ‘암흑’의 시학은 이번 시집에서 여러 방식으로 변주된다. - 강동우(문학평론가, 가톨릭관동대 교수) 시인의 산문 다 드러나는 얼굴 표정 속에 다람쥐 입들이 가을의 열매를 구름 밑에 감추듯 겨울을 준비 못 한 슬픔을 삼킨다. 뒤 베란다에 빈방 하나 만들어 찬 바람이 잎들을 숨기듯 늦가을 이야기를 이불 속에 숨겨야 한다. 입동의 갈색 커튼이 드리워지고 빈 저녁이 전구들을 끄고 있다. 시인의 말 지워지는 말들이 있다. 귓가 언저리에 머물던 말들이 그림자 없이 사라지는 순간 차가워진 두 발을 떠나보내지 못해 손바닥으로 감싸던 이별의 언어들 흙탕물에 흠뻑 젖은 내 발에게 “괜찮아” 봄날의 허밍처럼 가슴에 맴돌던 그 한마디가 문득, 그리워진다. 2025년 10월 김화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