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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어둠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최수란
시인동네 2025.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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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

책소개

목차

제1부

서른 - 13/프롤로그 - 14/지워지는 계절 - 16/노을 속에 멈춰 서 있고 - 17/가을 기록 - 18/봄밤 - 20/눈 - 22/시절 - 23/어떤 날 - 24/어떤 이야기 - 26/사랑 - 28/이야기 - 29/사월이라 부른다 - 30/파도 기록 - 32/나비 - 34

제2부


고백 - 37/팔월 - 38/얼굴 없는 새 - 40/기도 - 41/봄 - 42/맨홀 - 44/겨울 - 45/그날의 미래 - 46/어둠을 먹고 사라지는 - 48/13월 - 49/사라지는 밤 - 50/바람 기록 - 52/비가 내리고 - 53/검은 - 54/달과 같은 - 56/검은 새 - 58

제3부


천변 - 61/백지 - 62/새 - 64/어떤 오후 - 65/고요 - 66/노을 - 68/뱅쇼 - 69/밤과 빛과 - 70/새벽 - 72/파도 그림 - 73/밤을 끌어안는 밤 - 74/그림 - 76/끝나지 않는 길 위에 있었다 - 77/겨울 오후 - 78/세계 - 80

제4부


빈 잔 - 83/파도 파도 - 84/다가서는 화원 - 86/인사 - 87/그림자 - 88/기록 - 90/하나의 숲 - 91/계절 - 92/한 사람 - 94/하루 - 95/어떤 인사 - 96/깊은 울음은 외려 눈물을 감추게 될 것이다 - 98/작은 방 - 99/어떤 기록 - 100/밤 - 102

해설 오민석(문학평론가, 단국대 명예교수) - 103

저자 소개 1

서울에서 태어나 철학을 전공했다.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06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116쪽 | 174g | 125*205*10mm
ISBN13
9791158966966

책 속으로

어떤 이별은 황홀하고 난처하다 당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지독했다 단 한 번도 누군가가 다녀간 적 없는 심연 손목에서 붉은 나이테가 돋아났다 흘러내리는 꿈을 바라본다 서로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한쪽으로 기우는 시선 차가운 흔적이 버석거린다 거리를 휩쓸고 가는 바람 낯선 사내는 맑은 눈동자를 가졌다 떠나지 못한 기억의 비늘을 주워 든다 깊고 아득한 나날 속으로 별빛이 사라졌다 눈물을 가둔 입술 한 세계가 짧게 빛났다
--- 「서른」 중에서

상념은 쉽고 배반은 어렵다

길 한가운데에서 물끄러미 밤 풍경을 바라본다 네온이 휩싸인 도심은 밤바람이 가득하다

길을 걷는 행인들
저들의 폐허는 몇 블록쯤일까

다시 돌아서서 길을 걷는 행인들
저들의 행복은 몇 개의 계절일까

돌아보면 모든 것이 아득하고 더 이상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 되어
나는 더 아득해지고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에 차가운 바람을 감싸 쥐며 옷을 추스를 때

아 나는 폐허구나
의미를 두고 나온 발걸음이 천천히 길을 걷고 있고

나를 비껴간 너의 그림자를 생각하다
그 빈자리에 바람 한 점 내려앉아 있는데

아 그것은 아름다웠구나 나는
하염없어지는 것이다
--- 「가을 기록」 중에서

모든 것을 놓았을 땐
아무도 없었다

끝이라 여겨졌을 때
비가 내렸다
가만히 빗소리가 들렸고

나는
더 이상 의미를 묻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바람이 불고
새가 날았다

길을 걸었다

가득한 언덕 위에서
한 번도 가닿지 못한
세계를 생각했다

끝이 없어
사랑했다
--- 「어떤 이야기」 중에서

어떻게 해야
당신의 어둠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 「고백」 중에서

검은 나무에 앉은 오래된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사라지는 숲과 타들어 가는 바다 위에 있다 단 한 번도 불린 적 없는 나의 이름은 얼굴 없는 새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지고 소리 없이 다가와 새겨지고 새겨지는 모든 발자국은 검은 해변의 포말 속에서 나의 생을 기록하는 중이다 나는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가만가만 걸어갈 것이다 허공 속의 긴 햇살이 나의 무릎 위에 내려앉을 것이다 새 한 마리 날아들 것이다 나는 사라지는 중이다
--- 「얼굴 없는 새」 중에서

서로의 빈 잔을 바라보는 것이다 서로의 가득한 잔까지 바라보는 것이다 물이 차오를 것이다 넘칠 것이다 깊을 것이다

서로의 빈 잔을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빈 잔이 되어 너를 바라보는 것이다 다시 물이 차오를 것이다 넘칠 것이다 깊을 것이다

나는 너의 잔을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가득한 잔이 되어 너를 바라보는 것이다

너의 가득한 잔이 나의 빈 잔을 품을 것이다 서로의 가득한 잔이 내 앞에 놓일 것이다

--- 「빈 잔」 중에서

출판사 리뷰

모든 언어(문장)는 근본적으로 대화적이다. 모든 발화는 다른 발화에 대한 반응이며 다른 발화의 발생을 전제로 생겨난다. 이는 독백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독백은 발화자가 자신을 청자로 내세우는 언어이기도 하고, 미지의 잠재적 청자를 가정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대화적 상호작용을 배제한 발화란 없다. 『대화적 상상력』으로 유명한 미하일 바흐친(M. Bakhtin)은 언어의 대화성을 인식론의 층위로까지 끌어올린다. 그에 따르면 “진리란 고립된 개인의 머릿속에서 태어나거나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대화적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집단적으로 태어난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인식은 대화적이다.”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항상 언어가 끼어들고, 그때 사용되는 언어는 근본적으로 대화적이며, 따라서 모든 인식 역시 대화적 관계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발화자는 문장의 대화적 속성을 잘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모든 문장 속엔 이미 타자의 발화들이 들어와 있다. 모든 언어(단어들)는 그러므로 그 자체 이미 겹-목소리의 단어들(double-voiced words)이다.

최수란 시인의 시들은 언어와 인식의 이와 같은 대화성에 대한 민감하고도 끈질긴 반응의 결과물이다. 이 시집의 거의 모든 시에는 화자 혹은 시인의 목소리만이 아니라, “너”, “당신”, “한 사람”이라 불리는 타자와 그의 목소리들이 들어와 있다. 최수란은 발화할 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청자를 설정하고 그에게 말을 건다. 최수란의 시들은 언어의 대화성을 전경화시키고, 자신의 발화 안에 타자의 발화가 들어와 섞이는 풍경을 보여주며, 이 과정을 통하여 세계를 이해(인식)한다. 최수란의 시들은 단성적 언어(monophony)가 어떻게 다성적 언어(polyphony)로 바뀌는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하여 모든 인식에 어떻게 타자성이 끼어드는지를 보여준다.

반쯤 열어둔 창 안으로 한여름의 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있네요 바람 바람이라고 발음하면 바라던 일이 모두 이루어질 것 같아서 오늘 나는 나의 어제를 기록하고 있어요 어느 봄밤 꾸었던 하나의 꿈에 관한 이야기랍니다 당신과 나는 과거를 상실한 채 붉은 가로등이 켜진 비 오는 밤을 걷고 있었죠 골목을 지나 모퉁이를 돌아 막다른 지점에 다다를 때까지 상실된 과거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당신의 어제는 나의 오늘이 될 수 있을까요 푸른 바다를 가르는 하얀 새 한 마리는 등장하지 않았어요 꿈을 기록하면 내가 보이나요 보이는 나는 어제의 나와 같을까요 바람이라고 발음하면 꿈속의 나는 하얀 새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아요 꿈속의 기록은 여기까지입니다만 반쯤 열어둔 창 안으론 여전히 봄밤 같은 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있네요 - 「바람 기록」 전문

최수란의 시에는 “창”의 기표 역시 자주 등장하는데, 그에게 창은 분리의 공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공간을 이어주는 대화적 공간이다.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한여름의 바람”은 실내에 있는 화자의 사유를 자극하고, 화자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회상하며 동시에 “당신과 나”의 상실된 과거를 끌어들인다. 화자는 당신에게 말을 걸고, 자기의 생각을 전하며, 질문을 하고, 대답을 기다리기도 한다. 화자의 이와 같은 발화는 다양한 층위의 대화적 공간을 생산한다. 위 시에는 화자의 현재와 과거가 만나는 대화적 공간도 있고, 현실과 꿈의 언어가 마주치는 공간도 있으며, “당신과 나”의 과거와 “당신의 어제”, 그리고 “나의 오늘”이 만나는 대화적 공간도 있다. 제목의 “바람 기록”은 이들의 발화가 정지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이동하는 언어이며, 이 시가 그런 대화의 기록임을 보여준다. 시인의 사유와 발화에 불을 당긴 바람 역시 시의 초입부에선 한여름의 바람(현실)이었다가 결말부에선 다른 바람, 즉 “봄밤 같은 바람”(꿈속)과의 대화적 관계에 들어간다. 시인은 화자와 당신 사이에 “상실된 과거”가 존재하며 그것이 둘 사이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어떤 문제일 수 있음을 함축하지만, 그것을 구체적이고 특별한 서사로 발전시키지는 않는다. 시인은 다만 바람을 매개로 다양한 층위의 대화적 공간을 생산하고 그것들이 모여 모종의 인식을 형성해 가는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시인은 청자를 무의식의 비가시적 존재로 버려두지 않으며, 텍스트의 표면에 노출하고 그와 대화함으로써 자신의 정서와 사유가 고립된 주관성에 빠지는 것을 방지한다. - 오민석(문학평론가, 단국대 명예교수)

시인의 산문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가득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일까.

시인의 말

네게,

2025년 6월
최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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