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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뼈
진동영
시인동네 2025.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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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

책소개

목차

제1부

은행나무 아래 13/한가운데 생 14/새조개 15/질문들 16/매미 18/초파리 19/거미의 집 20/베타 22/지렁이 23/호박넝쿨의 젠탱글(Zentangle) 24/문어 26/개심사 27/화두 28/매미 2 30/새와 난간 31/수근관증후군(手筋管症候群) 32/산책 34/풀빵 이야기 35/개기월식 36/천장(天葬) 37/감자 파는 남자 38/리어카 40/폐업 41/오후의 농구장 42

제2부


귀가 45/한낮의 자판기 46/경계 47/춤 48/창(窓) 50/개나리 51/간판 없는 분식집 52/잘못 든 길 54/은행나무의 밤 55/만우절 56/달밤 58/동대문 59/사춘기 60/엇박자 62/고추잠자리 63/큰 똥을 누는 꿈 64/커피 타임 66/자전거 집 67/황하 공갈빵 68/달콤한 인생 70/한 생의 낮잠 71/아버지의 방에서 72/채소 파는 여자 74

제3부


파꽃 77/초파일 78/옥수동 79/모기 80/딸기 81/금 82/쥐며느리들 83/득음 84/석류 85/전어 86/달과 가로등 87/외통수 88/밥때 89/유월 90/전생 92/환장 93/양지빌라 94/야생동물보호구역 95/더덕 까는 노인 96/벚꽃과 비닐봉지 97/엉겅퀴와 개미 98

해설 임지훈(문학평론가) 99

저자 소개 1

1978년 대구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05년 《시인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서울 재현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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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07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116쪽 | 176g | 125*204*8mm
ISBN13
9791158966973

책 속으로

오백 년을 살았다는 저 은행나무 아래 오십을 갓 넘긴 듯한 사내가 담배를 피우고 있습니다. 들숨에 십 년 또 날숨에 십 년이 훌쩍 가버릴 듯한 눈을 하고 사내는 다리를 꼬고 서 있습니다. 사내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담배 연기는 나무 그늘 속에서 뿌옇게 퍼졌다가 이내 나뭇가지와 잎사귀 사이 어딘가로 느릿느릿 풀려나갑니다. 은행나무는 숨의 길이라도 세는 듯 나뭇잎을 활짝 펴고 까딱거리고 있습니다. 사내가 발을 비비는 바닥에는 겹쳐 내린 은행잎과 짓이겨진 은행이 더는 갈 곳 없이 쌓여 있습니다. 사내의 발에서 머리 위 저만치 높이 뻗은 나뭇가지까지의 거리,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빛 같은 그 거리, 그 사이로 오래 속을 앓은 듯한 냄새가 물씬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 「은행나무 아래」 중에서

비가 내리면 새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물웅덩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어디서 작은 부리로 비 오는 세상 건너편을 두드리고 있을까?

담벼락에 방울방울 맺힌 빗방울들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제 몸 가득 비 갠 풍경을 오롯이 담고 그만 그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걸까?

해 질 녘의 구름들은 어디로 몰려가는 것일까?

하루 치의 소진과 소멸의 빛이 빨려 들어가는 산등성이 너머로 망설임 없이 다음 생을 건너다보는 것일까?

눈을 깜빡이는 순간에 이 빛들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한밤중 덜 닫힌 냉장고 문에서 나오는 불빛처럼 어둠 저편으로 간단없이 건너가고 있는 것일까?

누운 몸을 뒤척일 때 이불이 접혀 말리는 소리는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취침 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 저 커튼 너머 완전한 어둠 속을 잰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을까?
--- 「질문들」 중에서

단풍나무와 가로등 사이에 거미의 집이 있다.

거미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으려는 듯 다리에 잔뜩 힘을 준 채 집 한가운데서 꼼짝 않고 서 있다.

거미줄에 걸려 발버둥 치는 나방은커녕 거미줄로 친친 감아놓은 하루살이 한 마리조차 없는 거미의 집

거미는 집과 하나가 된 듯 바람이 불면 거미줄과 함께 흔들렸다.

며칠째 꼼짝 않고 있는 거미
며칠째 자신하고만 있는 거미

기다리다 마침내 자신을 잊은 것인지
두 뼘 남짓한 이 집에 여덟 개의 다리를 두고
이미 다른 곳으로 건너간 것인지

점멸하는 가로등 아래
빛과 어둠 사이를 오가며
거미줄이 아스라이 반짝이고 있다.
--- 「거미의 집」 중에서

눈 쌓인 복도 난간 위에 새 발자국이 찍혀 있다.
종종걸음으로 난간 끝까지 걸어간 새
마지막 발자국 옆으로 눈이 흩어져 있다.

십 층 난간에 기대어 서서 바라보면
길 위에 있는 것들이 다 작아 보인다.
작은 것들을 한참 보고 있으면
나도 깃털처럼 가벼워질 것 같다.

눈 사이로 드러난 난간은
작은 날개 모양을 하고 있어
속이 빈 뼈처럼 자잘한 금을 뻗치고 있다.
--- 「새와 난간」 중에서

시소가 기운 쪽으로 저녁의 햇빛이 길게 몸을 누이고 있습니다. 미끄럼틀 끝에는 아직 내려오지 않은 모래가 희미하게 반짝이고, 철봉 아래 매달려 있던 녹(綠)도 아파트 그늘 속으로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난간에 앉았다 일제히 회양목 속으로 들어가는 참새들, 손목을 잡혀 돌아가는 구름도 잔뜩 상기된 얼굴입니다. 혼자 남아 도는 회전뱅뱅이 삐거덕 소리가 아파트 동 간격 사이로 천천히 빠져나가면 1층 어린이집 베란다 아직 돌아가지 않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동생처럼 따르고 있습니다.
--- 「귀가」 중에서

냉장고에서 꺼낸 황도에서
애벌레가 기어 나오고 있다.

벌어진 꼭지 틈으로
쉼 없이 몸과 다리를 놀리며
달콤한 세상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다.

복숭아 둘레를 맴도는 애벌레
가도 가도 복숭아다.

복숭아밖에 모르는 다리
머리를 내저으며
몸서리치고 있다.

--- 「달콤한 인생」 중에서

출판사 리뷰

시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느냐 묻는다면 여러 종류의 답변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질 것이다. 누군가는 시가 ‘문자’를 활용하는 예술이라는 점에 착안해 문장을 쓰는 능력이라 답할 것이고, 혹 누군가는 아무리 문장을 잘 쓴다 하여도 그 내면에 깃든 정서가 풍부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답하며 정서의 풍요로움을 제시하기도 할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누군가는 시를 쓴다는 행위가 곧 타자와 소통하기 위함이라는 주장을 하며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공감의 능력이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 답할 수도 있겠다.

물론 정답은 없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언어화하여 내면의 정서를 풀어내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공통의 분모를 가진다. 그러나 그 방식에 있어서는 쓰는 이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시’란 결국 예술이기에, 개인의 천성과 기질, 지향에 따라 다른 양상이 펼쳐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개별 시인들의 개성이라 논하며 그러한 개성들의 축적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문학사를 완성한다. 결국 문학이란 개별 시인들의 개성이 시간에 따라 누적되고 축적되어 온 역사이면서, 우리가 느낀 바를 온전히 언어로 표현하고자 시도한 응전의 역사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니 이 답변에는 개인의 취향이나 주관에 따른 순서는 있을지 몰라도 절대적인 기준이란 있을 수 없다. 개별적인 시인들의 시적 세계를 통해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어떤 기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언어로는 충분히 말해질 수 없었던 그 시적 진리의 파편을 일별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약간의 단서를 덧붙여 시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 보는 일, 예컨대 ‘눈’이라고 답하고 싶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단순하게는 현상이나 사물을 목격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시를 쓰기 위한 기초적인 작업에 해당하면서, 동시에 본다는 행위를 통해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시에 있어 화자가 본 바를 진술한다는 것은 곧 그러한 대상과 나의 내면을 연결짓는 일이므로 더욱 그러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를 쓰는 일에서 자신이 목격한 세계를 진술하고 묘사하는 행위는 시인이 세계에 언어를 통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는 행위는 가장 근본적인 시적 계기의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엉덩이가 간질간질한 봄날이었어

무덤 위에 앉아 흰나비를 잡으려고 했었지

언젠가 어느 생에선가 내 손가락과 닿았을 법한 긴 더듬이가 까딱했었지

내 엄지와 검지, 그리고 나비의 흰 날개, 딱 그만큼의 거리, 그만큼의 아지랑이가 날아올랐어

그때 절하듯 몸을 웅크리고 큰 똥을 누었어

똥은 이내 똬리를 풀고 뱀이 되어 풀숲으로 사라졌지

뱀이 지나쳐가 누웠다 일어난 풀 사이로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겼어

물결쳐 나가는 뱀과, 내 한 걸음의 보폭 딱 그만큼의 거리

가고 또 가고 가도 나는 계속 무덤을 휘휘 도는 제자리걸음이었어

오래된 무덤의 한쪽은 누가 베어 문 것같이 패여 있어 웃자란 엉겅퀴 마른 잔뿌리가 다 보였지

무덤의 단면에 손을 대자 오래 말라 있던 흙이 한숨처럼 주르르 흘러내렸지
― 「큰 똥을 누는 꿈」 전문

그러나 많은 시인들은 자신이 본 바를 솔직하게 말하기보다는, 그것을 특수하고도 예외적인 현상인 것처럼 만들기 위해 불필요한 언술을 덧붙이곤 한다. 예컨대, 자신이 본 바의 특수함을 강조함으로써 보다 나은 시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오히려 자신이 본 바를 혼탁하게 만드는 것이다. 혹은 자신이 본 바를 부러 꾸미지 않더라도 너무나 상투적인 정서적 진술로 귀결되어 자신의 정서를 잘 풀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라면 자신이 본 바에서 느낀 바를 정확하게 진술하거나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의 문제이거나 혹은 그러한 불완전함을 차마 감내할 수 없기에 누군가의 언어를 반복함으로써 안정성을 추구하는 행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은 결과적으로 자신이 목격한 시적 계기의 순간을 비루하고 상투적인 것으로 전락시키고 만다는 점에서 악수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본 바를 자신의 언어를 통해 비록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가감없이 서술하며, 그러한 서술로부터 자신의 내면에 미처 언어화되지 못한 감정적 편린을 풀어내는 일이 바로 서정의 본령이라 말하고 싶다.

그러한 의미에서 진동영의 시는 서정시의 본령에 가깝고자 노력하면서도 다소간 이채로운 모습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시 또한 여타의 서정시가 그러하듯 구체적이고 섬세한 관찰에서 출발해 시적 화자의 내면에 깃들어 있던 정서를 자기 외부의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풀어내는 일련의 양식적 흐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채로운 것은 그가 좀처럼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정서를 직접적인 언어로 표출하지 않는다는 점이고, 이는 그가 자신의 정서를 풀어내는 방식이 이미지들의 때로는 병렬적이고 때로는 직렬적인 연결을 통해 해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의 시에서, 특히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행간에서 그가 쓰지 않은 것을 읽어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마치, 서술되지 않은 정서가 공백의 자리로 남음으로써, 우리는 그 공백으로부터 직접적인 언어 이상의 풍부한 시적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구태여 비유하자면 이러한 방식은 마치 동양화에서 달을 그리지 않음으로써 달을 그려내는, 혹은 이미지들의 병치를 통해 간접적으로 서사성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양식과 닮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임지훈(문학평론가)

시인의 산문

언젠가 춤이 무엇이냐고 내가 묻자, 춤을 추던 그녀는 대답 대신 저 멀리 허공에다 길게 손을 뻗어 보였다.

마룻바닥 위 다만 부질없이 햇빛 속을 떠가는 먼지와 그 속에 놓인 손끝의 작은 떨림, 그리고 그 떨림 뒤의 고요가 있었다.

시인의 말

한동안 마음이 아팠다. 뭉툭한 연필을 쥐고 종이에 무언가를 눌러쓰면 구내염의 하얀 환부를 혀로 핥는 것 같았다. 중지가 연필과 검지 손톱에 눌려 빨갛게 될 때까지 연필과 종이가 부딪는 소리를 듣고 있곤 했다. 당신을 생각하며 여기 그 소리의 일부를 옮겨 담았다. 한동안 당신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2025년 7월
진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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