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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을 되돌리면 그날이 와
김미사
시인동네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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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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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제1부

신문·13/파쇄·14/틈의 틈·16/역사·18/구구절절·20/도라지 미용실·22/얼룩의 발생·23/하지 감자·24/복음내과·26/소만(小滿)·28/유월·30/정원석·32/7층 여자·33/노가리·34/정동·36/쌀국수 먹으러 왔다가·38/초판·40/아보카도·42

제2부

후제·45/부엉이·46/꼽등이·48/유칼립투스·50/몸의 집·52/여름·54/맷돌호박·55/대조기·56/폭우·58/구두·60/오래된 이야기·62/여름은 가던 길로 가고·64/인사·65/멸치·66/물꽂이·68/접시꽃 네트워크·70/이현동·72/막차·74

제3부

곰 한 마리·77/머드맥스·78/봄을 조문하다·80/고양이 시인·82/나의 은유·83/사유원·84/인연·86/분주한 측백나무·88/청령포·89/한 호흡·90/벼리·92/행위·94/돌탑·95/첫·96/돈을 산다는 말·98

해설 이병국(시인·문학평론가)·99

저자 소개 1

본명 김미옥.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2023년 《문예바다》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6년 대전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수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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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8월 18일
쪽수, 무게, 크기
116쪽 | 125*204*8mm
ISBN13
9791158967994

책 속으로

새벽공기가
신문의 헤드라인을 훑으며 지나가자
가로등 밑에서 오줌 싸던 늙은 개가 부르르 몸을 떤다
오늘의 신문은
사설(社說)이 사설(邪說) 되고
만평(萬坪)이 만평(漫評) 되려다 말았다
정치면은 진흙탕이라 뵈는 게 없고
경제면은 영혼까지 끌어다 산 가상화폐는 가상이 되고
어제 막을 내린 프로야구는 야구공 실밥처럼 터져 순위가 바뀌었다
오늘의 운세엔 운이 새고
사회면 부고란을 보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게 된다
문화면 화려한 K팝 가수들을 조금 더 들여다보게 된다

세상엔
미끄러진 뉴스들이 더 선명할 때가 있다
---「신문」중에서

창문 실리콘이 삭아 틈이 생겼다
그 틈에서 빗물이 새어들었다

의심과 의심 사이
그때부터 너와 틈이 벌어지고 숙성되지 못해
지나가던 바람에 덜컥 걸리기도 했다
맑은 날에도 햇빛은 굴절되어
심장은 멀어져 갔다

가자지구가 봉쇄되었다는 뉴스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갈라지고 틀어진 틈은
공습 사이렌 소리에도
무서움에 숨죽였을 아이의 울음소리에도 있다

반복과 번복되는 전쟁에서 의혹은 참혹으로 번지고
사이를 메우지 못해 쏟아지는 폭력에
사라진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뉴스는 알려주지 않고

집 나간 너의 행방도 찾을 수 없는데

지구를 몇 바퀴 돌아온 햇살에서 화약 냄새가 났다
---「틈의 틈」중에서

플리마켓에서 제목이 지워진 시집을 샀다
뒷장을 보니 1997년 초판이다

책 속에 꽂힌 메모지에 쓴 고백이 안개꽃처럼 말라 있다
밑줄 그으며 읽은 사람을
거기 묶어 두고 싶었나 보다

나는 그해 첫사랑을 보냈다
한 번도 내 것이었던 적이 없는 사월의 연두처럼
봄을 따라갔다

엎지른 김칫국물은
자리를 넓혀 묵은 그림이 되었다

오후 세 시의 햇살은
방치한 기억의 눅눅함을 말리지 못해
시집 밖으로 물러나고

시간 그은 문장은
이전 페이지가 되었다

첫사랑은 제목을 붙일 수 없는 연두의 기억
시집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
---「초판」중에서

겉모습이 다는 아니에요

단번에 빼내야 해요
망설이면 상처가 되거든요
상처 없는 속살이 뭉개지며 미끄러지기도 해요
우리의 미성숙처럼요

나는 주는 것을 좋아하니까
미끄러짐도 함께해요
미숙이 과하면 과숙이 되어
낯가림은 옅어지고 익숙함이 안부를 물어요

어떤 날을 되돌리면 그날이 와
떠나온 곳을 기억할까요
일곱 번씩 이른 밤이 지나도
첫 마음은 단단한 씨앗 속에 묻혀 있어요
---「아보카도」중에서

성수동이 떠밀려 가고 있다

골목의 음악에 이끌려 내려간 지하 옷가게
먼 나라에서 온 크고 바랜 옷
몸의 집들이 공동주택처럼 걸려 있다
거울 속 나보다 큰 집 하나
흩어진 방이다

청바지를 꿰맨 솔기와
밑단 뜯긴 치마에 남은 마음의 벽
덧댄 무릎의 기억은
늙어가는 집의 기둥을 지켜보고 있다

입에 밴 혼잣말을 주름치마처럼 폈다 접으며
짝퉁 가방에는 방의 표정을 넣어
표정 있는 가방이 되었다

저녁이 골목으로 오면
내게 맞지 않는 집이
다른 이의 몸의 집으로 살아나 불빛을 따라갔다

입고 벗는 일만으로 하루의 방향이 달라지는

나는 잠시 몸의 집을 벗어둔 채
떠밀려 가는 골목의 손잡이를 잡고 서 있다

---「몸의 집」중에서

출판사 리뷰

[시인의 말]

이제는 길을 잃고 헤매지 않아도 되겠다.

닿지 않는 시를 향해 첫걸음을 딛는다.

2026년 8월
김미사

[해설 엿보기]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문학은 그 어떤 사회적 의제를 생산해 내지 못하며 시대의 잉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여타의 매체들에 밀려 독자들과의 접점을 마련하지 못한 채 주변화된 지 오래이다.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쓰이고 있는 이유는 자신과 같이 주변화되고 타자화된 존재를 향한 연대의 가능성을 놓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때의 연대는 문학의 생존을 위함이라기보다 타자화되거나 사라진 존재의 목소리를 채록하고 이를 형상화함으로써 윤리적 실천을 도모하는 수행에 가 닿는다. 자본화된 세계에서 내몰린 존재, 그 타자의 의미와 가치를 사유하고 그들이 겪어온 시간의 층위를 재현함으로써 문학은 부조리한 세계와 대면하고 예술적 저항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문학이 만들어내는 가치란 그 자체로 항구적이고 고정된 어떤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맺는 타자와의 관계로 인해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김미사 시인의 시에 내재된 고뇌의 흔적을 톺을 필요가 있다.

시인은 「사유원」에서 “가벼워지고 싶은 바닥의 마음”을 원한다. “달항아리”처럼 “비어 있지만 가득 찬 평안이 있는” 삶의 가능성을 사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인의 지향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플래니모”의 고독함을 감당해야 한다. 플래니모란 일종의 떠돌이 행성으로 구심점도 없고 항성도 없이 은하의 중심을 기점으로 홀로 공존해 가는 존재이다. 스스로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천체인 플래니모는 고독한 삶의 행로로 인해 시인이 지닌 절대 고독의 층위에서 사유할 만하다. 고립과 달리 고독은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조건이다. 우리는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성찰하며 사유의 확장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플래니모가 단순히 공간을 떠돌아다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은하의 중심’을 기점으로 삼는다. 무수히 많은 항성으로 이루어진 은하의 중심을 기준점으로 혹은 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플래니모의 고독, 즉 시인의 고독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상쇄할 만한 그 무엇이며 그 관계를 확장해 나가는 실천 가능성의 토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김미사 시인이 시로 형상화하는 바는 고독한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전유해 타자의 고독, 그 소외된 존재의 정동과 맞물린다.

한 묶음
종이 뭉치를 파쇄기에 넣는다
순식간에 글자들이 조각조각 갈려 나간다
이미 저질러놓았던 맘이
파쇄되는 짧은 순간
마음의 한가운데라 여겼던 문장들이
파쇄되어 이제는 누구나 써도 되는
문장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행복이 슬픔을 끌고
슬픔이 안녕을 끌고 사라진다
행복과 슬픔이었으니
위로 아닌 위로가 되어버린 문장들
끝끝내 하얘질 수 없는 참담들
왔었으니 되돌아갈 수도 있는 거라 다독이며
잠시 숨을 몰아쉰다
생의 파쇄기를 거친 너는
다음 문장을 짓기 위해 가고 있겠지만
남아 있는 나는
파쇄된 종이 뭉치를 뭉쳐
봉투에 넣는 일이 고작이다
- 「파쇄」 전문

「파쇄」의 화자는 “마음의 한가운데라 여겼던 문장들이” 적힌 “한 묶음”의 “종이 뭉치를 파쇄기에 넣”어 파쇄한다. 순식간에 갈려 나가는 글자들을 보며 화자는 “이제는 누구나 써도 되는/문장으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쓴다. 내 것이었으나 파쇄되는 순간 누구나 써도 되는 문장이 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화자의 마음이 담겼던 문장은 파편화되어 더는 화자 ‘나’의 의도를 담지 못한다. 그것은 ‘나’로 수렴되지 못하는 그저 낱낱의 글자일 뿐이다. 그러나 글자, 즉 언어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약속으로 공유되는 그 무엇이자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기호 체계일 따름이다. 한 사람에게 독점되지 않는 언어는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종이가, 문장이 파쇄되는 모습을 보며 “행복이 슬픔을 끌고/슬픔이 안녕을 끌고 사라”지는 정동의 층위를 감각한다. ‘나’가 문장을 쓰는 과정에서 행복과 슬픔을 경험했기에 그것이 사라진다고 해서 문장을 쓸 때의 “위로”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위로의 경험은 ‘나’를 전유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공유재로서의 언어로 전이된다. 그럼에도 되돌릴 수 없기에 “끝끝내 하얘질 수 없는 참담”을 어찌할 수는 없다. 그저 “왔었으니 되돌아갈 수 있는 거라 다독이며/잠시 숨을 몰아”쉴 따름이다.
- 이병국(시인·문학평론가)

[시인의 산문]

비 오는 날 절집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 듣는 것을 좋아한다. 고향 암자에서 듣던 빗소리와 닮았다. 지금은 고향이 사라져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내 안에서 웅숭그려 있던 말이 깨어나 시를 쓰게 했다. 시를 쓰는 일은 빗소리처럼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에 깃드는 것이라 믿는다. 소리로 채운 몸의 집을 짓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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