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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무처럼 서 있었다
이계섭
현대시학사 2023.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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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학 시인선

목차

차례

시인의 말

1부 신당동 산 1번지

종점 풍경
신당동 산 1번지
유리의 본질
입영 전야

불편한 성자
두려움을 말하자면
나도 물들고 싶다
정림사지 5층 석탑
바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아르브르
달의 몰락
상처

2부 아버지를 지우며

붕어빵이 있는 저녁
어머니의 봄
풍경 A
명예퇴직
아버지를 지우며
생강의 생각
고향
말이 사라졌다
어머니와 스피노자
바람이 분다
돌아가지 못한 길
저 도시에 장맛비 퍼붓네
어떤 귀가
까치집

3부 아득하다

겨울 편지
커피 한잔하실래요?
아득하다
익명의 도시
가을밤 자정에 비가 오고
꽃말
고목과 삭정이
해탈
장날 저녁
탈선을 꿈꾸다
붉은 울음
그늘 같은
편지
알 수 없다

4부 화양연화

사과가 익었다
차마, 꽃이라고 부르랴
거울이 되고 싶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엄마와 아들
2월의 0
꿈속에서
티켓다방에 관한 사소한 설명
사랑 그 너머
신발論
선재형이 거기 있다
비우고 채우기
화양연화

해설

옛집처럼 찾아가는 시의 거처 | 박미라(시인)

저자 소개 1

2020년 《작가와문학》으로 등단. 사화집 『무릎이라는 몽돌』 『낮달처럼 떠 간다』가 있음. 제2회 청양문학상 수상. 바람시문학회 동인, 청양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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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8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186g | 125*188*20mm
ISBN13
9791192079882

책 속으로

천식을 달고 사는 종점이 있다

봄날이 엎어진 흔적이라는 황 노인의 기침이나
공회전 금지 현수막을 찢어발기는 종점의 병증은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지만

오늘도,
종점 다방에서는 쌍화차가 끓고
종점 순댓국집에서는 해종일 연탄불을 피워둔다
애꾸눈 네온이 지키고 선 종점싸롱에서는 간간이 싱싱한 욕지거리가 튀고

내장을 들어내고 클클 거리는 버스들 곁에서
민망한 줄도 모르는 가로등 혼자 환하다

종점은 꾸벅꾸벅 졸며 아침을 시작하고
꾸벅꾸벅 졸며 저녁을 닫는다

간혹 돌부리를 걷어차 보는 것은
아직 튼튼한 다리를 확인하는 종점의 방식일 뿐이다
---「종점 풍경」중에서

바람도 구름도 드나들지 못하고
꽃 냄새도 새 소리도 밖에서 맴돌 뿐
바라보는 것만으로 갈증을 달래는데
그만큼으로도 가끔은 따듯했다고 고백한다

눈 큰 아이처럼 지켜 서서 창호지 문밖을 보여주거나
꿈속처럼 신비롭던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로 몸 바꾸어
단절과 소통의 거리를 가늠하기도 했는데

1천 도가 넘는 담금질을 견디고
긁혀서 상처받기보다 깨지는 몸을 얻고
다가서는 것들을 막아서는 차갑고 단단한 본질이
부딪혀 깨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인 것을

깨진 단면마다 그려놓은 물결무늬가
불가마에서부터 품고 온 바다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그래, 이제 알아듣겠다
---「유리의 본질」중에서

카페 아르브르 창가에 푸른 잎 무성한 나무 한 그루 있다

나무에게도 집이 필요했을 거라는 말도 있지만
저 나무에게 집이란
하늘이거나 구름이거나 세상을 흘러 다니는 온갖 소리들이 아닐까
조명 찬란하고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카페란
인간이 만들어준 화려한 감옥일 뿐

아무도 저 나무의 고향을 모르는,
다정히 이름 불러주는 사람 없는,
낯선 곳에서
나무는 푸르게 서 있다

아르브르 카페라고 말하면 나무는 저를 부르는 줄 알고
조금은 기쁘기도 했을까

어느 새벽, 전기톱 아래 토막토막 잘려진 그 나무
사람의 이별을 흉내 내듯
이파리 자꾸 흔들었는데

아르브르, 라고 발음하면 갓 구운 크림빵 냄새가 날 것 같은데

나무가 골목길을 돌아 멀어지는 동안

나는 나무처럼 서 있었다

*아르브르(ARBRE A PAIN) 프랑스어로 나무를 뜻함
---「아르브르」중에서

비만 와도 뭉텅뭉텅 떨어지는 살점
바람이 기웃대는 기척에도
삭아버린 뼈마디 우수수 흩어지는
120살쯤 드셨다는 빈집
폐가에서 흉가로 건너가는 중이다

밀린 숙제하듯 빈집 허무는 날
80년 인생이 정리되고
3대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다

서까래 속에 똬리를 틀었다던 구렁이는 보이지 않고,
포장도 뜯지 않은 속옷 여러 벌과 상표도 선명한 수건 수십 장

먼지 앉은 대두병 속에 목숨처럼 담아둔 콩, 팥, 수수, 조, 옥수수

일정시대 국채 증서 몇 장과 너덜거리는 혁명정부 재건가계부까지

보물도 유물도 아니지만 차마 버릴 수도 없는 것들이 녹슨 칼이 되어 가슴을 후빈다

구들장 허물어 마지막 남은 역사를 지웠지만
마당의 우물만은 남겨두기로 한다
저 우물, 집안의 눈이었던 깊은 속에는
내 얼굴이
아버지 얼굴이
아버지의 아버지 얼굴이
번갈아 일렁이는데
얼굴마다 먼 하늘을 바라보는데

저 깊은 눈을 차마 감길 수 없어
내가 대신 질끈 눈 감아 본다

---「아버지를 지우며」중에서

출판사 리뷰

■ 시인의 말

잃어버린 계절을 찾으러 목숨의 산야를 쏘다녔다.
강을 건너고 돌밭을 걸었다.
달빛조차 사라진 길이라고 여겼으나
나는 그예 내 자리로 돌아왔다.

깊은 병의 굴헝에서 나를 건져낸 시여!
세상에 나가 부끄럽지 말기를.

굳이 진부한 안부를 적어두지 않겠다.

나는 안녕하다.

추천평

그는 어떤 시인인가? 내가 아는 그는 ‘식물성 시인’이다. 시인의 품성과 그의 시가 같을 수는 없지만 대개의 경우 시인의 지향점을 짐작할 수는 있다. 그는 시 혹은 일상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나’가 아닌 ‘그들’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인이다. 자신이 대상의 자리에서 보고 듣고 생각해보려는 시인이다. 그는 목소리가 크지 않고 낯선 것을 끌어들이지 않고, 그저 자신이 아는 만큼만 말하고 듣는다. 그의 시도 이러한 성품과 다르지 않아서 순한 들풀처럼 중심을 벗어난 자리에서 태어난다. 꽃이 핀 듯 아닌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다정에 왈칵 눈물이 솟는다. 그의 시는 먼 곳에서 불러온 것들이 아니다. 그와 그의 평생을 이루고 있는 것들, 작아서 더욱 소중한 것들이 그의 시적 주제이다. 잊지 않아야 할 것들이거나 잊을 수 없는 것들의 기록이 그의 시이다. - 박미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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