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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편에 대한 탐구
안혜경
시인동네 2023.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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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

책소개

목차

제1부

왜가리·13/포인세티아·14/어제의 산책자·16/그러니까 튤립·17/저녁 한 조각·18/한낮인데도·20/편지·21/삼나무 사잇길·22/한파·24/한파 2·25/봄 혹은 빗방울·26/지하실·28/아무리 걸어도 저녁·29/내일이 오면·30/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닌·32/이유 있는 슬픔·34/그랬을까·35/어제·36

제2부

왼편에 대한 탐구·39/너만의 방식·40/저녁의 발자국·42/새벽 창문을 넘어·43/서쪽으로 흐르는 냇물은·44/내일은 다시·46/연두·47/저녁의 슬픔·48/매화·50/눈사람·51/옆집 사람·52/크로커스·54/11월·55/밤의 창문에 매달려·56/조춘(早春)·58/빨래·59/기억들, 엉겅퀴의·60/메기와 하수관 사이에서·62

제3부

한식·65/진정되지 않는·66/천둥을 찾아·68/슬픔이 온다·70/비 갠 뒤·72/달맞이꽃·73/누구의 마음인가·74/먼지가 흩날리는 집·76/끝내 못다 한 이야기·78/바오바브나무에 걸린 모자는 두고 왔네·80/파타고니아의 바람일까·82/비린내와 달콤함 사이·83/단풍나무의 숨바꼭질·84/전화를 끊고 난 후·86/목요일에서 조금 떨어져·88/하나의 망초·90/감자꽃은 떨어지고·92/세상 끝이 뭐 어디 가겠습니까·94/밤의 인사·96

해설 오민석(시인·문학평론가)·97

저자 소개 1

서울에서 태어나 상명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문학박사. 1982년 《시문학》 등단. 시집 『강물과 섞여 꿈꿀 수 있다면』 『춘천 가는 길』 『숲의 얼굴』 『밤의 푸르름』 『바다 위의 의자』 『여기 아닌 어딘가에』 『비는 살아있다』, 산문집 『새벽 다섯 시』 『아프리카 아프리카』 『꿈꾸는 배낭』 등을 펴냈다. 〈시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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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8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112쪽 | 170g | 125*204*20mm
ISBN13
9791158966065

책 속으로

방문을 열었을 때 책상의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은 왜가리였다 왜가리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벽만 보고 있었다 분명 저녁에 수변 길을 산책할 때 마주친 왜가리였다 나는 전혀 아는 척하지 않았고 노란 눈동자에 어른거리던 물그림자도 눈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왜가리는 내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이제는 나를 빤히 노려보며 영리하게 보이는 눈을 반짝이고 있다 물풀의 가벼운 흔들림이 손등을 간지럽혔다 일없이 창문 너머 저녁 하늘만 바라보았다 나는 왜가리가 나갈 수 있도록 문간에서 비켜났다 날개를 펼쳐 들었을 때에는 온 방 안이 날개로 뒤덮인 양 나는 몸을 움츠렸다 왜가리는 책상을 부리로 톡톡 두 번 두드린 후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날개를 접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오히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땅거미 내려앉는 하늘에 바람 소리였나 뭔가 등을 두들겼다 나는 끝내 방문을 열지 않았다
---「왜가리」중에서

어제의 발걸음은 간명하여 경쾌하였다. 순전히 아카시아 향내 탓이었다. 흰 꽃들이 저녁 내내 비명을 질러댄 탓도 있었다. 얼굴을 마주 보며 한없이 끌어당기는 흰 비밀이 있었다. 창문을 넘어온 손가락은 길고 힘이 있었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니 온통 검은 얼룩뿐이었다. 사용할 수 없는 왼손에게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어제의 발걸음을 정리하고 목록을 내밀었다. 맨발로 걷고 있었으니 약간의 흉터는 무시하기로 했다.

참고로 어제의 미소는 나의 것이 아니다.
---「어제의 산책자」중에서

나뭇가지를 흔드는 작은 손이 있다
이렇게 가벼운 손을 가진 것은
봄 혹은 빗방울
그렇지만 웅덩이에 떨어지는 물소리는 첨벙첨벙
십 년째 혼자 걷고 있는데 십 년 후에도 혼자 걷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날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리 발자국에 어른거리는 눈물 자국을 따라 걷는다
집이 좁아서 울지를 못하고
눈물을 흘리려면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가야 한다
목청껏 울기 위해서는 울산바위에라도 가야 한다
나뭇잎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제 사랑을 잃고 있다
지나가는 계절은 그냥 지나가고
마른풀들은 몸을 흔드는데 꿈꾸는 기분인가
낮잠을 자고 일어나는
말채나무의 온기에 손을 녹인다
한바탕 비가 쏟아지면
오리도 나뭇잎도 알맞게 몸을 숨긴다
그리고 울기 좋은 때
함께 우는 것은
봄 혹은 빗방울
---「봄 혹은 빗방울」중에서

누군가 오래전 만들어 놓은 지하실이었다
문은 생각보다 쉽게 열렸고
흙냄새와 곰팡내가 섞여 있었다
잊어버렸던 고통을 다시 들춰내는 냄새였다
누군가의 비리를 알게 되었을 때의 그 비릿함이었다
밀폐된 물건들이 그걸 입증해 주었다
별똥별 하나를 집어들었다
위험하게 반짝이는 초록빛이었다
차갑게 빛나는 별이었다
다음 생을 이야기하는 별이었다
나는 지하의 세계가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우리 모두 언젠가 사라진다는 생각에
몰두하였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비리는 계속되었고
지하실은 더 깊이 가라앉았다
나는 별을 잃지 않으려고 온 마음을 쏟으면서
계단을 내려가는 발에 힘을 주었다
---「지하실」중에서

왼편에 있던 슬픔을 오른편으로 옮겨놓았다
모든 게 더 슬퍼 보였다
얼굴빛은 밝은 회색인데 눈빛은 파르스름하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입김을 뿜어낸다
오른편 책장 뒤에 장난감 병정들은 일렬로 걸어가지 않고
총을 어깨에 멘 채 일제히 슬픈 표정이다
책장 뒤의 공터에서 병정들은 제자리걸음을 한다
네 번째 선반에서 슬픔은 몸을 돌려 언덕길을 올라간다
슬픔의 뒷모습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속삭임은 치즈케이크 모양으로 선반에 앉아 있고
그 아래 선반에는 어둠의 가방이 있다
물거품으로 변하는 날들이 칭얼대긴 하지만
현관문에서 늘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음악 소리는 슬픔과 어둠의 전쟁이었을까
가방을 흘깃 열어보니 비둘기의 날갯죽지
가방 옆 주머니를 열어보니 왜가리 한 마리
다시 오른편의 슬픔을 왼편으로 옮겨놓았다

---「왼편에 대한 탐구」중에서

출판사 리뷰

하이데거(M. Heidegger)의 후기 사상을 잘 보여주는 책으로 『숲길Holzwege』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풀(Holz)은 숲(Wald)를 지칭하던 옛 이름이다. 숲에는 대개 풀이 무성히 자라나 더 이상 걸어갈 수 없는 곳에서 갑자기 끝나버리는 길들이 있다. 그런 길들을 숲길(Holzwege)이라고 부른다.” 『숲길』의 영문판 제목은 Off the Beaten Track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자주 다니지 않은 길’이란 뜻이다. 그 길은 누구나 알고 있고 ‘많은 사람이 지나다녀 만들어진 길(beaten track)’이 아니다. 그 길은 일상의 비본래적인 속성을 깨닫고 본래적인 존재로 가는 길, 다른 말로 하면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외딴길이다. 그렇다면 ‘근원’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에게 근원이란 “그것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사태가 사태 자신의 본질(Was-sein, 무엇임)과 그 자신의 방식(Wie-sein, 어떠함)으로 존재하게 되는 그런 것”(『숲길』)을 말한다.

안혜경의 시집은 ‘산책 시편’이라는 부제를 붙여도 좋을 만큼 “산책”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산책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는 ‘걷다’, ‘길을 가다’, ‘돌아다니다’, ‘내달리다’ 등처럼 산책을 의미하는 유사어들이 자주 반복된다. 그녀는 걷고, 길을 가고, 돌아다니며 존재의 ‘무엇임’과 ‘어떠함’에 대하여 사유한다. 그녀의 길은 편하고 흔한 길이 아니며, 하이데거의 숲길처럼 “더 이상 걸어갈 수 없는 곳에서 갑자기 끝나버리는 길들”이기도 하다. 그 길은 비본래적인 일상에서 시작되며, 본래적인 존재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고, 종종 사라짐으로써 주체를 혼돈에 빠지게 한다.

저녁 햇빛이 비스듬히 나무를 안았다 나무도 그날의 수고로움을 발밑에 내려놓았다 찬바람 쌩쌩 골목을 휘도는데 꽁꽁 싸매고 산책을 나갔다 마른 풀들도 추위에 발을 모으고 도로에는 흙먼지가 풀풀 날렸다 오리 떼조차 수초 사이에 숨었는지 풀들이 바스락거렸다 검정 비닐봉지만이 머리를 쳐든 뱀처럼 바람에 흔들렸다 풀숲에 뻣뻣하게 누운 고양이를 끝내 묻어주지 못했다 발걸음은 후들거렸다 왼쪽 길인지 오른쪽 길인지 돌다리를 건너야 하는지 돌아서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 순간 얼음기둥이 되었다 칼바람이 나를 북극으로 데려갔다
― 「한파」 전문

이 시에서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화자의 산책길은 한치의 생명성도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한파에 꽁꽁 얼어붙어 있고, 풀들은 바짝 말랐으며, 오리 떼들도 사라지고 없다. “검정 비닐봉지만이 머리를 쳐든 뱀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공간에서 화자의 “발걸음은 후들거”린다. 화자는 이 삭막한 얼음의 공간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는 이미 본래적인 존재로 돌아가고 있다. 비본래적인 존재는 죽음을 망각하고 결핍을 못 느낀다. 화자는 모든 것이 결핍인 세계를 이미 의식하고 있고, “풀숲에 뻣뻣하게 누운 고양이를 끝내 묻어주지 못했”지만, 죽음을 의식하고 있으며 죽음에 대한 사유 안으로 이미 들어와 있다. 화자는 비본래적인 실존이 은폐하는 것들을 탈은폐하여 본래적인 존재를 목격하기 직전의 상태에 이미 도달해 있다. 안혜경의 시들은 이렇게 존재의 근원에 다가가 존재-물음을 던지는 현존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가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물을 때, 그것의 시간적인 배경은 대부분 저녁이거나 밤이다. 이 작품에서도 그녀의 산책이 시작되는 시점은 “저녁 햇빛이 비스듬히 나무를” 안을 때이다. 저녁은 어두움으로 가는 시간이고 밤은 이미 어두워진 시간이다. 어두운 시간은 무지의 시간이고, 길을 잃은 시간이며, 길이 보이지 않는 시간이다. 이런 점에서 안혜경의 질문은 잘 보이지 않은 근원에 대한 암중모색의 처절한 과정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 오민석(시인·문학평론가)

■ 시인의 말

고통은 달갑지도 않지만 피할 수도 없다.

2023년 8월
안혜경

■ 시인의 산문

바람도 없는데 창문이 심하게 흔들렸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까마귀보다 더 캄캄해져서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성의 없는 산책이었고, 낭만 없는 마실이었다. 머릿속까지 캄캄한 밤이었다. 밤이 숨겨 놓은 문장을 읽고 싶었지만, 너무 멀리서 살아있는 문장이었다. 이기(利己)의 문장이었다. 긴 밤을 건너가야 하는데 멀리서 개가 짖었다. 개의 문장을 따라 산책은 이어졌다. 성의 없는 산책이었고, 낭만 없는 산책이었다. 이기(利己)의 산책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끔찍한 산책을 멈출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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