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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우리의 실패들에 대하여
1부·실패에 대하여 묻다: 실패의 인문학 실패의 정치·신학: 인류세 시대의 실패에 대한 종교철학적 성찰 / 박일준 들어가는 말 I. ‘더 나은 실패’ II. 인류세(the Anthropocene)라는 실패 III. 인류세의 실패와 라투르의 낙관주의를 넘어서: 실패를 품은 정치학 IV. 폐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사물들과 그 객체성 V. 더 잘 실패하기 나가는 말 인류의 실패인가, 지구의 진화인가: 인류세라는 실패에 대하여 / 이찬수 I. 인류세의 등장과 지구의 현실 II. 인류세 분석과 대안적 사상들 III. 인류세 신학의 가능성과 점선적(點線的) 경계 빼앗긴 이름과 이름 없는 하나님: 부정신학의 인문학적 성찰 / 황성하 들어가는 말: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소년 I. 부를 수 없는 하나님의 이름, 테트라그람마톤 II. 이름을 빼앗긴 사람들과 함께하는 하나님 III. 이름의 갈등과 화해: 24601과 장발장/ 윤동주와 히라누마 도주/ 첼란과 안첼 IV. 이름 짓기의 두 의미: 지배 혹은 회복 나가는 말: 다시 부르는 이름 욕망과 실패에 관한 정신분석학 / 강응섭 들어가는 말: 거리끼고 미련한 십자가 I. 성서의 표현: 젖음의 네페쉬 하야 vs 마름의 네페쉬 하야, 산 영(생령) vs 살려주는 영 II.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 이데아의 침대 vs 에이돌론(에이코네스-판타스마타)의 침대 III. 바울-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 하나님의 모르페와 종의 모르페(케노시스) vs 하나님의 포르마와 종의 포르마 IV. 프로이트의 표현: 영혼(정신)의 장치에 관한 여러 표현들 V. 라캉의 표현: 언어처럼 구조화된 무의식 vs 언어처럼 구조화된 저항 VI. 요셉: 12번째 아들의 외밀한 장자권 나가는 말: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2부·실패가 한국사회에 묻다: 기독교적 성찰 실패의 세대: 청년세대 신조어와 기독교 청년 사역의 대안들 / 윤영훈 들어가는 말: 전환점에 선 청년 담론 I. ‘잉여’로 사는 법: 포기가 아닌 대안을 선택하기 II. ‘아싸’들이 사는 법: 나 홀로 세대를 대안 공동체로 이끌기 III. ‘꼰대’를 넘어 사는 법: 다음 세대가 아니라 다른 세대를 세우기 나가는 말: 새로운 신조어를 기대하며 안전의 실패: 반복되는 참사와 신자유민주주의 담론이 은폐하는 것들 / 박종현 들어가는 말 I.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10.29 참사: 반복되는 사회적 참사 II. 대형 참사의 원인 규명 시도와 그 한계 III. 위험을 분산하라: 현대 자본주의의 사회적 위험 회피전략 IV. 신자유주의 정치의 위험한 정책 V. 원자력 발전과 위험 회피의 문제 나가는 말 평화의 실패: 한반도와 ‘핵 있는 평화’ / 이병성 들어가는 말 I. 한반도 평화와 핵무기 II. 핵무기와 안보 절대주의 나가는 말 교회의 실패, 한국 개신교의 ‘성공’과 ‘실패’에 관하여: 손원영 교수 ‘배제’ 사례를 중심으로 / 김종만 들어가는 말 I. 배타적 폭력성의 ‘성공’ II. 관계적 수용성의 ‘실패’ 나가는 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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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에 대한 통렬한 인식과 성찰은 아편으로서의 희망을 지양하고,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희망하며 나아가야 할지를 깨닫는데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그래서 미국 신학자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는 ‘더 잘 실패하기’(a failing better) 혹은 ‘차라리 지금은 실패하는 게 낫다’(failing better now)는 논제를 제시하는데, ‘더 잘 실패하기’란 인류세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저질러 온 문명적 실패들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결코 실패를 위한 실패나 실패를 통한 악화의 심화와 연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희망이란 실패와 좌절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도래한다는 것을 명확히 말하는 것이다.
--- p.21 지구는 파괴되었고 인류는 실패했다는 인식의 한복판,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기존의 실패를 전환시키는 힘들이 결집한다. 지구화라는 실패, 화성으로의 이주를 상상할 정도로 파괴된 지구를 예상하고서야, 지구가 인간의 것이 아니라 “대기권, 수권, 생물군, 그리고 단단한 땅”으로 구성되어 있고, “복잡한 다세포 생명 일반”이라는 사실(Chakrabarty 2021, 77;83)을 알게 되었고, 지구의 행성성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지구화’가 인류를 ‘행성화’로 안내했다. ‘더 나은 실패’의 길, 라투르의 표현대로 하면 “땅에 묶인 자”가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라투르 2021)을 찾아가는 중이다. ‘중심은 아무 데나 다 있고 둘레는 어디에도 없다’(라투르 2021, 123)는 다중심과 점선적 경계 의식이 그 길의 근간이다. 그렇게 땅 아래로 내려가 비인간과 결합하고 서로 교환하며 모두가 중심이라는 점선적 사유가 더 깊고 넓어진다면, 떼이야르의 ‘정신권’에 대한 앞선 상상도 그저 오류였다고 말할 수만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 p.88 창세기에서 이름은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의미도 아니고, 대상을 부름으로써 자신이 더 우월함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타자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최초의 예술가이신 하나님의 창조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물의 존재를 드러내고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경탄했다. 다른 말로 신은 자신이 지은 존재들을 찬양했다. 이는 신성모독의 표현이 아니다.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한다고 말했다. 성서에서 신의 이름을 알고 부른다는 말, 신을 찬양한다는 말은 놀랍게도 이름을 빼앗긴 이름들을 되찾는 것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는 예수의 말은 윤리적 레토릭이 아니다. 그것은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신과 이름을 빼앗긴 자들이 신비하게 얽혀 있음을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 p.117 이 글은 ‘본캐-부캐’를 창세기에서부터 시뮬라크르에 이르는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돌이켜보았다. 우선, 성서의 표현(이 글의 Ⅱ장 참조)에 근거할 때, ‘본-본캐-부캐’의 관계는 형상에 따른 ‘모양’, ‘네페쉬 하야’(, nephesh chaya)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네페쉬 하야’는 ‘젖음의 네페쉬 하야와 마름의 네페쉬 하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이런 표현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Ⅲ장 참조)에 근거할 때 이데아와 에이돌론(에이코네스-판타스마타), 바울-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Ⅳ장 참조)에 근거할 때 ‘하나님의 모르페와 종의 모르페’, 프로이트의 표현(Ⅴ장 참조)에 근거할 때 ‘사고와 표현’, 라캉의 표현(Ⅵ장 참조)에 근거할 때 ‘언표행위와 언표’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 p.121 결국 교회가 다음 세대를 세운다는 것은 그 주체인 청년들이 만들어 갈 새로운 교회에 대한 기대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 세대의 기독교 이야기는 이전 세대와 다른 방식과 모양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 부분에 앞선 세대는 낯설고 당황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들도 식상함을 느끼는 현 기독교계 상황에서 이런 변화는 새로운 활력의 동인이 될 수 있다. 청년들의 교회 이탈은 교회에 대한 실망과 싫증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더 나은 교회’를 찾기 위한 주체적이며 ‘긍정적인’ 이유도 있다. 그들이 만들어 갈 새로운 교회가 오늘날 사회적으로 혼란과 고통을 겪는 동시대 청년들을 품을 것이다. --- p.179 한국에서 발생한 사회적 참사는 항상 자연재해를 능가하는 사상자를 냈다. 격포 페리호 전복(1993), 삼풍백화점 붕괴(1995), 천안함 사건(2010), 세월호 참사(2014)는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시장근본주의, 즉 자유민주주의를 근거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참사를 직접 명령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민주주의 구호가 실제로 의미하는 극단적 이윤추구는 사회 공공재의 감소 사회안전망의 축소 그리고 공적 책임을 훼손하여 사회적 참사의 문을 열어 버린다. --- p.208 평화를 성공이나 실패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샬롬의 평화, 하나님의 평화를 믿는 이들에게 적절하지 않은 관점이다. 평화는 인류의 비전이고 인류의 꿈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평화는 어렵고 좁은 길이다. 핵 있는 시대의 평화 담론은 더욱 그러하다. 샬롬의 평화를 믿는 이들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 ‘핵 있는 평화’를 넘어서서 평화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평화의 ‘실패’처럼 보이는 지금이 바로 평화가 더욱 절실한 시간이고, 샬롬의 평화를 구하는 이들은 이 평화를 위해 행동할 때이다. --- p.229 신자유주의, 고령화, 인구절벽 시대를 맞아 교회 성장이 멈추고 무한 경쟁상황에 진입하자, 한국 개신교의 배타주의는 다른 종교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을 넘어서 생존 경쟁을 위한 배타주의로 변모했다. 여기서 많은 교회가 채택한 생존 전략은 다른 교단과 교회를 적대시하거나 이단으로 몰아내는 것이었고, 자신의 교단과 교회는 진리와 가치가 절대적 우위에 있음을 강조하는 배타적 전략을 채택했다. 즉 같은 개신교 내에서 ‘배제’의 혐오를 씌어 서바이벌 게임에서 승리하려는 것이었다. 한국 개신교가 다른 종교를 마성화하고 타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지 못하고 오히려 적대시하며, 이를 빌미로 같은 종교 진영에 있는 신학자를 이단으로 몰아 ‘배제’하려는 비관용적이고 반지성적인 최근의 사례가 바로 손원영 교수해직 사건이었다. --- p.2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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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잘 실패하기, 혹은 더 나은 실패
『실패의 인문학』은 단순히 개인의 실패담이나 심리적 경험담을 넘어 문명사적, 신학적, 정치사회적 차원에서 실패를 바라보는 새로운 사유의 틀을 제시하면서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 ‘실패’를 성찰하고자 한다. 이 책은, 문명 자체의 실패, 즉 우리가 공유해 온 진보·성장·성과지향이라는 시대적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되묻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21세기 인류가 맞닥뜨린 팬데믹, 기후위기, 생태계 파괴, 종(種)의 대멸종 같은 현상은 결코 일시적인 실패나 예외적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근대 이래 인류 문명을 관통해 온 ‘무한한 진보’와 ‘경제적 성장’의 신화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경고한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우리는 실패를 말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오히려 실패를 숨기고, 성공의 기호만을 강조하며, 미래의 번영을 위해 현재를 끊임없이 희생하는 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실패’는 여전히 낙오자·패배자·비정상으로 분류되는 단어이고, 실패한 존재는 ‘인간 이하’의 경계 밖으로 밀려난다. 이 책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구조를 해체하기 위해, ‘실패’에 대한 사유 그 자체를 복원하려는 시도이다. 기후위기와 사회 불평등, 반복되는 참사, 정치의 무능, 종교의 권위 상실 등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문명적 실패의 징후이며, 이는 곧 우리의 사유 방식―근대적 성공주의·합리주의·직선적 진보 개념?자체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 책의 기획자들은 진보에 대한 맹신에서 벗어나, 실패에 대해 ‘더 잘 실패하기(how to fail better)’ 혹은 ‘더 나은 실패(a failing better)’의 방향을 모색한다. 이는 실패를 낭만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억압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삶과 공동체, 윤리와 문화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문화신학적 제안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실패의 인문학』은 신학자들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신학이라는 틀에 갇히기보다는, 신학을 문화적 성찰의 방법으로 삼아, 오늘의 현실과 정서, 구조와 언어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학제적 탐색의 장이다. 따라서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실패를 두려움의 언어가 아니라, 자각과 해방의 언어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다르게 사유할 수 있는 계기로서의 실패 총 2부로 구성된 이 책은 인간의 성공 중심 가치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실패를 ‘부정적 사건’이 아닌 ‘다르게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계기’로 바라본다. 1부는 “실패에 대하여 묻다: 실패의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인류세와 기후위기 등 문명적 위기 속에서, ‘실패’라는 개념을 철학적·신학적·정신분석적 방식으로 사유한다. 「실패의 정치·신학」에서는 캐서린 켈러의 “더 나은 실패(a failing better)” 개념을 바탕으로, ‘지속가능성’이 아닌 ‘거주 가능성(habitability)’의 관점에서 인류의 삶의 조건을 되묻는다. 디페쉬 차크라바르티, 도나 해러웨이, 시노하라 등의 담론을 통해, 인간 중심적 해결 담론이 아닌, 실패와 공존하는 방식의 존재 방식을 모색한다. 「인류의 실패인가 지구의 진화인가?」에서는 인류세 개념을 성찰하며, 기술과 발전의 언어가 은폐해 온 근대문명의 구조적 문제를 파헤친다. 이찬수는 티모시 모턴의 ‘공생적 실재’ 개념을 바탕으로, 물질/비물질·인간/비인간·사물/영혼 등의 이분법을 해체하며, 존재의 관계적 구성성과 내재적 상호작용(intra-action)을 강조한다. 이로써 인류세에 맞서는 새로운 신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빼앗긴 이름과 이름 없는 하나님」에서 황성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신론을 부정신학의 맥락에서 조명한다. 말로 규정되지 않는 ‘하나님의 이름’은 이성 중심의 근대 사유에서 벗어나, 이름을 잃은 이들?파울 첼란, 윤동주, 장발장 등?과의 ‘만남’을 통해 새롭게 열린다. 이 만남은 실패한 자들과 신비한 타자의 연대 가능성을 열어주는 신학적 상상력을 제공한다. 「욕망과 실패에 관한 정신분석학」에서는 ‘외밀한 B’라는 정신분석의 틀을 통해, 우리가 사회적으로 억압하거나 배제한 욕망과 실패의 위치를 추적한다. ‘형상-모양’, ‘하나님의 형상-종의 형상’, ‘언표행위-언표’ 등 쌍을 이루는 대립 개념 사이에서 배제된 항을 조명하며,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과 그로 인한 실패의 의미를 긍정적인 삶의 조건으로 전환할 수 있는 사유를 제시한다. 2부는 “실패가 한국사회에 묻다: 기독교적 성찰”이라는 주제로 한국사회의 구체적인 실패의 양상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담았다. 각각의 글은 사회, 정치, 종교적 실패의 사례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민낯을 드러낸다. 「실패의 세대」에서는 청년세대의 자의식과 그들이 사용하는 신조어?잉여, 소확행, 아싸, 꼰대 등?를 분석하며, 이를 단순한 유행어가 아닌 시대정신의 징후로 읽는다. 윤영훈은 이 단어들이 표현하는 소외와 절망, 자조의 감정들이 새로운 삶의 지향을 위한 담론적 공간이 될 수 있음을 조명한다. 실패를 선언하고 받아들인다는 이들의 태도는 오히려 다른 가치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안전의 실패」에서는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중심으로, 반복되는 사회적 재난의 구조를 분석한다. 박종현은 이 재난들이 신자유주의적 효율 논리에 따라 안전을 축소하고 외주화한 정책 실패의 결과임을 지적하며, 반복되는 재난에 대한 국가의 책임 회피와 기억의 지워짐을 고발한다. 참사의 반복은 시스템의 결함이자 가치관의 실패를 반영한다. 「평화의 실패」에서는 한반도의 핵무장화 현실 속에서 ‘핵 있는 평화’라는 모순적 개념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을 다룬다. 이병성은 이러한 현실이 한국사회의 평화담론에 어떤 전환을 요구하는지 분석하며, ‘공포에 의한 평화’가 아닌, 진정한 ‘샬롬’으로서의 평화를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핵무기는 억지력이자 자멸의 도구이며, 그 속에서 인간성과 종교성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교회의 실패」에서는 한국 개신교의 배타적 성공 담론이 초래한 사회적 폐해를 분석한다. 김종만은 반지성주의와 종교 간 배타성의 사례로 손원영 교수 해직 사건을 들며, 교회가 권력을 위해 어떤 타협을 해왔는지를 드러낸다. 이러한 ‘성공’이 교회의 자폐화를 초래했고, 신학적 상상력과 윤리적 책임의 퇴락을 불러왔다고 지적한다. 실패 위에서 다시 살아가기 오늘의 실패는 ‘미래가 지금보다 반드시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허물어지는 자리에서 발생한다. 이 책은 그 폐허 위에서 다른 꿈을 꾸자고 제안한다. ‘진보하지 않아도 괜찮다’, ‘성공하지 않아도 좋다’, ‘성공/실패의 이분법 자체를 의심하라’는 목소리는, 낙관의 시대가 끝나고 전 지구적 위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비로소 듣기 시작한, 실패의 인문학적 목소리이다. 요컨대 『실패의 인문학』은 실패한 자들을 위한 책이 아니다. 실패 자체를 성찰하지 못하는 문명을 위해, 실패를 말할 수 없는 사회를 향해, 실패를 기꺼이 껴안을 줄 아는 개인을 위해 기획된 책이다. 실패는 낙오가 아니라 사유의 시작이다. 그리고 사유는, 우리가 끝났다고 여긴 자리에서 다시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