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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부╻성서 안의 창조론 홍국평 _ 구약 성서와 ‘무로부터의 창조’ I. 여는 말 II. 조직신학과 성서신학 III. ‘무로부터의 창조’에 관한 상반된 시선 IV. 구약학자가 ‘무로부터의 창조’를 대하는 방법 V. 맺으며 이상목 _ 신약의 창조 이해 I. 들어가며 II. 창조 이야기와 신약의 기독론적 해석 III. 창조 이야기와 신약의 윤리적 관심 IV. 창조 이야기와 바울의 신학 V. 신약은 창조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는가? VI. 나가며 2부╻창조론과 진화론, 그 교리적 역사의 추적 손호현 _ 무로부터의 창조, 무의 하나님 I. 성서와 무로부터의 창조 II. 바실레이데스, 무의 하나님 그리고 무로부터의 창조 III. 교회 공의회 신조들 IV. 무로부터의 창조, 물질로부터의 창조, 하나님으로부터의 창조 V. 나오는 말: 무-존재-과정의 삼위일체 하나님 이용주 _ 마르틴 루터의 창조 이해 I.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뢰로서의 창조 신앙 II.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의 현재적 의미 III.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계속된다(creatio continua) IV. 하나님은 피조물의 완성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 V. 창조 신앙의 본질을 기억하자 이오갑 _ 칼뱅의 창조론과 진화론 I. 들어가는 말 II. 칼뱅과 진화론 논쟁 1. 벤저민 워필드 2. 존 머레이 3. 리샤르 스토페르 4. 데이비스 영 5. 논쟁에 대한 평가 III. 칼뱅의 창조론과 진화론의 관계 1. 후속적 ‘창조’ 또는 생성에 관하여 2. 피조물의 고유한 생명력과 자연의 법칙 3. 자연과학에 대한 태도 4. 창조에 관한 성서 해석 5. 지속적 창조 IV. 나가는 말 박창훈 _ 존 웨슬리의 자연과학 이해와 창조신학 I. 자연과학 이해 II. 자연과학과 창조신학 배덕만 _ “스콥스 재판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 미국에서 진화론을 둘러싼 갈등의 역사 I. 글을 시작하며 II. 스콥스 재판 이전 1. 1859년 이전 2. 1859년 이후 3. 20세기 초반 4. 1920년대 III. 스콥스 재판 1. 재판의 주역들 2. 재판의 시작 3. 재판의 경과 4. 재판의 결말 IV. 스콥스 재판 이후 1. 법적 공방 2. 생물 교과서 전쟁 3. 반진화론 조직과 운동 V. 결론 정대경 _ 진화론과 기독교 I. 들어가며 II. 진화론과 존재의 사다리 III.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 3부╻과학과 신학의 대화 박일준 _ 시작과 에너지 I. 신앙, 신학, 신화 그리고 이야기 II. 시작(始作), 시작(詩作) 그리고 에너지의 순환 이성호 _ 자연의 신학 ― 신학과 과학의 대화 방법 I. 목사님은 왜 과학을 공부하시나요? II. 질문에 담긴 세 가지 전제 III. 과학과의 대화는 필요한가? IV. 과학신학은 과학인가, 신학인가 V. ‘자연신학’에서 ‘자연의 신학’으로 장재호 _ 과학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I. 한국 신학대학에서의 과학신학 강의 현황 II. 신학대학에서 과학신학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 III. 나가며 신익상 _ 낭비에서 지혜로 I. 들어가며 II. 과학은 과학이다 III. 창조과학과 상대성 이론 IV. 기술과학 시대와 기독교의 지혜 4부╻지구신학, 우주신학 그리고 현상학적 창조신학 전철 _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 I. 들어가며 II. 지구의 위기 III. 지구 개념의 재구성 IV. 지구 신학의 재구성 V. 나가며 김정형 _ 외계인 논쟁과 우주신학의 전망 I. 들어가며 II. 문제의 발단: 많은 땅의 발견 III. 필립 멜랑히톤의 반론 IV. 외계인이 있는 우주를 품는 신학의 가능성 1. 외계인이 죄가 없는 경우 2. 외계인이 죄가 있는 경우 V. 외계인이 없는 우주를 품는 신학의 가능성 VI. 마무리하며: 우주신학 재구성을 위한 신학적 상상력의 요청 신용식 _ 창조 질서 안에서의 삶에 대한 현상학적 이해 — E. 레비나스의 창조 담론을 중심으로 I. 들어가기: 창조를 다루는 맥락적 다양성 II. 창조와 창조 질서 1. 창조 사건 vs. 창조의 의미 2. 지혜의 관점에서의 창조 — 창조 질서 안에서의 삶 III. 창조 질서 안에서의 삶에 대한 담론으로서의 창조신학 —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을 중심으로 1. 후설의 현상학과 레비나스의 현상학 2. 하나님의 자기 타자화 및 자기 수축으로서의 창조 3. 타인을 대신 짊어짐과 창조 질서 안에서의 삶 IV. 나가기: 창조 질서 안에서의 삶을 위한 창조론 지은이 알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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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부터의 창조’는 성서를 통해서는 거의 증빙될 수 없다”라는 박영식 교수의 진술에 대한 곡해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성서학자의 건조한 관찰에 의미를 부여해 보려고 노력하는 조직신학자의 씨름을 신앙고백의 언어로 해석한 결과라 하겠다. 엄밀히 말해 이 문장에 대한 비난은 성서학자가 짊어져야 하고, 그래서 나는 오늘 성서학자의 관찰을 무시하지 않고 진지하게 성찰한 어느 선량한 조직신학자를 대변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 「1부 _ 〈홍국평 _ 구약 성서와 ‘무로부터의 창조’〉」 중에서 구약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신약 성서 속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신약은 때로 창조에 관한 구약의 기록을 직접 인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창조를 간접적으로 암시하기도 한다. 가령, 베드로후서는 만물의 시작을 말하면서 땅은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이라고 말한다(벧후 3:5). 이는 창세기 1장 9-10절을 명징하게 연상시킨다. 반면, 바울의 아담 기독론은 아담의 창조를 직접 다루지는 않지만, 창세기의 첫 인간인 아담의 창조를 전제로 하여 아담과 예수를 구원론적 관점에서 유비적으로 고찰한다(롬 4:12-21; 고전 15:11-21, 45). --- 「1부 _ 〈이상목 _ 신약의 창조 이해〉」 중에서 그리스도교의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교리는 존재자들(τὰὄντα, ens, Seiendes) 혹은 존재(τὸ εἰναι, esse, Sein)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최종적인 언어적 규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교리는 무(無)의 신비와 존재(存在)의 피조성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이 존재 자체라고 한 과거 사상가들(토마스 아퀴나스, 스피노자, 폴 틸리히 등)의 견해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순전한 형이상학적 찬사라고 단순히 수용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곧 플로티노스(Plotinus)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은 “존재를 초월하신 분”(τὸ ἐπέκεινα των ὄντων)이며, 존재 이전에 존재 자체를 가능케 한 “절대 무”(τὸ παντελως μὴ ὂν)이다(Enneads, I, 8.3). 무로부터 존재를 창조한 하나님은 존재 이전이며, 존재 너머이고, 존재 이후이다. --- 「2부 _ 〈손호현 _ 무로부터의 창조, 무의 하나님〉」 중에서 한국교회의 대중들 사이에서 창조주의(creationism 혹은 creation science)나 지적설계론 같은 주장들은 오래전부터 유포되어 왔고, 그 영향력도 상당하다. 이를 유포하거나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신앙의 동기와 열정 자체는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위와 같은 주장들은 사실 창조를 증언하는 성서의 말씀들, 이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통해 형성된 교회의 신조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채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성서 문자주의나 반과학주의, 혹은 반이성주의를 창조 신앙과 혼동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는 것도 사실이다. --- 「2부 _ 〈이용주 _ 마르틴 루터의 창조 이해〉」 중에서 방금 칼뱅의 신학이 ‘진화론적 창조론’이라고 했지만, 여기에 대해서 논란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학계에서 일어났던 논쟁은 본론에서 다루겠지만, 칼뱅의 창조론은 그런 논쟁이 일어날 정도로 진화에 열려있거나, 진화론을 지지할 만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19세기 이후 서구 문화에서 종교와 과학의 “목숨 건 전투”에서 기독교권이 칼뱅의 신학을 알고 그의 영향을 좀 더 많이 받았더라면, “종교와 과학의 갈등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며, 스콥스 재판과 같은 “진화론 논쟁은 전혀 다른 과정을 밟았을 것”이라고 평했다 --- 「2부 _ 〈이오갑 _ 칼뱅의 창조론과 진화론〉」 중에서 한편으로는 목회자로서 자연에 대한 경이와 존경으로 그 너머의 존재에 대한 설교와 목회 활동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에 대한 이해의 도구로 사용했던 과학에 대한 웨슬리의 태도를 살펴본다면, 웨슬리의 모호한 모습이 우선 다가온다. 그러나 웨슬리가 신앙과 과학의 두 영역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러한 두 세계관의 통전적인 이해가 모두에게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신앙의 영역과 과학의 영역이 정당하게 만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2부 _ 〈박창훈 _ 존 웨슬리의 자연과학 이해와 창조신학〉」 중에서 물론 창조론과 진화론을 둘러싼 논쟁은 결코 새롭거나 낮선 문제는 아니다. 1859년,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을 출판한 이후, 그의 주장을 둘러싼 신학적 논쟁과 법적 갈등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견해들이 출현하여 교계와 학계 내 갈등의 원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이해의 폭과 넓이를 크게 심화하는 데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는 기독교의 위대한 신앙고백이면서, 끊임없는 사색과 탐구의 대상이 되는 위대한 신비다. 따라서 이런 역사와 현실을 고려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 특히 기독교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이 주제에 대한 깊은 묵상과 치열한 연구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 「2부 _ 〈배덕만 _ “스콥스 재판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중에서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이 물질이나 사물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진화 과정을 통해 출현한 인간에 하나님이 자신의 통치를 위임하셨다면, 그러한 맥락에서 기능을 부여하셨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를 특별하게 만드셨다”라고 신학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월튼식의 창조 이해가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현대 진화론이 제시하는 인간의 출현 방법은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지도, 인간의 존재론적 특별성을 배격하지도 않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 「2부 _ 〈정대경 _ 진화론과 기독교〉」 중에서 최근 신앙과 신학에 대한 혼동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사건이 있었다. 소위 창조과학과 창조신학을 혼동하는 사건인데,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이 양자를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한다면 신학자의 자격이 없다. 물론 이 둘의 구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신앙은 신학으로 발전할 수 있고, 신학이 아무리 학문의 체계적 요건을 담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신앙적 요소가 그 뿌리와 토대에 견고하게 머물러 있는 것이 사실이어서, 신학도 언제나 신앙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 「3부 _ 〈박일준 _ 시작과 에너지〉」 중에서 일부 사람은 과학과 신학이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며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현대 수학을 받아들이면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학과 신앙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그런 질문을 하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과학자가 베토벤의 음악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어색하게 느껴진다면, 과학과 신학이 충돌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로 어색해야 한다. 왜냐하면 과학과 신학은 각기 다른 영역을 다루기 때문이다. 과학은 자연 현상의 원리와 법칙을 밝히는 반면, 신학은 인간의 영적 질문과 의미, 목적을 탐구한다. 이 두 분야는 서로 다른 영역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3부 _ 〈장재호 _ 과학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중에서 그런데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자. 쟤가 틀리면 저절로 내가 맞는가? 정확하게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다. 창조과학과 진화론 사이의 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예컨대, 만에 하나 진화론이 정말로 엉터리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져서 과학의 세계에서 쫓겨났다고 하자. 자, 그럼 진화론이 과학 분야에서 차지하고 있던 자리가 비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저절로 창조과학이 그 빈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하나의 결정적인 절차가 더 필요하다. --- 「3부 _ 〈신익상 _ 낭비에서 지혜로〉」 중에서 지구의 위기는 지구에서 존속하여 살아가는 인류의 삶의 방식에서 야기된 것이다. 커다란 지구의 표면에 거주하는 인류가 푸른 행성인 지구 환경을 이렇게 변화시켜왔다는 점 자체가 의아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자명한 현실이자 사실이 되어버렸다. 기후 변화의 그 위력과 파괴력은 우리를 깊이 절망하게 한다. 지구의 이러한 변화 앞에서 인간은 다시 거대한 전환을 요청받고 있다. 지구는 한 행성이지만, 동시에 지구 위에 거하는 모든 생명의 터전이자 근거이다. 신학적으로 지구는 신이 창조한 피조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지구의 위기는 신이 창조한 피조 세계의 위기이다. --- 「4부 _ 〈전철 _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 중에서 …여전히 지구중심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 중에서 우주적 지평의 담론이 가장 두드러지게 발전한 분야는 단연코 그리스도교 신학이다. 우주 지평의 신학적 논의는 국내에는 아직 낯설게 들리지만, 영미권에서는 최근 수십 년간 관련 연구가 상당히 쏟아져 나왔다. 다만, 아쉬운 점은 기존 연구 대부분이 외계 지적 생명체(이하, ‘외계인’)의 존재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외계인의 존재가 내포하는 신학적 함의를 탐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비해 외계인의 부재 가능성을 고려하거나, 외계인 문제를 떠나 우주적 지평에서 전개되는 신학적 성찰은 미미한 실정이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우주신학 논의는 지구인을 넘어 외계인을 다룬다는 점에서 지구 혹은 지구인중심적 관점을 극복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외계인의 부재 가능성이 내포하는 신학적 의미를 포함해서, 오늘날 우주신학이 고려해야 할 더 많은 문제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 「4부 _ 〈김정형 _ 외계인 논쟁과 우주신학의 전망〉」 중에서 우리는 맥락의 서로 다름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면서, 과학과 신학의 상호작용을 들여다보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신학적 역량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 문자주의는 창조에 대한 협소하고 왜곡된 상을 보여준다. 성서가 증언하는 창조는 우주 기원에 대한 과학적 진술과 다르다. 오늘날 충분히 연구된 성서 비평 작업을 통해서도 확보될 수 있는 문헌적 증거들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다. 또한, 성서가 증언하는 그 창조의 의미가 과학적 기원 사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이 담고 있는 성서학적 함의를 통해서 그것이 지향하고 있는 신학적 지평이 어떠한지를 들여다 봐야한다. 우리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이스라엘 지혜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이 지혜문학에서 보여주는 창조신학의 지평 속에서 드러나는 창조의 본질은 창조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창조 질서 안에서의 삶, 곧 창조주의 뜻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을 지시하고 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다. --- 「4부 _ 〈신용식 _ 창조 질서 안에서의 삶에 대한 현상학적 이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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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또다시 종교 재판이 진행되었다.” _ 〈머리말〉 중에서
성서와 교리사의 정교한 복원은 창조론의 지평을 넓힌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성서 본연의 뜻이라기보다 후대 조직신학의 투영에 가깝고, 신약은 오히려 그리스도 중심의 창조를 고백하며 문자주의를 탈피한다. 역사 속 루터는 지금도 진행되는 ‘계속적 창조’를, 칼뱅은 자연적 방식을 통한 하나님의 ‘진화적 계획’을 긍정했다. 웨슬리 역시 생태계의 질서를 하나님의 지혜로 보았으며, 현대 진화론은 인간을 격하하기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목적과 책임을 더욱 선명히 드러낸다. 1부╻성서 안의 창조론 - 홍국평 : ‘무로부터의 창조’는 성서 본문보다 후대의 조직신학적 해석(eisegesis)이 투사된 결과이다. - 이상목 : 신약 창조 신앙의 핵심은 문자적 표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창조주 기독론’이다. 2부╻창조론과 진화론, 그 교리적 역사의 추적 - 손호현 : ‘무로부터의 창조’는 2세기에 처음 제시된 것으로, 성서 본문에 대한 소급적 해석을 경계해야 한다. - 이용주 : 루터의 창조 신앙은 일회적 사건이 아닌 지금도 지속되는 ‘계속적 창조’에 대한 인격적 신뢰이다. - 이오갑 : 칼뱅은 제2 원인을 통한 하나님의 ‘순수한 진화 계획’에 기초한 진화론적 창조론을 제시했다. - 박창훈 : 웨슬리는 ‘존재의 황금 사슬’ 개념을 통해 생태계의 유기적 질서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했다. - 배덕만 : 스콥스 재판 등 반진화론 운동의 역사를 추적하며 창조과학이 유일한 답이 아님을 역설한다. - 정대경 : 현대 진화론은 공통 조상을 말할 뿐 인간을 격하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신학과 과학의 대화는 신앙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전케 한다. 창조과학은 성서를 과학 교과서로 오해한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며, 신학자가 자연과학을 탐구하는 것은 더 나은 신학을 정립하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다. 과학과 신학은 서로 다른 층위의 질문에 답하는 보완적 관계이며, 이러한 지성적 낭비를 새로운 지혜의 언어로 전환하는 것이야말로 사이비 종교와 근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유일한 대안이다. 3부╻과학과 신학의 대화 - 박일준 : 창조과학은 공포와 억압을 재생산하는 마녀사냥적 이데올로기이자 사이비 과학이다. - 이성호 : 신학자가 과학을 탐구하는 이유는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다. - 장재호 : 기독교 내 유사 창조과학 비판과 균형을 위해 신학교육 내 과학신학 도입이 시급하다. - 신익상 : 창조과학의 과학적 타당성 논쟁이라는 퇴행적 낭비를 새로운 지혜의 언어로 전환해야 한다. 이제 신학의 시선은 지구의 위기와 우주의 광활함으로 향한다. 기후 위기 시대의 창조 신앙은 인간만이 아닌 피조세계 전체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지구 신학’으로 거듭나야 하며, 현대 천문학의 성과를 반영하여 외계 생명체까지 포괄하는 우주적 지평의 논의가 필요하다. 결국 창조는 물리적 기원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아니라, 창조 질서 안에서 이웃과 타자를 향한 실천적 책임을 다하는 현상학적 고백으로 완성된다. 4부╻지구신학, 우주신학 그리고 현상학적 창조신학 - 전철 : 지구 위기의 시대, 모든 생명체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지구 신학’으로의 전환을 촉구한다. - 김정형 : 지구중심적 관점을 탈피하여 외계 생명체 가능성까지 포괄하는 ‘우주 신학’의 전망을 제시한다. - 신용식 : 레비나스 현상학을 통해 창조 신앙을 창조 질서 안에서의 삶을 지시하는 윤리적 이야기로 풀어낸다. 『창조론과 창조신학』은 단순히 이론적 논쟁을 넘어, 억압적인 종교 이데올로기 앞에서 신음하는 한국교회를 향한 지성적 해방 선언이다. 한국 신학계를 대표하는 15명의 석학이 한데 모여 빚어낸 이 결실은, 신앙과 학문의 자유를 갈망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믿음 안에서, 무지와 공포를 넘어 창조의 거룩한 신비를 새롭게 마주하고자 하는 모든 독자에게 이 책을 강력히 권한다. “…자유케 하시는 진리가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교회를 억압과 무지에서 해방하시리라 희망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_ 〈머리말〉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