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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 지성을 대표하는 새뮤얼 존슨의 풍자적 산문 국내 최초 번역ㆍ출간
새뮤얼 존슨은 18세기 영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비평계의 위인이다. 그러나 그의 문인으로서의 업적이 이러한 비평적 입지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풍자시와 희곡, 산문과 같은 다방면의 장르에 있어 두루 재능을 드러낸 것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재치 있는 토론가로서 평가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라셀라스』는 그의 창작물 중 가장 깊이 있는 성찰을 선보이는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새뮤얼 존슨은 흔히 영문학사에 있어 인간과 자연의 보편적 본성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신고전주의 비평가의 대표자로 언급되고 있지만, 그의 비평관에 대한 추상적 개괄을 넘어 그의 산문이 국내에 번역ㆍ출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8세기 초반이 『로빈슨 크루소』의 다니엘 디포와 『걸리버 여행기』의 조나단 스위프트의 시대라면 18세기 후반은 『라셀라스』로 대표되는 새뮤얼 존슨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적 정신에 기반한 토론 모임이라는 현대적 의미의 ‘클럽’이란 말이 정착된 것도 바로 새뮤얼 존슨의 정열적인 문단 활동 덕분이며, 현재의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 있기 이전에 영어 사전의 기틀을 잡은 것 역시 새뮤얼 존슨의 가장 위대한 업적에 해당한다. 이외에도 자신이 편찬한 셰익스피어 전집 서문에 붙인 새뮤얼 존슨의 셰익스피어론은 지금까지도 셰익스피어 연구의 전범으로 꼽히고 있다. 또한 정치적 에세이 및 칼럼 등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는 등 그의 문단 내외를 넘나드는 업적은 한두 가지로 요약될 수 없을 정도이다. ‘절대적 행복’의 환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새뮤얼 존슨의 비핀적 성찰 지난 1995년 《워싱턴 포스트》지(紙)가 ‘지난 천 년간 가장 위대한 문인’으로 선정한 바 있는 새뮤얼 존슨의 이 풍자적 산문은 현대 독자로서는 얼핏 진부하고 따분한 ‘인간의 행복’이라는 오랜 주제에 접근하면서도 허구적 이야기의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 또한 그러한 이야기의 매력 속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삶에 대한 균형감 있는 시선과 이것을 담아내는 허구적 형식 간의 조화는 이 작품을 단순한 교훈적 우화로 치부할 수 없게 한다. 부족한 것이 없는 ‘행복의 골짜기’에 살고 있는 아비시니아(옛 에티오피아)의 왕자 라셀라스는 자신을 둘러싼 이 행복에 의심을 품고 ‘골짜기 너머의 삶’ 속에 벌어지는 인간들의 일반적인 운명을 탐색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 여정에 온갖 학문을 섭렵하고 은둔하며 사는 학자 이믈락과 그의 여동생 네카야 공주가 함께하게 되고, 권력의 다툼이 벌어지는 공적 삶과 가정의 소소한 불행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사적 생활을 체험하면서 인간 본성과 삶의 본질에 대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이치와 상식의 성찰들을 선보인다. 새뮤얼 존슨은 이 지적 순례를 이집트 변방과 카이로를 유랑하며 만나는 많은 군중들과 라셀라스 왕자 일행이 벌이는 대화의 형식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간접적 체험으로서의 대화의 범위는 과학 기술에 수반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한 이성적 사유에서부터, 인간의 이성과 상상력이 지닌 불확정성(과대망상증에 빠진 천문학자의 이야기), 인간관계의 사회적 가치 등에까지 이른다. 이 밖에도 신앙 행위, 도시와 전원의 생활, 문학과 학문, 정치, 순수와 경험, 젊음과 늙음, 영혼과 내세 등등 삶 속에서 우리가 부딪히기 쉬운 여러 경험의 양상과 제반 문제에 대해 라셀라스의 이야기는 이성적 성찰과 합리적 사유의 전범을 전달하고 있다. '유토피아적 이상’의 좌절과 그 패배의 역사가 선사하는 '평범한 진리' 과학적 지식에 기초한 인류 문명의 연속적 발전을 꿈꾸던 계몽주의 시대에 대한 일반적 선입관과 달리 새뮤얼 존슨은 오히려 이러한 단순한 이상 추구의 ‘헛됨’과 패배로 귀착되고 마는 그 결말을 폭로하고 있다. 그의 계몽주의는 인류 역사의 무한한 발전에 대한 순진한 신뢰에 기초해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18세기의 지식인의 시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유토피아에의 동경과 지향을 바라보는 새뮤얼 존슨의 시각은 세속적 일상을 떠난 고고한 학자의 순진한 지평을 넘어선다. 그는 유토피아에의 동경 그 자체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이러한 인간의 초월적 지향이 매번 좌절되는 경험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총 49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산문이 매번 행복의 좌절과 이상의 패배의 경험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은 이를 증명한다. 새뮤얼 존슨은 ‘행복의 골짜기’라는 안이한 유토피아에서 인간의 삶의 모순이 혼란스럽게 뒤얽혀있는 디스토피아로의 역전된 상승을 경험하는 라셀라스의 궤적을 그려냄으로써, 이 실패로부터 평범한 진리를 이끌어낸다. 즉 이상적 해답에의 맹신이야말로 ‘이상’에의 추구를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이 새뮤얼 존슨의 비관적 인생관을 집약했다거나 허무주의적 가치관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라셀라스』의 첫 문장에서 ‘공상의 속삭임’과 ‘희망의 환영’을 좇는 이들에게 ‘라셀라스 왕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권하는 그의 목소리는 결코 독자들에게 인간의 삶의 이상을 권위에 기대어 지혜를 전달하는 지식인의 목소리라 할 수 없다. 오히려 이는 그러한 이상적인 답을 맹신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이며, 이러한 성찰에 독자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작가의 도전적인 목소리에 가깝다. 인류의 희망적 미래에 대한 회의로부터 출발한 새뮤얼 존슨의 지적 순례 영국 문학사에서 그 이름으로만 접하던 국내 독자들에게 『라셀라스』는 그의 고전적 저작을 제대로 된 번역으로 만나볼 수 있는 기회이자, 그의 문학적 업적을 추상적 개괄이 아닌 직접적인 목소리로 ‘체험’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다. 새뮤얼 존슨의 당대 비평관과 유토피아에 대한 그만의 독자적 해석을 담고 있는 이 ‘허구적 산문’은 이상과 행복에의 동경이라는 인간의 오랜 주제에 대한 계몽주의적 인식을 살펴볼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가 태동하던 초기의 형태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19세기에 편중되어 소개되어온 서구 소설에 익숙한 국내 독자들로서는 소설이라는 허구적 양식이 근대적 형식을 갖추어가던 18세기라는 과도기적 이행기를 경험하게 해줄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인 것이다. 어느 장을 펼쳐보아 읽어도 이들의 대화는 마치 계몽주의 시대 한 클럽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생생한 체험을 제공한다. 이 체험은 단순히 18세기의 독자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현대 독자들에게도 이 열띤 대화의 여정은 열려있다. 확정적 진리의 해답이나 인류의 이상적 미래에 대한 절대적 믿음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덧없는 좌절로 돌아갔던가를 경험한 것으로 치자면, 18세기의 독자들에 비해 엄연히 자행되고 있는 살육과 불화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는 현대 독자들의 체험이 부족할 리 없다. 현대 독자들이야말로 이 작품의 여정을 충실히 따라볼 필요가 있는 미래의 독자였던 셈이다. 이들의 마지막 순례에 해당하는 49장의 제목은 “결론이 아무것도 없는 결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