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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 사시는 실제 들어가면서 존재의 전환에서 하나님 나라로 Part 1. 보좌의 쉼에 이른 혼 1주 차 — 보좌의 쉼에서 시작된 여정: 임재에서 통치까지 흐르는 구속의 길 2주 차 — 심판을 지나 생명으로: 전존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출애굽 3주 차 — 죽음을 통과한 존재: 하나님의 본성 안에서 보물로 서다 4주 차 —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말씀으로 Part 2. 존재의 교체와 생명흐름의 회복 5주 차 — 길갈: 존재의 교체, 쉼에서 통치로 6주 차 — 벧엘: 임재를 회복하는 교회의 길 7주 차 — 벧엘에서 여리고로: 심판 속에서도 흐르는 생명의 통치 Part 3. 의의 병기로 순복된 몸과 현재천국 8주 차 — 여리고에서 요단으로: 무너짐에서 부활로 9주 차 — 죽음을 지나 연합으로: 혼이 죽고 한 영 된 교회의 부활 여정 10주 차 — 현재천국에서 영원천국으로: 어린양의 혼인잔치 전체 결론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 사시는 실제 에필로그 마라나타 — 주 예수여, 속히 오소서 부록 부록 A — 보좌의 쉼: 성경·어거스틴·칼뱅과의 대화 속에서 본 존재의 정렬과 통치의 영성 부록 B — 성경의 ‘보좌’가 증언하는 ‘보좌의 쉼’ 부록 C — 어거스틴이 증언한 ‘보좌의 쉼’ 부록 D — 칼뱅이 증언한 ‘보좌의 쉼’ 부록 E — 성도가 ‘보좌의 쉼’에 끌리는 이유 『보좌의 쉼, 몸을 통한 통치』를 마친 당신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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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교회입니다
이전의 여정이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주님과 연합되는 길을 걸었다면, 이번 여정은 그 고백 이후, 주님이 그 존재를 교회 그 자체로 세우시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나는 주님의 것이다’를 넘어, ‘나는 교회이다. 나는 공동체인 그리스도의 몸이다’라는 고백입니다. 2. 혼의 죽음은 혼의 소멸이 아닙니다 이 책에서 ‘혼의 죽음’이란 혼의 존재 자체가 소멸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옛 사람의 정체성이 십자가에서 끝나고 새 사람의 정체성을 의식하는 혼의 부활을 전제한 기능적 항복이며, 동시에 의지의 방향이 자아에서 그리스도로 돌아서는 존재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3. 쉼과 통치는 함께 흐릅니다 모세는 아나파우시스의 훈련을 통과해, 카타파우시스의 쉼을 담고, 하나님의 통치를 대표하는 존재로 세워졌습니다. 홍해 앞: ‘가만히 있으라’ → 아나파우시스, ‘지팡이를 들고 바다를 가르라’ → 카타파우시스. 성막 안에 머물러 음성을 기다림 → 아나파우시스, 율법을 받아 백성에게 선포함 → 카타파우시스. 쉼 없는 통치는 불안으로 흐르고, 멈춤 없는 사명은 결국 자아의 확장으로 무너집니다. 4. 몸은 하나님의 통치가 흘러가는 살아 있는 통로입니다 존재가 보좌에 정렬되면, 몸도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순복됩니다. 이제 그 몸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성전이자, 그 통치가 흘러가는 살아 있는 통로가 됩니다. 5. 한 지체의 삶은 몸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실제로 흐르고 있는 ‘몸’ 안에서는, 감추어진 죄가 전체 흐름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아간의 죄는 하나님의 전리품을 훼손함으로써 성막 공동체의 흐름을 차단한 죄였습니다. 작은 불순종이나 은밀한 욕심조차도 공동체 전체의 흐름을 막을 수 있기에, 임재의 흐름 속에 사는 성도는 자신의 존재가 교회라는 몸 전체와 연결되어 있음을 깊이 자각해야 합니다. 6. 교회는 임재를 위한 자리를 먼저 준비합니다 수넴 여인은 선지자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집 옥상 위에 작은 다락방을 짓고 엘리사를 위한 거처를 마련합니다. 이 결정은 단순한 환대를 넘어, 임재를 위한 거처를 삶의 가장 높은 자리에 둔 선택이었습니다. 사역보다 임재를 먼저 준비하고, 열매보다 누가 중심에 계신가를 고백하는 존재가 교회입니다. 7. 지식보다 몸의 순복, 형식보다 임재 엘리사는 결국 다락방에 올라갑니다. 아이 위에 몸을 포개고, 눈과 입과 손을 맞추며 전 존재로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진짜 사역입니다. 지식이 아니라 전 존재로, 구조가 아니라 임재로, 형식이 아니라 생명의 흐름으로. 8. 임재를 싣고 울며 곧게 나아가는 교회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육신의 본성 — 곧 본능, 자아, 소유, 자식에 대한 집착 —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싣고 울며 직진하는 순복된 존재,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고백이 실재가 된 상태입니다. 9. 내가 붙드는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입니다 여기서 삶의 주체가 완전히 바뀝니다. ‘나’라는 주체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주체가 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살아가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더 이상 내가 애써 붙드는 연약한 믿음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곧 십자가 순종이 나를 붙들어 사는 힘입니다. 10. 현재천국은 영원천국의 씨앗입니다 보좌의 쉼에 이른 혼은 광야와 심판 속에서도 주님께 정렬됩니다. 존재의 교체를 통과한 몸은 이미 생명의 흐름을 품어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냅니다. 의의 병기로 순복된 몸은 현재천국에서 두 증인으로 서 있습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 사십니다. 내 혼은 보좌의 쉼에 안식하고, 내 몸은 그분의 통치에 순복하며, 현재천국을 드러내는 성전으로 존재합니다. 현재천국은 영원천국의 씨앗입니다. 11. 보좌의 쉼은 내가 도달한 경지가 아닙니다 보좌의 쉼은, 내가 주님께 도달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보좌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부르심에 나의 존재가 ‘예’ 하고 정렬된 자리입니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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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은 멈춰 있는 상태가 아니다
자기 통치가 끝난 몸을 통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자리다 앞선 여정이 하나님 앞에 선 한 존재의 자기 통치가 끝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길이었다면, 이 책은 그 연합된 존재가 더 이상 홀로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멈춘 모세를 부르셔서 자기 백성에게 보내셨고, 한 존재 안에 머물던 보좌의 쉼을 백성의 구원과 공동체 안의 하나님의 통치로 확장하셨다. 존재 교체는 개인의 내면에서 완결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존재는 다른 지체들과 연결되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살아간다. 교회는 무엇인가? 예배당인가? 조직인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활동하는 공동체인가? 『보좌의 쉼, 몸을 통한 통치』는 이 질문을 존재에서 다시 시작한다. 교회는 먼저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렇다면 그 몸은 누구의 생명으로 움직이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 사람의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 몸을 지금 누가 통치하고 있는가? 생각이 움직이는 대로 말하고, 감정이 흔들리는 대로 반응하며, 욕망이 요구하는 대로 선택하고, 자기 보존이 위협받을 때 즉시 방어한다면, 신앙을 가지고 있어도 몸의 실제 통치자는 여전히 ‘나’일 수 있다. 모세, 없음과 텅 빔을 통과한 사람 그래서 이 책은 공동체론을 곧바로 교회 조직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먼저 보좌 앞에 멈춘 한 존재에서 시작한다. 그 대표가 모세다. 40세의 모세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능력이 있었고 정의감이 있었으며 민족을 향한 열망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모세는 이집트 궁정의 강한 모세가 아니었다. 40년 광야를 통과하여 자기 힘과 자기 판단이 소진된 모세였다. 그에게 남은 것은 없음, 텅 빔, 정지됨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떨기나무가 불탄다. 하나님은 자기 능력으로 사명을 수행할 준비가 된 모세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자기 활동이 멈춘 모세를 부르신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 책은 신을 벗는 행위를 아피에미, 자기 주도권을 버려버리는 순복의 언어로 읽는다. 자신의 발판을 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안에서만 서는 존재. 그 존재가 보냄받는다. 여기서 아나파우시스와 카타파우시스가 만난다. 아나파우시스는 자기 활동의 멈춤이다. 카타파우시스는 그 멈춘 존재 안에 하나님의 통치가 머무는 보좌의 쉼이다. 따라서 보좌의 쉼은 사역의 반대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역이 시작될 수 있는 존재의 자리다. 이 질서를 놓치면 신앙의 활동이 많아질수록 자기 통치도 커질 수 있다. 모세가 므리바에서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앞세웠을 때 일어난 일이 바로 그것이다. 쉼 없는 통치는 불안이 되고, 멈춤 없는 사명은 자아의 확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보좌의 쉼에 머무는 존재에게서는 다른 통치가 시작된다. 내가 무엇인가를 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몸을 통해 일하신다. 바울이 말한 “의의 병기”다. 아간과 수넴 여인, 몸으로 연결된 공동체 이 책의 독특함은 여기서 몸을 개인의 육체에만 한정하지 않는 데 있다. 성도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동시에 다른 성도들과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그렇기에 신앙은 끝까지 개인적인 문제로 남을 수 없다. 아간 한 사람의 감추어진 욕심이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행진을 멈추게 한 사건은 이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내 문제는 나만의 문제”라는 현대적 개인주의는 성경의 몸 개념과 충돌한다. 하나님의 임재가 실제로 흐르는 몸에서는 한 지체의 자기 통치가 다른 지체와 무관하지 않다. 반대로 한 지체의 순복 또한 공동체에 생명을 흐르게 한다. 수넴 여인의 이야기가 그 반대편을 보여 준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람을 위해 다락방을 준비한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임재가 머물 자리를 마련한다. 이 작은 방에서 책의 교회론이 응축된다. 사역보다 임재가 먼저다. 결과보다 중심이 먼저다. 프로그램보다 생명의 거처가 먼저다. 나중에 그 방에는 죽은 아이가 눕혀진다. 그러나 죽음이 들어온 그 다락방에서 다시 부활이 일어난다. 엘리사는 상징인 지팡이만으로 죽음을 해결하지 않는다. 직접 올라가 자신의 몸을 아이의 몸에 포갠다. 지식이나 구조가 아니라 전 존재가 생명에 참여한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책은 말한다. 제도와 시스템, 프로그램과 직분은 필요하지만 그것 자체가 생명은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몸에서 몸으로 흐르는 곳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공동체에는 환대가 있다. 용납이 있고, 화해가 있으며, 타인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몸이 있다. 이것이 보좌의 쉼이 관계를 얻는 방식이다. 두 암소, 울면서도 곧게 가는 순복 사무엘상의 두 암소는 그 몸의 순복을 더욱 급진적으로 보여 준다. 송아지를 뒤에 둔 채 언약궤를 싣고 벧세메스로 향한다. 암소들은 운다. 그러나 돌아가지 않는다. 그 울음에는 중요한 영적 현실이 있다. 순복은 감정이 사라지는 일이 아니다. 몸의 자연적인 느낌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느끼면서도 그 감정이 통치자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울면서도 임재를 싣고 곧게 간다. 그 모습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소명을 보여 준다. 교회는 자기 욕망과 자기 보호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임재를 세상 가운데 운반하는 몸이다. 이때 몸의 통치는 권력 행사가 아니다. 사랑이다. 화목이다. 용납이다. 자기 권리를 버려버리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생명이다. 그래서 현재천국은 추상적인 신학 개념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통치가 순복된 몸과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화해의 질서로 나타나는 현장이다.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그리고 두 증인 이 통치는 인간의 강한 믿음에서 나오지 않는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다시 바라본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산다.” 삶의 토대는 흔들리는 나의 믿음이 아니다. Pistis Christou —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셨고, 십자가와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과 승천에 이르셨다. 그 신실하심이 지금 성령 안에서 교회의 삶을 떠받친다. 그러므로 몸의 순복은 자신의 결단을 끝까지 유지하는 인간 의지의 승리가 아니다. 더 신실하신 그리스도께 존재 전체를 맡기는 삶이다. 이 토대 위에서 교회는 요한계시록의 두 증인처럼 세상 가운데 선다. 강해서가 아니다. 연약한 몸을 가지고도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에 참여하기 때문에 끝까지 증언한다. 그리고 그 증언은 현재천국에서 영원천국을 향한다. 현재천국은 영원천국의 씨앗이다. 오늘의 몸에서 살아지는 사랑과 화목, 보좌의 쉼 안에서 이루어지는 순복, 고난 가운데서도 유지되는 그리스도의 통치, 이 모든 것은 장차 어린양의 혼인잔치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전히 드러날 하나님 나라의 선취다. 그래서 이 책은 교회론이면서 동시에 종말론이다. 개인의 몸에서 시작하지만 새 예루살렘까지 간다. 혼에서 몸으로, 몸에서 공동체로, 공동체에서 현재천국으로, 현재천국에서 영원천국으로. 그리고 모든 길을 관통하는 한 문장이 남는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 사십니다.” 그러나 이제 이 ‘나는’ 홀로 서 있지 않는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연결된 몸 안에 있다. 나는 교회다. 나는 공동체인 그리스도의 몸이다. 『보좌의 쉼, 몸을 통한 통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다. 대상 독자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독자를 위한 책입니다. 하나님과의 연합과 개인적인 임재 경험이 몸과 관계와 공동체로 어떻게 확장되는지 알고 싶은 독자 보좌의 쉼을 개인의 심리적 평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통치가 몸을 통해 나타나는 존재 상태로 이해하고 싶은 독자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개인적 고백에서 “나는 교회이며 공동체인 그리스도의 몸입니다”라는 자리로 더 깊이 나아가고 싶은 독자 자기 통치의 종결과 존재 교체 이후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몸이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되는지 탐구하고 싶은 독자 ‘혼의 죽음’을 혼의 소멸로 오해하지 않고, 자기 통치가 끝난 혼이 한 영 된 생명에 참여하는 순복으로 이해하고 싶은 독자 아나파우시스와 카타파우시스의 관계를 이해하고, 멈춤의 쉼에서 몸을 통한 통치로 이어지는 길을 살아가고 싶은 독자 몸을 자기 욕망이나 자기 보존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진 의의 병기로 살아가고 싶은 독자 교회를 프로그램·조직·건물보다 먼저 그리스도의 생명이 흐르는 몸과 임재의 공동체로 다시 이해하고 싶은 독자 아간의 사건을 통해 한 지체의 자기 통치와 은밀한 불순종이 공동체 전체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묵상하고 싶은 독자 수넴 여인의 다락방을 통해 사역보다 임재, 형식보다 생명, 결과보다 하나님이 머무실 자리를 먼저 준비하는 교회의 길을 배우고 싶은 독자 벧세메스로 향하는 두 암소처럼 감정과 애착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통치와 집착을 버려버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몸으로 운반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은 독자 사랑과 용납, 화해와 식탁, 관계의 순복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가시화되는 공동체를 세우고 싶은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 자신의 믿음의 강함보다 그리스도의 신실하심(Pistis Christou)을 존재와 삶의 토대로 삼고 싶은 독자 현재천국을 단지 개인적인 영적 경험이 아니라 보좌의 통치가 몸과 공동체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 살아지는 하나님 나라로 이해하고 싶은 독자 현재천국과 어린양의 혼인잔치,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천국이 어떻게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는지 묵상하고 싶은 독자 이사야·에스겔·다니엘·요한계시록의 보좌 본문과 어거스틴·칼뱅의 신학을 통해 ‘보좌의 쉼’의 성경적·신학적 토대를 함께 살펴보고 싶은 독자 보좌시리즈 3권에서 개인의 몸과 일상으로 살아낸 임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공동체의 통치로 확장되는지 이어서 읽고 싶은 독자 |